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미친 건가.
초면인 사이에 날 향해 저런 말을 했을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쳐박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만히만 있냐며 의아해하는 박지훈의 물음엔 아무말도 못했다.
'너무 예쁜데요.'
계속 생각이 나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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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술을 마시지도, 동기들이랑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시간 한 번 빨리 간다. 어느새 다들 술에 취해 헤롱거리고 있고, 김재환을 둘러싸고 낄낄거리던 선배들도 자기들끼리 신나게 술만 마시고 있다. 그나마 제정신이던 박지훈은 민현선배가 네 발로라도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줘야겠다며 울상을 짓고 가버렸고. 어디보자, 지금 제정신인 사람은 아까부터 홀짝거리기만한 나.
그리고,
"저기요."
얘뿐인 것 같은데.
<이 능글남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02>
"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눈 깜빡할 사이에 내 옆자리를 차지해버린 김재환을 보니 당황스러우면서도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 아까부터 술도 안마시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어요. 그쪽한테 말 걸려고."
너무 훅 들어오는 거 아니냐. 칭찬해 달라는 듯이 눈을 몇번 깜빡이고 웃으면서 쳐다보는게, 꼭 멍멍이같다. 자기 덩치 큰 건 모르고 주인한테 안기는 대형견.
"이름씨 맞죠? 아까 들어보니까 우리 동갑이던데. 말 놓을까요?"
말 놓자는 말로 시작해서 김재환은 나한테 질문을 퍼부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자기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얘기하면 나른한 눈빛으로 잘도 들어주고, 적당히 흐흐 웃으면서 리액션도 해주고. 얼굴도 훈훈한게 딱 보니까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것 같은, 그런.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김재환 쪽도 내 쪽도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싶어서 스윽 올려다보니, 얜 또 나 보고 있었네. 질리지도 않냐.
피하면 쳐다보고, 등 돌리면 따라오고. 이젠 나도 좀 당당해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턱을 괴고 몸은 완전히 김재환 쪽으로 돌린 채 오늘만 몇 번째 마주치는 건지 이젠 조금 익숙해진 저 눈을 바라봤다.
안피하네.
얘 진짜 내 눈동자에서 뭐라도 찾고 있나. 기 빨려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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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이랑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오늘 안에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는 집이 코앞이라며 정류장까지라도 데려다 주겠다는 김재환을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데리고 나왔다. -알았어. 그럼 정류장까지만.
가게에서 나와 대충 집어든 가방을 고쳐메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는데, 이 놈의 김재환은 왜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야. 부담스럽게.
"밖에서 보니까 더 예쁘네."
"우리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럼 내일도 만나면 되지."
"...됐거든요."
허리를 한껏 숙여서 나랑 눈높이를 맞추더니 한다는 소리가. 빨개진 얼굴을 보이기 싫어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리는 날 보고는 또 입에 손을 올리고 푸스스 웃는다. 아, 티나냐. 나 떨리는 거.
역시 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는 네온 간판들로 환한데 사람은 별로 없다. 김재환이랑 나란히 걷다보니 금방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고, 이제 학교에서 보면 인사해줘요, 선배님. 자주 볼텐데."
놀려먹을거 다 놀려먹고 이제와서 무슨 선배님이야, 선배님은.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뒤로 한 채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기껏해야 몇 시간 지난 건데 쟤랑은 몇 년 동안 알던 사이인 것 처럼 친해졌다. 진짜... 뭐 하는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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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김재환 말대로 회식날 이후로도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과라 그런지 학교에서도 우린 종종 마주쳤다. 물론 걔가 날 묘하게 날 따라다니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둘다 공강일 땐 귀신같이 알고 따라와서 밥도 같이 먹고, 내가 입맛 없다고 투덜대는 날이면 달달한 빵이라도 사와서 어쩔 수 없이 웃게 만드는 김재환이었다. 참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선배, 커피 한 잔?"
"너 선배 타령 언제까지 할 거냐."
그 놈의 선배 소리 좀 그만 하라며 등을 퍽 치자 또 뭐가 좋다고 바보같이 웃는다. 그새 내 손에 적당히 따뜻한 캔커피를 쥐어주고 자기 것도 하나 들고선 옆을 지킨다. 내가 느리게 걷는 편은 아닌데도 김재환은 휘적휘적 잘 따라왔다. 한참을 수다떨고 깔깔 웃으며 산책하다보니 좀 쉬어야겠다 싶어서 주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주말에 만날까."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끌고 나왔냐."
"그거라니,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우리 첫 데이트잖아."
아직 내 애인도 아닌게. 데이트는 무슨.
자기도 말하고 쑥쓰러웠는지, 볼이 빨개져서 흐흐 웃으며 내 눈치를 본다. 와중에 잘생겼네.
"주말까지 날 만나고 싶냐. 안질려?"
그렇다. 좋으면서 그냥 튕겨보는 거다. 김재환 돌직구는 항상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 무너뜨려서 이젠 당황하지도 않고 맞받아칠 수 있다. 아직도 좀 흠칫흠칫 놀라긴 하지만.
장난처럼 던진 질리지도 않냔 말에 바로 대답이 올 줄 알았는데. 뭘 또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흠. 고개를 살짝 틀고 왼쪽 손목에 야무지게도 찬 메탈 시계를 버릇처럼 몇 번 매만지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기를,
"넌 맨날 보고싶더라."
"..."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내 볼을 톡톡 치고 싱긋 웃더니, 먼저 간다며 내 손에 들려있던 커피캔까지 버려주고 유유히 사라진다.
진짜 미치겠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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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최대한 빨리 올려보려고 했는데 현생에 치여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제가 사진을 정말 못 고르겠어서 ㅠㅠ 혹시 보시는데 불편하다면 바로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