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01
" 여주야, 오랜만이야 "
갑작스런 황민현의 등장에 나의 사고회로가 멈춘 느낌이었다. 잠깐의 적막을 깨고 황민현이 조심스럽게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 우리 근처 카페라도 가서 얘기 좀 할까? "
2011년, 대학생 시절
민현이와 나는 대학교 CC이다.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았고 다른 연인들 남부럽지 않은 그런 커플이었다.
아마 민현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던 아주 아주 아주 평범한 날, 민현이가 나에게 말했다.
" 여주야.. 나 군대가. 너 두고 내가 어떻게 가냐 진짜.. "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나라의 부름에 민현이는 훈련소로 떠야나 했고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우리는 아쉬움만 남긴 채 떨어져야 했다. 민현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슬펐는지 머리 짧은 민현이를 못 보겠다며 민현이를 붙잡고 펑펑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아쉬움이 가득한 내 얼굴과는 반비레하게 민현이는 마지막으로 해맑게 인사를 하고 훈련소로 떠났다.
서로가 장시간 떨어져 있는게 낯설었는지 편지가 오고 가는 일이 많았고, 민현이가 휴가 나오는 날만 되면 마치 소풍가기 하루 전 날의 초등학생처럼 들떠서 아무 것도 못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야속하게도 사실이었나보다. 남친이 군대가면 다들 헤어진다던 그 말이 우리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멀어졌다. 연인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민현이는 나라의 부름에 따라 열심히 훈련받고 있었을 동안 소위 사망년이라고 불리는 대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취업을 위해 스펙 관리에 열중했고, 어느 때보다 서로의 배려와 관심이 필요했을 그 시기에 서로의 존재를 안일하게 여겼다. 황민현은 황민현대로, 나는 나대로 힘들었고 지쳐있었다. 그래서 다투는 일이 빈번했고, 사과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2013년 겨울,
너가 제대를 했다.
" 그동안 우리 너무 많이 힘들었다. 그치. 너가 마음고생한 거 다 알아.. 그 만큼 앞으로 내가 잘 해줄게.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 "
민현이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정말 정말 미안했다. 나는 민현이를 보낸 그 날처럼 그저 민현이를 붙잡고 울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날과 다른 점을 찾자면 군대 짬밥 좀 먹은 거 같은 나름 긴 민현이의 머리정도?
사귄지 얼마 안됐을 때의 풋풋함과 어색함을 가지고 오랜만에 민현이와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겨울이라서 밤이 길어진 탓인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런던 올림픽 펜싱의 1초같았음 했다.
" 여주야 "
민현이는 우리집까지 데려다 줬을 때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나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겹쳐놓았다. 민현이는 나의 입을 자연스럽게 벌리게 하고 자신의 혀를 내 입 안 속으로 밀어넣었다. 몇 분 동안 우리 둘은 달콤하지만 격렬하다고 할 수 있는 키스를 나눴다. 서로의 숨소리가 민망할 정도였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할 뿐이였다.
그리고 나의 집 현관문이 열리고 평소보다 긴 밤을 함께 보냈다.
2014년 3월
" 아씨 시간표가 너랑 너무 안 맞네.. "
휴학 때문에 2학년에 머물러 있는 너와 휴학없이 다이렉트로 학교를 다닌 4학년생 나는 너무나도 달랐다. 민현이는 2년이라는 휴학기간을 메꾸기 위해 최대 학점으로 수업을 들었고 이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나는 나머지 학점을 들으면서 자소서 쓰기에 바빴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얼마 못 가 군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얼굴 볼 일이 줄었고 저녁에나 아니면 가끔 주말에 영화보고 밥 먹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
이런 우리의 만남에 먼저 지쳐한 것은 바로 민현이었다.
1학기가 끝나고 한창 더위가 시작될 무렵, 민현이는 갑작스럽게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 여주야, 나 너무 지쳐. 이제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이런 상황이 더 괴로워. 서로에게 힘든 만남인거야 우리는. "
" ..... "
사실 민현이 말이 맞았다. 이런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더 큰 고통인게 분명했으니까. 이건 분명 감정낭비일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고통보다 더 괴롭고 아팠다. 서로 지쳐하긴 했어도 이별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에게 몇 배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눈물이 내 두 눈에서 떨어졌지만 안간힘을 다 해 참았다. 하지만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그리고 억울했다.
사실 민현이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확신도 없었고 지금 민현이도 용기를 가지고 한 말인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그래. 서로가 힘이 드는데 억지로 이어갈 필요없어. 그동안 고마웠어. 나 먼저 갈게.. "
집으로 돌아오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가만히 머릿속을 비우니 그 빈 머릿속에 민현이로 채워졌다.
' 이제 방학인데.. 같이 여행도 가고 그러고 싶었는데.. 그럼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 '
' 민현이는 이 상황이 반복될거라 생각했나.. '
머릿속은 나름대로의 합리점과 타당점을 찾으려고 했고 민현이가 결정한 입장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곧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방학 내내 고통스러운 하루 하루를 보냈다. 민현이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자책도 해보고 후회도 해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민현이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그 날 창문 밖으로 들리던 빗소리처럼.
2017년 7월
" ..... "
3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이별이란 상처에 둔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빗소리를 들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하지만 3년동안 겨우 겨우 만들어낸 나의 감정이 불과 3초의 짧은 만남으로 깨져버렸다. 황민현이 나에게 말을 걸고 또 한 번 말을 거는 순간에 그 깨진 감정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미안, 지금 시간이 안 될 거 같아. 나 먼저 가볼게 "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황민현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뒤돌아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렇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한 걸 보면 3년이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았나보다. 황민현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건넨 말일 수도 있는데, 이제 황민현한텐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순간 나 혼자 너무 오바하나 싶기도 했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넬껄 하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할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건넨 두마디동안 흔들렸던 자신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비가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