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title
w.안단테
새하얀 시트를 부여잡고 눈을 깜빡였다. 뻑뻑한 눈이 아파 눈물이 흘렀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빳빳한 시트를 연신 구겨잡고 있었다. 텅 빈 옆자리를 마른 팔로 탕탕 두들기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쪽으로 걸어갔다. 밤새 그가 끄적이던 일기장을 찾아헤매였다. 성격답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책상이 내 손이 가닿는 곳 마다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갖가지 볼펜이 어지러이 흩어졌고 결재해야 하는 서류와 결재를 마친 서류가 뒤섞여버렸지만 아랑곳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글을 썼는지. 일기장. 일기장을 찾아야 했다.
어지럽게 흩어진 책상. 온통 구겨진 종이들. 뚜껑이 열린 채로 잉크를 쏟고 있는 볼펜들. 손에 덕지덕지 묻은 잉크를 무시하고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헝클었다. 싫다. 읽고싶다. 찾고싶다. 그의 일기장을 찾고싶다. 허탈한 마음에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뭉글뭉글 눈물이 차올랐다. 어린애처럼 자꾸 왜이래. 너 뭐하는거야.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봐도 결국엔 그에게 집착하게 되고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 그를 미워하게 되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니까. 딱 한마디만, '사랑한다' 하는 한마디만 해주면 난 괜찮은데. 싫다. 뒤죽박죽 엉망으로 엉겨드는 생각을 접고 책상에 엎어졌다. 내가 미쳤나보다. 픽 웃고는 고개를 드는데 내 시선을 잡아끄는, 살짝 열려진 서랍 사이로 보이는 분홍색 책갈피. 그 밑에 보이는 정갈한 검정색 노트. 떨리는 손을 뻗어 서랍을 열어 책갈피와 작은 노트를 꺼냈다. 마카펜으로 쓴건지 검정색 노트 표지엔 분홍색 글씨로 'Dear. 화기花期'라고 쓰여있었다. 아무리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이정도는 읽을 수 있다. 화기. 꽃이 피어 있는 기간. 대체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걸까.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잠재우고 그의 일기장을 펼쳤다. 하얗고 빳빳한 종이가 한 장 넘어가고, 그 다음장도 넘어가고. 드디어 그의 정갈한 글씨체를 찾았다. 새하얀 종이 위를 춤추는, '2007. 12. 31'.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왜, 저 숫자들을 적어놓았을까. 왜 우리가 만난 날을 적어놨을까.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물음과 쓸데없는 희망을 애써 짖밟곤 다음장을 넘겼다. 텅 빈 종이. 다시 다음장을, 그리고 그 다음장을. 네다섯장 쯤 넘겼을까. 번진 잉크자국 사이로 보이는 글씨. 울컥울컥 터져나온 잉크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렸을 그가 떠올라 숨을 들이쉬었다. 흐트러진 그의 글씨체. 숨막히는 내용.
[손을 잡았다. 두려움에 떠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울다 지쳐 잠든줄 알았는데,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붉어진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날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애닯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해준 행동들과 내가 그에게 취했던 행동들을 적어놓은 것 같아서. 아닐거라고, 다시 한번 희망의 싹을 짖밟곤 일기장을 넘겼다. 두장 정도의 공백 뒤에는 아까보다도 더 흐트러진 글씨체로 아무렇게나 흘려적은 듯한, 일기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글이 적혀있었다.
[아프다.]
뭐가 아픈거였을까. 당신이?아니면, 당신의 화기가?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누구길래 당신을 이다지도 힘들게 하는걸까. 그의 '화기'가 미웠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그를, 이렇게나 뒤흔들 수 있어서. 어느새 흩어지는 눈물은 흐트러진 그의 글씨 위에 떨어졌고, 잉크가 번져내렸다. 잇새로 새어나온 울음을, 결국엔 막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밉다. 미운데, 사랑한다. 모순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결국엔 그 장을 넘어갔다. 하얀 종이를 넘어, 이번엔 덜 흐트러진 그의 글씨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약간은 주저하는 듯한 글씨. 느릿하게 읽어내렸다.
[결국 이뤄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사랑한다고 외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중얼거린다.]
힘없는 그의,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그의 일기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자꾸만 아프다. 누굴까. 자꾸만 궁굼해지지만 더 궁굼해하면 내가 아플 것 같아서 물음을 지운다. 이번 장에도 떨어지는 눈물이 야속하다. 제발 그가 지난 일기를 읽어내리지 않길 바라며 일기장을 넘겼다. 한장, 두장, 자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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