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함께 숨어버린 그 날.
영민은 마지막으로 세운을 찾았다. 유일하게 자신이 믿는 사람이자, 뭐든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세운에게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영민은 간절한 맘으로 세운을 만났다.
"세운아 부탁 하나만 하자"
"나한테 여자 하나만 붙여줘, 아주 강한"
5. 가짜 미끼
영민이 숨겨놓은 미끼는 김여주, 그녀와 같은 착의를 한 여자를 심어놓는 것이었다. 가짜를 만들어 범인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원래 살던 집에 세운이 제게 붙인 여자를 '김여주'라는 이름으로 살게 했다. 같은 머리길이에 같은 옷차림. 겉보기엔 여주와 똑같았다. 들키지 않게 집 안에선 커튼을 쳐서 철저히 막아놓고, 밖을 나가야 할 때면 모자에 마스크를 쓰도록 부탁했다. 혹시모를 일을 대비해 집 안 곳곳엔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했다. 범인이 여주로 착각해 접근한다면 바로 그를 잡을 수 있도록 몇번 연습도 해봤다. 영민이 옆에서 지켜본 바 이 여자는 정말 강했다. 범인을 제압할 확실한 힘이 있었다.
그래, 이쯤이면 그녈 지키면서 범인까지 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영민은 많은 장치를 해놓고 여주와 함께 이 집을 떠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숨어산 지 어연 2년. 그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위협을 받은 데 반해, 숨어살고부터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인가. 놈이 눈치를 챈 건가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해결책을 생각치 못했던 영민은 놈이 미끼를 물 때만을 막연히 기다렸다. 손 놓고 무력하게 기다리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더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주가 아직이야? 라고 물을 때마다 그녈 껴안으며 조금만 더, 라고 말할 뿐. 희소식이 오길 바라고 또 바랬다.
그리고 마침내 2년 만에 그 놈이 나타났다.
"저를 죽일 것 같진 않던데요. 그냥 계속 감시하는 것 같았어요"
"더 없어요? 가까이 왔다거나"
연락이 오면 다 끝날 줄 알았다. 놈을 잡고 여주에게 당당하게 나가 살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만 갔다.
"없어요. 오히려..."
"..오히려?"
"아, 아녜요. 좀 더 지켜봐요"
여자는 할 말을 하려다 영민의 눈치를 본 뒤 말을 접었다. 말을 하려다 만 그녀의 대답이 왠지 수상쩍었지만 영민은 애써 못 본 척 부인했다. 두려웠다. 그녀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불안한 말이 나오면 자신 스스로가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떼어놓지 말라는 여주를 간신히 설득해 나온 것이었다. 그 어떤 성과라도 가져가야만 했다. 떠날 때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영민의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요. 아니 그럼 그 놈에게 확실히 보여주죠.
오늘부터 같이 삽시다"
여주의 얼굴에 환한 미소만을 띠우고 싶은 영민이었다.
아가씨 E
W. 슈가링
"집에서는 편하게 지내세요.
집 밖에선 연인처럼 다닐거지만"
그렇게 영민은 원래 살던 아파트에서 새로운 여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고용 관계로만 몇번 마주치고 전화로만 대하다 막상 같이 지내게 되니 어색했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년 간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도 모자라 낯선 남자와의 동거라니 얼마나 불편할까.
"죄송합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빨리 보내드릴게요"
"이게 제 일인걸요. 매달 돈 받고 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영민의 우려와 달리 여자는 차분했다. 그녀는 몸과 함께 멘탈도 강한 사람이었다. 가녀리게 자신만을 의지하는 여주와 달랐다.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여자의 태도에 영민은 멋쩍은 미소로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긴장 탓에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엄습했다. 미끼를 문 듯 했는데,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숨어살기 위해 들어갈 땐 여주만을 들여보냈어야 했는데. 힘들더라도 자신은 이 곳에 남아 이 여자와 함께 사는 척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건 순전히 생각 못한 제 탓이었다.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 살고싶었던 제 이기적인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의 머릿속엔 온통 여주 뿐이었다. 지금쯤 그녀는 뭐하고 있을까.
그녀와 함꼐 뒹굴던 그 때가 그립다. 돌아가고 싶다.
치우지 않아 먼지가 쌓인 침대에 풀썩 누우며 그는 생각했다. 이 곳에서 일년 간 여주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여주를 들어안아 침대에 가볍게 눕혔던 그 날. 자신을 끌어안으며 싱긋 미소 짓던 그녀의 표정. 달콤한 첫 날밤이었다. 그 놈이 나타나기 전에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는데.
사실 여주와 함께 있는 시간은 다 금같이 소중했기에 지금의 거처도 나쁘지 않았다. 햇빛을 평생 보지 못해도 좋았다. 여주만 곁에 있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여주는 하루빨리 그 곳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알아, 나도. 네가 얼마나 밖을 그리워하는지.
아침마다 제 품에서 벗어나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여주를 보는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제가 그녀를 갈망하듯 여주 또한 세상 밖을 동경했다. 그렇지만 더이상 그녀를 도울 자신이 없던 영민은 그녀가 그 명상을 깨고 제 품에 안기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한참을 밖을 내다본 뒤엔 늘 자신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2순위라도 만족했다.
그래도 제게는 희망이 있었다. 잡히면 이 불안한 삶은 정리할 수 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막상 놈을 마주쳐도 달라지는 게 없자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주를 생각하다보니 그녀 곁에 있는 세운이 함께 떠올랐다. 아프지 않고 옆에 꼭 붙어 챙겨달라고는 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저앉는 그녈 붙잡고 있는 세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조차가 너무나 불쾌했다. 둘만 같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도 싫었다. 둘이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그래도 나름 같이 지낼 사이라며 말을 트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주를 맡아줄 사람은, 그나마 안심이 되는 사람은 정세운 한 명 뿐이었다. 세운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주 옆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서있다는 게 싫은 거니깐.
여주에게 전화라도 걸어볼까. 망설이며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수 십번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난 걸지 못했다. 분명 넌 이렇게 물을 거니깐.
'잡았어?'
못 잡았다고. 아예 갈피조차 못 잡겠다고 말하면 넌 어떻게 반응할까. 또, 가엾게 울어버리진 않을까. 바로 돌아갈 것도 아니고 며칠 간 남친 행새를 하며 이 곳에 머무를 터인데 벌써부터 널 울게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나보다 더 간절할 텐데. 막연히 창 밖만 바라보며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을 널 짓밟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하기가 난처했다. 내가 어떤 여자와 함께 집에 있다고 하면 넌 바보같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거니깐. 지금도 충분히 불안할 텐데 그 마음에 불을 지피긴 싫었다. 결국 어떻게 해도 네게 연락할 방도는 없었다.
-
아침이 밝았다. 텅 빈 방안에 홀로 잠든 영민은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해는 떴지만 아직 여섯시였다. 분명 봄인데도,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데도 영민은 추위를 느꼈다. ##그녀가 없는 이 곳은 시린 겨울이었다. 영민은 공허한 침대를 한껏 끌어안으며 온기를 느끼려다 이내 포기하고 자리에서 털썩 일어났다. 조용히 밖을 나가보니 거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휑했다.
그 여잔 아직 자는 건가.
영민은 앞으로 있을 시간들에 슬슬 걱정이 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리 목숨이 위태로워지길 바라는 영민이었다. 범인이 그녈 해치려 접근하면, 그녀가 제압하고 나는 놈을 잡고. 머릿속에선 착착 진행되는 이 일이 왜이리 느리게 흘러가는 것일까.
그렇게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저 쪽 방에서 그 여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의 걸음에 영민은 어색한 자세로 얼어붙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 네"
"언제쯤 밖에 나가실 거예요?"
굳은 몸으로 대답만 툭 내뱉는 영민과 달리 여자는 차분하게 오늘 할 일을 물었다. 장을 보든지 데이트를 하든지 놈을 잡기 위해 밖에 나가야했다. 준비할게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며 마스크를 쓰는 그녀를 보며 영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저기 보이시죠? 저, 감시하는거"
"...저거 못 잡나요?"
"섣불리 다가갔다가 들키겠죠"
여자가 조용히 눈짓으로 가리킨 곳엔 검은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한번도 그녀 곁에 나타나질 않더니 요샌 밖만 나가면 그녀 뒤를 밟는다고 했다. 눈 앞에 얼쩡대는 놈을 보자마자 영민은 급히 달려가 잡고 싶었지만, 여자는 주먹을 꽉 쥔 영민의 손을 날쌔게 잡아챘다.
"한 번에 잡아야해요. 지금은 불안해요."
맞는 말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싱겁게 끝나버리면 안 되니깐. 대신 영민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른 뒤 귓속말을 하는 척하며 놈을 자세히 훑었다. 그 때 여주에게 달려들던 그 새끼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왜 가만히 있는거지. 놈은 정말 감시 그 외엔 하는 게 없었다. 이상하다.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예전과 다르다. 확실히.
"정말 저렇게 하루종일 쫓아다니기만 해요?"
"네, 며칠 전부터 나타나선 계속 저래요"
"...가짜인 게 들킨건가"
작게 중얼거린 영민의 말에 여자는 가늘게 실눈을 뜨며 검은 복장의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많이 다뤄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놈의 속셈은 따로 있다는 걸. 이렇게 눈치챌 만큼 티나게 뒤따라올 리가 없다. 적어도 사람을 죽일 사람이라면. 세세히 놈을 훑던 여자는 자신이 간파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 영민을 건드렸다. 그러나,
"......."
초조한 눈동자,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영민을 본 순간.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꿰뚫고 확실해지면 말해주자.
-
"영민씨, 괜찮아요?"
영민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또 악몽을 꾸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이었다. 여주가 떠나가는 꿈. 놈이 여주를 잡아먹는 꿈. 그녀와 관련된 기괴한 꿈들이 제 머릿속을 괴롭혔다. 영민이 자주 악몽을 꾸자, 여자는 아예 영민과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는 영민을 곁에서 간호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 되었다. 여자는 젖은 수건으로 영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히 닦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힘들면 돌아가요. 제가 어떻게든..."
"하아...전 괜찮아요...잡기 전까지 안 올라가요"
영민은 제 땀을 닦아주는 여자의 손을 잡아 '괜찮다' 사양했다. 여자는 제 손길 하나라도 닿지 않으려하는 영민을 빤히 바라봤다. 그 여자가 어떤 여자길래, 그가 이렇게 아파하는 걸까. 그렇지만 묻지 않았다. 영민이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 수 있게 가만히 곁을 지킬 뿐이었다.
-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영민이 그녀와 함께 연인행세를 한 지.
놈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한 달 쯤 되자 영민의 마음은 성급해졌다. 침착하게 앞을 내다볼 여력이 없었다. 그는 많이 지쳤으니깐. 다시 밖을 나갔을 때 영민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젠 가만히 지켜보지 않겠어. 숨이 막힐 때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가봤지만, 역시 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멀리 도망가버렸고, 영민은 좌절했다.
"...흐으..윽.."
그는 이미 마음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불안함과 초조함에 바짝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여주와 떨어져있는 그의 심리는 그랬다. 늘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이에 결국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경솔하게 일을 망쳤다. 그는 지금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이 싫었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여자는 땅에 주저앉아 처연하게 우는 영민의 등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이제 말해줄 때가 되었나.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했는데, 자신의 늦은 판단은 결국 그를 더 망가트려 놓았다. 그녀는 제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영민을 보며 그를 놓아주기로 다짐했다. 사실 영민에게 놈의 속셈을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데. 강자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움에 떠는 사슴같은 그를 보면 쉽사리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속일 수 없다. 절망적으로 다쳐가는 그를 보기가 힘들다.
"영민씨, 말해줄 게 있어요"
".....흐..윽..."
"제가 봤을 때 범인은..."
"......."
그녀의 직감이 맞다면, 그 놈은 분명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의 목적은 뚜렷했으니깐. 왜냐면 그는,
"시간을 끄는 것 같아보였어요"
".....네?"
범인이 아니었다. 최소한 영민이 찾는, 여주를 죽인 진범은 장담컨대 절대 아니었다. 그 밑의 수하같았다. 저렇게 허접한 놈이 범인일 리 없었다. 오랫동안 이 일에 손댔던 그녀가 내린 판단이다.
정말 그녀의 직감이 맞다면, 이미 진범은 가짜인 자신을 진작에 눈치채고 또다른 미끼를 심어놨을 것이다.
오히려 미끼를 문 건, 순진한 영민이었다.
진짜 여주가 위험하다.
"영민씨, 지금 당장 여주씨께 가세요. 그녀가 위험해요"
마침.
늦어서 죄송해요. 다 써놓고 맘에 들지 않아 지우고 다시 썼어요.
이번 편이 쓰기 제일 힘들었네요. 약속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다음 화는 정말 꼭 빨리 가져올게요.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