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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되서 방 밖으로 나오니까 또 그때처럼 시민이가 없어. 또 울면서 자기 방에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동혁이. 시민이가 싫다고 해도, 나는 시민이를 데리고 오늘 밤 도망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는거지. 양 볼이 잔뜩 부어올라서 시민이가 또 괜히 걱정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괜히 머쓱해지지만, 자기보다 시민이가 더 놀랐을거라고 생각해서, 동혁이는 최대한 담담하게 시민이의 방 쪽으로 향함. 근데 뭔가 이상한거지. 시민이 부모님이 시민이 방 앞에서 막 울고 있고 몸종들도 수군거리고. 거기 무슨 일..?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면서 동혁이가 방 쪽으로 다가가면, [도련님, 행복하세요. 안녕,] 하는 쪽지만 남긴 채 시민이가 사라져있었음.
김시민! 동혁이는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지키면서 양반이 무슨 대수야. 일주일을 꼬박 찾아다녔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시민이네 부모님도 시민이가 어디에 간지도 모르고, 사람을 잘 찾는다는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찾아내질 못 함. 그렇게 점점 동혁이는 자제력을 잃어가고 시민이의 쪽지가 헤질 때 까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기만 함. 네가 없는 데 내가 어떻게 행복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혁이 상태가 점점 나빠지니까, 혼사고 뭐고 다 엎어짐. 야위어가는 동혁이가 안쓰러웠던 동혁이네 엄마가 시민이와 닮은 몸종 하나를 붙여주지만 그 애한테 말도 안 걸고, 가져다주는 음식도 안 먹음. 아니, 애초에 18살이나 된 애가 닮은 애가 있으면 괜찮아질거라고 믿는게 말이 안 되지만, 어머니도 그만큼 간절하니까. 그래서 동혁이한테 거짓말을 함. 도망친 노비들은 대부분 기생이 되거나 자살한다고.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아버지가 동혁이의 혼사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이유는, 자기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였음. 동혁이랑 혼인하려고 했던 여자애는 예조 판서의 막내 딸이었는데, 동혁이한테 한과를 한가득 보내주던 여자애였음. 그 생각을 하니까, 자기 방에서 편지를 대충 읽으면서 시민이한테 한과를 먹여주던게 기억이 나는거지. 도련님, 전 이런거 필요없어요, 하면서 자기만 빤히 보던 시민이가. 그래서 괜히 편지 읽는 척 하면서 툴툴거리던게.
사실 동혁이 방에는 시민이에게 줄 선물들이 많았음. 시민이 성인식 하면 꼭 제가 꽂아줄 빨간 비녀, 예쁜 꽃신, 중국 상인에게 산 강아지 그림 따위의 것들. 시민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동혁이는 자꾸 시민이를 위한 선물을 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금방이라도 도련님! 하면서 대문을 넘어올 것 같아서, 그리고 이렇게라도 안하면 시민이를 영영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저잣거리에 나간 동혁이. 예전에 처음으로 시민이랑 함꼐 저잣거리에 나갔을 때가 떠오르는 동혁이.
도련님, 저건 뭐예요?
저건 고양이라는 동물이야. 야옹- 하고 울어.
그럼 저건요?
저건 매, 하늘을 날아다니는 최고의 사냥꾼이지.
이젠 안 울거라고 다짐했는데. 어른이 되면 감정을 숨겨야한다고 시민이한테 그랬던것 같은데 자꾸 눈물이 나는 동혁이. 어딜가도 시민이 밖에 안 보이는데. 동혁이는 대충 아무 돌 위에 걸터 앉음. 그때, 시민이가 대답을 하지 않았던 그 날 밤, 같이 도망쳐야했는데. 시민이가 떠난 이후, 매일 하루에도 수십번씩 동혁이는 그렇게 후회했음. 나는 왜 일찍 시민이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왜, 뭐가 무서워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짐. 비도 찔끔찔끔 오는게 이렇게 더 있다가는 흠뻑 젖을게 분명한데, 도련님, 감기 걸리셔요! 하면서 우산을 들고 뛰어올거야, 시민이가 올거야. 하면서 가만히 고개를 떨구는 동혁이. 그떄였음, 저기 옆에 저수지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림. 무슨 일이야, 하고 기웃거리면 사람 뼈가 발견됬다는 이야기. 5년을 기다렸는데, 너는 , 결국 너는. 동혁이는 그 앞에서 무너져버림.
동혁이가 굳이 혼인을 하지 않아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권력욕이 강했던 아버지는 승승장구했고, 동혁이는 시민이의 방 안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짐. 그날도 그랬음, 시민이가 사라진지 꼭 5년이 되던 날, 어머니가 어떻게 알곤 시민이 방을 열어젖힘. 동혁아, 아버지 좀 말려봐, 부탁이다. 하면서. 어머니한테 이끌려 간 사랑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 예조판서부터, 아버지, 의금부의 수령까지. 그 앞에 앉아서 잔뜩 널린 여러 켤레의 신발을 보니, 시민이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날이 생각 나는 동혁이. 어떻게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가냐, 그리고 무릎에 고개를 묻는데, 속닥이던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음. 반역을 꾀하는 목소리들을.
반역을 꾀하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거나, 집안이 몰락하거나 둘중 하나의 결과가 초래됨. 그리고 동혁이네 집은 두번째의 결과를 맞음. 아버지는 목이 베어졌고, 어머니는 포졸들에게 끌려가서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집으로 돌아옴. 믿었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다른 역모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왕은, 동혁이네 가족을 본보기로 삼기로 결정함. 결국 나도 이리 천한 신분이 되었구나, 마치 그 아이 처럼. 빨간 포승줄에 묶여 쇠똥을 싣는 수레에 짐 처럼 옮겨진 동혁이는 삐걱거리는 나무 판자에 등을 기댐. 더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잖아.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는 미쳤고, 시민이는 죽었고. 이 수레가 어딘가에 닿으면, 그 곳에서 죽어야지. 시민이를 만나면,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꼭 안아줘야지. 하면서 미소짓는 동혁이.
동혁이가 탄 수레가 저잣거리를 지나고, 사람들은 동혁이에게 욕을 하거나, 오물을 던지기 시작함. 어디선가 날아든 돌멩이 하나가 동혁이의 얼굴에 맞았고, 입술이 터져버림. 사실 동혁이는잘못 한 것도 없는데, 아버지가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집안 전체가 몰락해버린게 분한거야. 결국, 나는 다 아버지 때문에. 그때,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는게 아니라, 그냥 중간에 나왔다면 시민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아니, 그냥 처음부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날이 맑았음. 고개를 들자, 꼬챙이에 꾀어진 아버지의 머리가 보임. 원망스럽지만,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부모에게 남은 일말의 사랑인지, 동혁이는 아버지의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봄. 아버지도 곧 만날 수 있겠네요, 라고 생각하면서.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달려 시민이에게 줄 댕기를 사러 자주 들렸던 거리를 지남. 시민이에게 주고 싶었던 빨간 댕기도 보이고, 빨간 비녀도 보이는게 죽기 전 하늘의 마지막 배려인가, 자꾸 헛것이 보이는 것도 같고. 도련님? 수레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시민이가 보이는 것도 같고. 죽을 때가 되어서, 벌써 네가 날 마중 나온 건가. 시민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동혁이는 의식을 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