너와 나의 시간
CHAN YEOL X XIUMIN
겨울이 나른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은 채 몇 남지 않은 잎사귀를 떨구어내려 팔을 흔들었고, 지나치는 이의 두꺼운 니트에서는 일 년 내 묵은 옷장의 좀약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밀려온 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자 시내 복판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던 남자가 덥석 팔을 잡아끌었다.
“핸드폰 하나 바꾸고 가, 동생!”
붙임성 좋은―혹은 뻔뻔한― 남자는 나를 가게로 밀어 넣고는 알록달록한 휴대폰들의 성능을 연신 자랑했다. 또래 남자들보다 작은 내 키는 이런 잡상인들을 끌어모으기에 딱 좋았다.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영 아쉬운지 남자의 눈초리가 샐쭉하게 올라붙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스물넷 백수에게 길가다 휴대폰을 덜컥 바꿀만한 재력이 있을 리 없는 것을.
등을 돌려 가게를 나오려던 귀에,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가게 밖으로 새어나가는 화려한 노랫소리에 지나치던 여중생들이 꺄아꺄아 하며 저들끼리 좋아 박수를 치며 유난을 떨었다. 3년째 잊고 지내던, 아니 잊고 싶어 몸서리쳤던 너의 목소리. 스치는 노래 자락 하나에 잊은 줄만 알았던 니가 온전하게 되살아났다. 잔인한 니 목소리가 새까맣게 가슴을 메웠고, 흐물거리는 기억 뒤로 살을 에는 바람이 작게 울었다.
◀
“아, 진짜. 또 졌어!”
“넌 지치지도 않냐?”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다리를 바둥대는 찬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준면이 말했다. 이깟 팔씨름 져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괜시리 머쓱해져 어깨를 으쓱거리자 찬열이 커다란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내 왼팔을 잡아챘다. 손등 한 번, 손바닥 한 번. 생선 뒤집듯 손을 뒤집으며 흘깃 주위를 둘러본 찬열이 소리 없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키도 작고, 손도 작은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 몰라.”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너의 머리를 나는 가볍게 쥐어박았다. 찬열의 말을 들은 것인지 뒤돌아서 양말을 꿰어신던 준면이 ‘니가 쓸데없이 큰 거야’ 하며 투정 섞인 면박을 주었다. ‘쓸데없이 큰’ 너와 ‘키도 작고 손도 작은’ 나는 갓 비밀스러운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연인이었다.
너는 나에게 참으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주위에서는 시끄럽다거나 장난기가 지나치다며 몸서리를 치고는 했지만 나에게 너는 햇살이었다. 으레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기약 없는 데뷔일을 기다리며 연습과 숙소를 반복하는 그때의 생활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거리를 걷는 것과 같았다. 그 기나긴 여정에 한창 지쳐갈 때 즈음, 찬열은 내게 성큼 다가왔다. 형,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연습실에 홀로 남아 널브러져 있는 내게 별거 없이 던진 너의 말. 숨을 몰아쉬며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거울에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장미 한 송이를 내미는 니가 있었다. 너는 이런 저를 이상하게 보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듯 말했지만 나는 이미 장미에 꼬인 한 마리 벌레가 되어있었다. 유별나게도 나를 놀려먹던 꼬맹이는 단숨에 내 옆자리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한동안은 참으로 좋았던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는 기억도 가물거리는 옛일이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어린 나이에 남들 모르게 키워가는 비밀스러운 사랑이라는 타이틀도 좋았고, 걸어가는 연습생들의 등 뒤에서 슬쩍 손을 잡았다 놓는 너의 곰살맞은 애정이 나는 좋았다. 불 꺼진 연습실에서 처음 나누었던 가슴 떨리는 첫 키스도, 어느 한적한 골목의 지저분한 모텔 침대에서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도. 너와 함께라는 것으로 나는 그저 좋았다. 그래서 나와 너는 잠시 눈이 멀었었나 보다.
그토록 기다렸던 데뷔일이 정해지고, 우리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물론 주위 사람만 하겠느냐마는 생전 처음 하는 녹음이니 무어니 하며 지내던 24시간에 너와 나의 시간은 손톱만큼도 찾기 힘들었다.
“아하암, 이제 민석이 너만 남았지? 형은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라니까 끝나면 저 화상 깨워서 들어가라.”
연습생 때부터 함께 해왔던 매니저 형은 지난밤 여자친구와 한참 다투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형이 길게 하품을 하며 손가락으로 찬열이를 가리키고는 뚜둑, 뚜둑. 목을 휘휘 돌려가며 녹음실을 나섰다. 그 기다란 몸을 녹음실 한쪽의 소파에 길게 누이고는 도롱도롱 코를 고는 찬열은 문이 여닫기는 소리에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럴 법도 하지. 나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다시금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위의 등에 초록 불이 들어왔고 나의 마지막 녹음이 끝나가고 있었다.
“야, 임마! 일어나!”
“형형, 제가 조금 있다가 꺠워서 갈게요. 얘 어제 부모님이랑 통화한다고 엄청 늦게 잤거든요.”
“음……. 그래. 역시 니가 맏형이긴 하다, 민석아. 으이구, 저것들은 언제 철이 들런지.”
작업을 마무리 한 디렉터 형이 찬열의 다리를 툭툭 걷어차도 찬열의 꼭 감긴 눈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어쩐지 조금 처량하기도 하고, 욕심이 나기도 해 나는 착한 형입니다― 하는 웃음을 만면에 머금고는 형을 녹음실 밖으로 밀어냈다. 덜컥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지난 후에는 찬열의 고른 숨소리가 녹음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찬열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저 다 예뻤다. 찬열은 항상 나에게 예쁜 건 제가 아니라 나라며. 저는 잘생긴 거라며 씩씩거렸지만 내게는 그 모습조차 예뻤다. 요 커다란 눈에 커튼처럼 드리워진 긴 속눈썹도 예뻤고, 남들보다 조금 더 큰 동그란 귀도 예뻤다. 머리맡에 앉아 찬열의 귀를 한참 만지작 거리고 있었을까. 찬열의 오동통한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아마 꿈에서 뭐라도 먹는 게 분명할 테지. 눈이 멀어있었던 나는 가만히 찬열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연한 살갗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촉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너무나 안일해져 있었다. 함께 지내는 10명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안일해졌었는지도 몰랐다. 그래. 녹음실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다.
이튿날, 꿀맛 같은 잠을 청하던 나를 꺠운 건 미친 듯이 울려대는 휴대폰이었다. 번호를 확인한 나는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고, 휴대폰 너머에서는 진득하니 낮은 목소리가 내 고막을 흔들었다. 나는 채 씻지도 못한 채 회사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언제부터냐.”
“……”
“박찬열이도 알아?”
“……”
“니가! 니가 벙어리 새끼야? 니가 호모새끼고 박찬열한테 그 지랄을 하는걸 박찬열이도 아느냐고!”
사무실 가운데 놓인 ‘이 수만’이라고 적힌 명패가 내 얼굴 옆을 가르고 지나갔다. 장인이 만들어준 자개 명패라 했던 것은 허무하게 내 등 뒤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버럭버럭 악을 쓰는 소리 사이사이로 갖가지 물건들이 날아들었다. 무언가가 머리에 맞은 것도 같았다. 뜨끈한 액체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 씨벌 새끼들. 기집년들이 호모호모 하니까 진짜로 그래도 되는 줄 알아?”
“……제가, 제가 찬열이를 좋아해서. 그래서 그랬어요. 찬열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나쁜 놈이 되어도 괜찮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 때문에 니 꿈이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내 철없는 애정에 니가 불 꺼진 촛불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사랑한 너는. 누구보다 햇살 같았던 너는 온전히 햇살이어야 했다. 쏟아지는 욕지거리를 뒤로하고 나는 회사를 등졌다.
눈물이라거나 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조용히 모두가 깨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소리가 나는 물건은 그냥 두었다. 언젠가 어, 이거 민석이 형 거네. 하며 내 생각 한 번이라도 해 주겠지. 모두가 잠에 빠져있던 새벽녘,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캐리어를 끌어안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달달 거리는 낡은 캐리어 바퀴가 모래사장에 푹 하고 빠졌다. 나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숙소를 뒤로한 내가 향한 곳은 너와 꼭 가보자 다짐했었던 어느 한적한 바닷가였다. 꼭 가자며 이야기를 할 때 이곳에는 너와 내가 있었는데, 두 발을 디딘 건 나 하나뿐이었다. 점심때 즈음 되자 휴대폰은 멈출 줄 모르고 울었다. 액정에 선명한 ‘박찬열 부재중 47통’.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백현의 번호가 액정에서 빛을 발했다. 나는 가만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형, 어디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형 때려치고 나갔다는데 이게 무슨 말이야?
다급하게 말하는 백현의 목소리 뒤로 찬열의 고래고래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게 말이지. 별거 아니야. 나 이제 좀 지쳐서 그래. 조곤조곤 백현에게 말하는 찰나, 거친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서 찬열의 목소리가 터질 듯이 흘러나왔다.
-김민석! 너 뭐야, 뭐하자는 거야 지금? 아니다, 너 어디야. 형 어디냐고!
애들 다 있는 앞에서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박찬열 정신 나갔니. 물 흐르듯 말하자 수화기 너머로 쿵쾅거리는 소리가 예까지 들렸다. 문이 삐걱하고 닫기는 소리. 그리고 동굴같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 화장실 문을 잠그고 통화하고 있을 니가 생각이 나 나는 조금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도화선이 되었었나 보았다. 찬열은 뜬금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꺽꺽대며 말하는 니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니가 나를 참 많이 좋아했었구나.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형……. 도대체 왜 그러는데……. 나 진짜 형 없으면 안 돼…….
울먹이는 찬열의 목소리에 나는 ‘곧 될 거야’라며 답하고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나보다 훨씬 잘난 너는 곧 잘난 여자를 만날 거야. 휴대폰이 연이어 울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의 주인공 박찬열의 인생이 앞으로 더없이 빛나기를 나는 기도했다. 휴대폰은 그 이후로도 대여섯 시간을 더 울어 재꼈다. 버티지 못한 배터리가 전원을 내릴 때까지. 이제는 눌러도 반응하지 않는 휴대폰을 괜시리 툭툭 터치했다. 비가 내렸다. 지나는 사람 누구 하나 우산 쓰지 않는 맑은 날씨에, 내게만 그제서야 비가 내렸다.
▶
찬열의 전화는 멈추지 않았다. 집까지 찾아오는 통에, 얼결에 자취까지 하게 된 것이 3년이었다. 너는 그때의 그 아이들과 가수로 멋지게 데뷔를 했고, TV에 얼굴을 비치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액정에 네 이름이 뜨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1년. 1년이었다. 액정에 박찬열이라는 이름이 더이상 뜨지 않게 된 것은. 조금은 서글픈 일이었다. 너와 나의 사랑은 1년짜리 사랑이었을까. 박찬열의 연인이었던 스물한 살의 김민석이 이제는 스물넷이 되었다.
나는 조금 원망했다. 몇 년 만에 너를 떠올리게 한 휴대폰 팔이 남자를. 그리고 목소리 하나에 되살아나 버린 박찬열에 가슴 아파하는 나를. 너는 이미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었나 보다.
그냥저냥 술을 마셨다. 너 없이도 생긴 친구들과 어울려 이 술도 부어보고 저 술도 부어보며. 왁자지껄 떠들며 술판을 벌이기를 일주일가량 했을까, 집에 껌딱지처럼 늘러붙어 배달되는 해장국집 번호를 찾는 내 등을 누군가가 철썩하고 내리쳤다. 뭐야 하며 고개를 들자 아르바이트하는 곳의 은영이가 내 이럴 줄 알았어 하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일하는 곳과 집이 옆집이나 다름없다 보니 종종 이런 일이 있고는 했다.
“이러다가 오늘도 출근 늦으려고 그러죠, 오빠?”
요 며칠 교대를 늦게 해주었더니 독이 잔뜩 올라 예까지 찾아온 듯싶었다.
“나 오늘은 진짜 늦으면 안 되거든요? 오빠 6시까지 꼭 와야 해. 알았죠?”
“무슨 볼일 있어?”
뭉그적대며 예의상 되묻자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은영이 털푸덕 주저앉아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아니, 내가 좋아한다던 애기들 있잖아요. 은영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양 볼에 바람을 한껏 넣고는 연이어 말했다.
“내가 진~짜 이 나이 먹고 쪽팔려서 이런 이야기 안할라그랬는데에, 요즘 유명한 그룹 알죠 오빠? 내가 거기 진짜 이뻐라하는 애가 있거든요? 백현이라구 엄청 노래도 잘하고!”
박찬열 생각에 며칠 간 술독에 빠져 살았건만 이 망할 기집애는 또다시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니가 말하는 백현이 아마 내가 말하는 백현과 같은 사람이겠지. 여기서 내가 난 걔네랑 숙소생활도 했었어. 하고 말하면 은영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박찬열의 이야기까지 꺼내면 어떻게 될까. 나는 작게 실소했다.
“아 왜 웃어? 하여튼 요 앞에 쇼핑센터에 오늘 팬 사인회 하러 온다 그러더라구요. 늙은 누나 팬이 원정은 못 가도 그 정돈 가야겠다 싶어서. 헤헤. 그니까 오빠 오늘은 진짜 늦으면 안 돼요. 알았죠?”
아마 요 며칠 네 생각이 난 것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예견한 것이었을까. 나는 문득 욕심이 났다. 나를 다 잊은 너라도 좋으니 그냥 그 햇살 같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 팔랑이는 속눈썹이 보고 싶었다. 오물거리는 네 입술이, 동그란 네 귓바퀴가 보고 싶었다. 떠난 건 나임이 분명한데, 미련은 끈질겼다.
“뭘 근무까지 바꿔가면서 와요? 오빠도 얘네 좋아했나 봐?”
칭얼대는 은영의 목소리가 연신 고막을 쑤셨다. 내 미련은 결국 나를 쇼핑센터까지 질질 끌고 왔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너를 알아보는 것에는 1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대다 못해 발끝까지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너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이 예뻐져 있었다. ‘그건 형이지.’ 하며 샐쭉샐쭉 웃는 네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살이 많이 빠졌구나. 키는 더 큰 거 같네.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도 여전하고. 멀어서 알 수는 없지만 나비처럼 팔랑대던 속눈썹도 여전하겠지. 이렇게 날이 추운데, 니가 좋아하는 군밤 모자는 왜 안 하고 왔어. 내놓은 네 귀가 빨갛게 얼어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주머니에 고이 모셔둔 핫팩을 부비적거리며 앞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아 진짜 너무 귀여워, 아 나 어쩌지!”
옆에서 종알대는 은영의 목소리는 이제 내 고막까지 닿지 못했다. 엉거주춤 다가가다 밀리고 떠밀려 어느새 내 앞의 사인 줄은 턱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너와 나의 거리는 10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봤는데 너는 아직까지 제 앞사람의 종이에 사인을 끄적이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마스크를 올려 쓰고 니가 좋아하던 군밤 모자를 꾹 눌러썼다. 너와 함께 샀던 반지가 아직도 끼워진 내 손을 들킬까 싸구려 장갑도 꼈다. 눈만 빼꼼히 내민 내 차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름이 뭐예요?”
니 목소리가 3년간 얼어있던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너는 여전히 예뻤고, 햇살같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열이 한껏 오른 핫팩을 사인지 옆으로 밀었다. 나를 흘낏 쳐다본 너는 작게 웃으며 ‘고마워‘ 하고는 사인을 휘갈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너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고, 나는 너에게서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기대라는걸 했었나 보다. 괜시리 찡해진 코끝을 장갑으로 슥 훔쳤다. 은영은 어느새 다가와선 종알대며 사인지를 내밀며 자랑을 했다. 오빠는 왜 이름 안 받았어요? 하며 묻는 말에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름없는 너의 흔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두 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었다.
사인 끝에 찍힌 점이 작은 브이자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은영이 받았다는 사인지를 빼앗아 이름 뒤를 확인했다. 그저 평범한 점 하나. 저기요, 죄송한데 사인 받으신 거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주위 사람의 팔을 붙들며 애원하듯 말하자 몇몇 사람이 인심 쓴다는 듯 사인지를 펼쳐 보였다. 여기도 이름 뒤에 점 하나, 저기도 이름 뒤에 점 하나.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사인지 마지막에 찍힌 작은 브이자 모양의 점에 눈물이 떨어져 아스라이 번졌다. 너는 나의 3년을 너무도 쉽게 무너뜨렸다.
◀
그러니까, 이게 우리 비밀 사인이야. 오케이? 브이자로 보이는데 이게 알고 보면 애기 하트거든? 왜 그거 있잖아, 손가락으로 하는 쪼그만 하트. 그거같이! 스케줄표에 점 대신 애기 브이자 있으면 내가 형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알겠지? 사랑해, 민석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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