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읽으셨다면 예쁜 댓글 남겨주세요 :)
[NCT/이동혁] 크레용
w. 2젠5
너와 함께하는 등교 시간은 꽤나 좋았다는 걸 네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너와 함께 저녁식사를 먹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보다 더 좋았을지도. 학교 친구들을 만날지도 몰랐기때문에, 고아원 얘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옆에서 배시시 웃는 네 미소 때문이었을까. 이동혁, 이제노가 왜 싫은건데? 눅눅한 길 위를 너와 걸었다. 이제노, 그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떨구는 너를 본다. 난 다 알고 있는데, 네가 이제노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12반이고 넌 7반이라 널 데려다주고 나면 다시 우리 반으로 돌아가야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네가 그 예쁜 머리칼을 휘날리며 반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밝게 인사하는 모습이 좋았고, 그리고 나와 인사하는 너를 보는 이제노의 표정을 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의식같은 거였다. 내가 김시민 옆에 있으니, 넌 신경 끄라는 일종의 신호. 김시민이 내게 인사하고 이제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이제노는 김시민이에게 눈짓하곤 다시 책을 봤다. 아니, 보는 척했다. 고아원에서 자라온 나였다, 이제노도 김시민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숨겨야했다. 김시민이의 가장 아픈 구석을. 그게 설령 나를 찌르는 칼날이 될지라도 그래야만했다. 못 보던 팔찌네, 예쁘다. 종례가 일찍 끝나 찾아간 너의 반에서 네 팔찌를 매만지던 이제노와 그에 수줍게 웃던 네 얼굴을 봤다. 응, 엄마가 사주셨어. 순간 눈이 마주쳤다. 김시민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사준건데, 고마워 동혁아. 팔찌를 차면서 좋아하던 네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교하는 길이면 늘 네 친구들은 나와 무슨 사이냐며 음흉하게 웃곤 했다. 나는 괜히 못 들은 척 했었지만 내 모든 신경은 네 입술에 있었다. 동혁이가 좋으니까 같이 하교하지. 나 간다- 김시민이 제 보라색 가방을 꼭 쥐고 제 반의 문을 나서며 날 이끌때면, 느릿하게 가방을 싸던 이제노가 허리를 굽힌 채로 우리 쪽을 볼때면, 난 왠지 모를 승리감에 도취되곤 했다. 그래, 네가 아무리 이제노를 좋아해도 네 옆엔 나 뿐인 걸. 그래서 더 물었다. 그 말 진심이었어? 그럼 넌 항상 웃으면서 고개를 떨궜다. 넌 너무 조심스러워서 잔인해져버렸다. 누가보면 널 욕할지도 모르겠다. 나와 이제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게 아니냐고.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누군가를 내가 가만히 두지는 않을거지만 말이다.
-
이제노가 또 왔다. 주말마다 기부금을 들고오는 데 그쳤으면서, 이젠 웬 박스를 들고 왔다. 김시민을 늦게 깨우기만 하면 됐었는데, 김시민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버리면 됐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시발, 네 앞에선 욕을 하지 않는 난데 욕을 해버렸다. 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여기 있어.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네가 창을 내다볼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노를 빨리 찾아야했다. 지성이가 뭘 들고 막 뛰어가기에 대충 주의를 주고 다시 뛰었다. 형아가 뛰지 말라며! 지성이가 뒤에서 짜증을 냈지만 그게 우선이 아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자원봉사자들이 웅성거렸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원장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이제노가 시민이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숨이 가쁘게 달렸다. 현관을 열자마자, 박스를 든 이제노가 있었다. 김시민? 우리 방 쪽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이제노가 있었다.
동혁아 인사해, 오늘부터 주말마다 봉사 올 제노야, 7반이면.. 원장님이 네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아 급히 말을 잘랐다. 네! 제가 잘 소개해줄게요! 네게서 박스를 받아들고 식당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식당이 우리 방에서 제일 멀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기 동혁아, 내 뒤를 따라오던 이제노가 날 불러세웠다. 내 이름도 아나, 박스가 꽤나 무거웠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아까 김시민 봤는데, 걔도 여기서 봉사, 하는거지? 이제노가 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뭐라고 말해야 이제노가 계속 김시민을 좋아할 수 있을까. 어, 동혁아! 그 박스 여기로 좀 가져다 줘!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자원봉사자 형이 조리실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노의 검은 눈이 집요하게 날 옭아맸다.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결정해야했다. 이제노가 계속 김시민을 좋아하게 내버려두던가, 아니면 못을 박던가. 이제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느새 길어버린 앞머리가 눈가를 맴돌았다. 시민도 여기서 봉사해. 데이트 할 겸, 이제노가 아, 하며 고개를 떨궜다. 김시민이 알면 소리를 지를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선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노한테 내가 들고 있는 박스를 다시 들려서 조리실 안으로 보냈고, 다시 숨 가쁘게 뛰어서 우리의 방으로 향했다. 창문 앞에 서 있는 너한테 화만 내버렸다. 네가 이제노에 대해 물을까봐 화난 척 했다. 동혁아! 얼른 내려와! 제노 간대! 원장님의 말에 네가 커튼을 쳤다. 저 사이로 이제노가 가는 걸 지켜볼 거면서. 나는 괜히 네 머리를 헝클이고 밖으로 나섰다.
-
저녁 시간이었다. 아까 이제노가 들고 온 박스가 참치 박스였는지 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주 요리였다. 봉사자들이 다녀가면 정신이 없어서 반찬 수가 줄어드는게 일상이었는데 지성이는 아직도 적응을 못했나보다. 옆에서 징징대는 지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 맞은 편에 앉은 김시민이 시금치를 깨작거렸다. 김시민이는 생선을 좋아했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게 좋댔나, 젓가락으로 김치찌개를 뒤적거렸다. 커다란 참치 한 덩이가 젓가락에 스쳤다.
식사가 끝나고 너와 고아원 마당에 앉아 하늘을 봤다. 학교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여기선 보인다. 김시민이의 얼굴이 여전히 묘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제노가 김시민 뒷담화를 하고 다니면 어쩌지, 그땐 몰랐지만 이제노는 생각보다 속 좁은 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표정이 안 좋은 널 보니까 괜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에, 김시민이 나와 같은 고아라고, 그래서 같이 등하교 하는 거라고 소문이 나면 나는 네 곁을 지킬 수 없는걸까. 김시민, 예쁜 네 이름을 불렀다. 응, 동혁아. 네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
나 보다 앞서서 계단을 올라가는 네 뒷모습을 봤다. 언제 이렇게 컸지, 싶더라. 벌써 어엿한 어른이 되어가는 널 붙잡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예쁜 너로만 남아있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회에 나가고, 네가 이제노 같은 멋진 애를 만났을 때, 내가 옆에 있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오늘은 빨리 목욕을 해야겠다. 제 목욕바구니를 챙기는 김시민을 재촉했다.
불 끌게, 잘 자. 네 곤색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넌 고아원에 잘 적응했고, 혼자서도 다 할 줄 알지만, 아직도 내겐 13살의 김시민 같은걸. 동혁아, 이건 어떻게 해? 동혁아, 네 크레용 써도 될까? 그렇게 묻던 널 기억한다. 넌 내가 모르는 줄 알겠지만, 밤마다 우는 너 때문에 잠을 설친적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를거다. 울고서 잔뜩 지쳐버렸으면서,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나와 내가 깼는지 확인하는 너 때문에 나는 자는 연기가 늘었다. 동혁아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너를 당장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노가 너 고아라고 소문내면 어쩔거야?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다. 내 쪽을 보고 누운 네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렇게 마주보고 누운게 꽤나 오랜만이었다. 넌 선뜻 대답하지 못하더라. 내 질문이 너무 아팠던걸까. 응? 네게 다시 물었다. 솔직히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나 말고 이제노를 선택하더라도, 네가 행복하다면 난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