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이 불러라~"
오늘도 시작이다. 저 놈의 '재환이의 그녀.' 라는 별명은. 나를 놀리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질리지도 않고 짓궂게 붙어 오는 선배들에게 어색하게 고개만 꾸벅이고서는 가방을 꼭 쥔 채 자리에서 벗어났다.
대학교 입학 3주차, 나는 지금 미칠 지경이다.
본격 봄 타고 썸 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上
作. 영희씨
김재환 선배와 내가 엮이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내가 한창 올 해의 봄은 생각보다 그렇게 따스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무렵. 20살이 되어 처음 맞이한 봄에는 A 대학교 입학식이 있었고, 그 때 까지만 해도 내게 봄은, 벚꽃이 휘날리는 달달한 캠퍼스의 로망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말을 했던 것 처럼 내 생각보다 봄은 따스하고 달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명문대로 손 꼽히는 A 대학교의 입학식이 끝난지 어느덧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 손은 전공책이 아닌 술잔을 들고 있었고, 내 주변은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멋지고 잘생긴 선배들은 무슨, 다들 그저 마셔라, 부어라 하는 선배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털어 놓자면 재미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술만 마시려고 그렇게 노력해서 이 대학을 들어왔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뒤숭숭한 봄의 시작점이었다.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술 자리 게임에서 떨어져 나와 탁한 눈을 하고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여주야, 랜덤게임하자, 랜덤게임!' 잔뜩 취기가 올랐는지 토마토 같이 붉은 얼굴을 하고 내 손을 잡아 끄는 친구에게 한숨을 쉬어주었다. 내가 그 랜덤게임을 하기가 싫어서 이렇게 혼자 떨어져 나온건데. 취한 자의 힘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주 정확한 말이다. 이렇게 내 손을 잡아 끄는 친구의 힘이 황소 같을 줄이야. 고개를 저었다. 딱 한 판만 할거야. 친구가 비실 웃었다.
"상철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상철이라면 분명 우리 과 선배였다. 상철 선배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기역 이응!' 이라는 말을 장렬하게 남기고 쓰러졌다. 뭐야, 왜 본인이 말 하고 본인이 쓰러져. 하지만 이미 취기가 가득 올라 재미를 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선배의 존재는 그닥 큰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바로 잽싸게 가요, 기업, 가위, 거울 등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차라리 벌주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굉장히 미쳐 보이는 벌주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거 마시고 끝내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뒤에서 내 손을 잡아서 이미 쌓여져 있는 그 손더미들 위로 올렸다.
"경영."
"…?"
"저거 벌주 미친 새끼들이 만들어서 존~나 세. 너 마시고 후회할 걸."
그렇게 말 하고서 내 눈과 제 눈을 마주친 채 생긋 웃어 보이는 사람은, 우리 학교 유명인사 실음과, 김재환 선배였다. 선배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를 말하자, 선배는 뭘 이런 걸 가지고 고마워 하냐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선배의 모습에 부학회장 오빠가 장난식으로 투덜거렸다.
"야, 그렇게 차별하면 다른 애들 서러워서 살겠냐."
김재환 선배는 그런 부학회장 오빠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차별 아니야~' 선배의 말에 오빠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차별 아니면 뭔데? 그 말에 선배가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편애지.' 시끄러웠던 술집 내 분위기가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전까지만 해도 아무 주제 없이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선배의 편애라는 단어 이후로는 나와 김재환 선배의 사이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차별과 편애. 대체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 말 이후로 조용했던 내 학교 생활이 180˚ 달라졌다. 나는 저 선배의 이름과 얼굴 밖에 몰랐는데, 선배는 얼마나 핵 인싸였으면 그 적은 인원만 들었던 '편애.' 라는 말을 현재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모두 다 아는 걸까. 심지어 며칠 전에는 교수님께서도 허허, 웃으시며 '좋을 때지.' 를 읊으셨다. 대체 뭐가 좋을 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쟤가 걔잖아."
"뭔데, 누구인데?"
"김재환 선배의 그녀."
애써 피해왔더니 다 소용이 없었다. 존나, 이 상황은… 시발스러웠다.
본격 봄 타고 썸 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오늘 아침에 먹고 나온 무말랭이 처럼 생겼어."
친구의 독설에 시발… 욕을 되새기며 책상에 엎드렸다. 강의실에서도 김재환의 그녀니, 오늘 김재환 선배가 이 수업을 듣네, 마네로 열심히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동기들이 많았다. '야, 나 휴학할까.' 내 말에 친구가 히죽 웃었다. 지랄하네. 저 년은 남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볼 생각 조차도 없는 것 같다. 애초에 그 날 게임에 나를 끼워 넣은 게 누군데. 친구가 썩어 들어가는 내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김재환 선배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한숨을 푹 쉬며 나도 몰라. 라고 답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도 몰…."
"여주야, 점심 먹었어?"
점심 먹으려면 아직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대체 언제 들어 온 건지, 배시시 웃으며 내게 제가 들고 있던 초코 우유를 건네는 김재환 선배다. 죄송한데요, 저 초코 안 먹어요. 내 말에 선배가 울상을 지었다. 진짜? 미안. 김재환 선배는 너무 착해서, 또 저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괜히 미안해지고 그런다. 아무튼, 내 친구는 그런 선배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얘 바나나 우유는 마셔요.' 그 말에 선배가 활짝 웃었다. 마치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미소였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선배는 가방에서 제 노트를 꺼내 작게 찢더니 거기에 '그럼 내일부터는 바나나 우유 마실래? 내가 초코 우유 좋아해서 너도 좋아하는 줄 알았어.' 라는 긴 메모를 남겼다. 아뇨,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저는 그 우유 안 마실건데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 초코 우유 사 드세요.' 내 말에 선배는 또 혼자 감동 받았다는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지금 내 초코 우유까지 걱정해 준거야?"
네, 존나 아닌데요. 이미 눈을 반짝거리며 내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선배에게 예, 예 고개를 끄덕여준 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었다. 어젯밤에 과제를 하느라 제대로 못 잔 잠이 이제야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슬슬 피곤해질 무렵, '여주야, 일본 라멘 먹으러 갈래?' 라고 물어오는 친구의 말에 그래, 그래. 라고 말 해주고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소름 돋게 이름으로 부르고 지랄. 평소라면 야, 야 거렸을… 까지 생각하다가 혹시나 해서 슬쩍, 선배를 바라봤다.
"방금 그래, 그래 라고 한 거 녹음했어, 나."
"…."
"어디로 갈래? 아니, 나 라멘 맛집 알아. 거기로 가자."
오늘 또 소문 하나 더 뜨겠다. 김재환의 그녀, 김재환과 함께 점심으로 라멘을 먹으러 가다.
본격 봄 타고 썸 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선배가 추천한 라멘 맛집은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이 라멘만 흡입하고 있자, 눈을 두 어번 빠르게 깜빡거리던 선배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물었다. '맛있지?' 아마 내 대답이 걱정이 되어 지금까지 한 입도 안 먹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그런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선배도 드세요.' 라고 말했고, 선배는 또 귀를 붉게 물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응….' 아마 선배가 강아지였다면, 저 뒤에서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맛있게 냠냠 라멘을 먹고 있는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궁금한 점이 생겨 선배를 불렀다. '선배.' 입 안에 라멘을 가득 담은 채 으응? 하고 나를 올려다 보는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잘생기기는 참, 잘 생겼는데.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선배 저 진짜로 편애해요?"
내 말에 선배가 콜록, 콜록.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하다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응? 선배의 물음에 빠르게 대답했다. '저번주에 선배가 저 편애한다고 그러셨잖아요. 저희는 그 때 모르는 사이였는데….' 내 말에 물을 한 컵 드링킹 하고서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실실 웃는 선배다. 응, 나 너 진짜로 편애하고 있는데. 그것도 되게 많이. 그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왜요?
"비밀인데요."
제 길다란 검지를 붉은 입술 앞에 대고서 쉿, 제스처를 취한 선배가 곧 또 헤실 헤실 웃으며 라멘을 먹기 시작했다. 뭐야, 이 똥싸다가 끊긴 찝찝하고 애매한 기분은. 선배는 자꾸 그 비밀이라는 게 재미있는지 먹는 도중에도 픽픽 웃기 바빴다.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선배가 나를 편애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냥 앞으로도 계속 피해다니는 것 밖에 답이 없나? 그런데 저 선배 나랑 교양 되게 많이 겹치는데. 까지 생각했을까, 선배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걸린 채였다.
"안 먹을거야?"
"아, 배가 별로…."
"혹시 입맛에 안 맞아?"
정정하겠다. 입가에 웃음이 걸리기는 개뿔, 또 울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에 안 맞냐는 선배다. 아니, 진짜 배가 별로 안 고픈건데. 고개를 젓자, 선배가 허둥지둥 제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저 진짜 그냥 배가 안 고픈건데요.' 내 말에 선배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안에서 노란 물체를 꺼냈다.
"그럼 바나나 우유라도 마시고 있을래?"
빙X레 바나나 우유였다.
선배는 눈만 깜빡이는 내게 손수 빨대까지 꽂아주고서는 다시 제 미소를 찾았다. '아까 네 친구가 너 바나나 우유 좋아한다고 그러길래.' 그렇다고 굳이 이걸 사들고 왔을까…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만 꾸벅거렸다. 선배가 쥐어 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가게 창 밖을 보자, 이 쪽을 보며 수근거리는 익숙한 얼굴들이…
"어이, 어이, 어이 김재환!"
"성공했네, 같이 밥도 먹고."
학식도 아니고, 밖에서 먹는다니. 그래, 시발. 저렇게 조잘 조잘 입을 터는 사람들은 바로, 선배의 친구들이었다. 강다니엘 선배와 옹성우 선배는 곧 김재환 선배와 내 옆자리에 한 사람씩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내게 실실 웃으며 물어왔다. '재환이랑 같이 밥 먹는 여자는 부모님 빼고 네가 처음이야~' 존나 어쩌라는 거야. 내가 눈만 깜빡이자 재환 선배가 어색하게 웃었다. '여주 민망하고 어색하게 왜 그래~' 그 말에 강다니엘 선배가 웃었다.
"성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보면 밥만 먹으면 다 결혼하는 줄 알겠다~"
"남녀칠세부동석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나 뭐라는 거야. 놀리는 기질이 다분한 선배들의 말에 재환 선배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뭐래, 꺼져.' 그래,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말이었다. '재환이가, 알고 보면 참~ 괜찮은 애야.' 무슨 중매 서주시는 분도 아니고. 옹성우 선배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띠운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존나 앞으로 김재환 선배를 피해다녀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가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앞으로도 자주 봤으면 좋겠다, 라멘 집에서~"
윙크를 찡긋, 해보이는 강다니엘 선배를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는 절대 이 가게를 오지 말아야지. 아니, 가게 뿐만 아니라 이 골목 근처에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 오면 시발, 앞으로 친구년한테 점심식사를 다섯 번 조공하지. 썅!
본격 봄 타고 썸 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체할 것 같다. 한참 강다니엘 선배와 옹성우 선배한테 시달리고 와서 그런지 멀쩡하던 소화 기관이 제대로 일을 안 하는 느낌이다. 쪽쪽, 아까 다 마셔버린 바나나 우유만 의미 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맛있기는 맛있네. 입맛을 다셨다. 전공 수업을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바나나 우유 통을 쓰레기통에 넣고서 가방 끈을 매만지자, 뒤에서 내 등을 아프지 않게 툭, 치는 부학회장 오빠다. 무슨 일이세요? 고개를 갸웃하면, 오빠가 내 어깨를 잡고서 제 뒤의 여자 선배들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얘가 걔야, 김재환이 편애한다는 걔."
"아, 얘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꿀꺽, 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 안녕하세요….' 시발, 존나 무섭다. 내가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나를 끈덕지게 바라보던 여자 선배들이 누가 봐도 '전혀 반갑지 않지만 반가운 척 해줄게.' 라는 미소를 짓고서 답했다. 안녕, 네가 그 재환이의 그녀니? 아뇨, 아닌 것 같아요. 아닐 예정인데요. 내가 눈만 깜빡거리자, 선배들이 한 번 더 물어봤다. 나 지금 맞냐고 물어봤는데. 주변이 조용해졌고,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응, 맞는데.' 일단 내 목소리는 아니었다.
"뭐?"
"나 지금 맞다고 대답했는데."
"…김재환?"
"왜, 꼽아?"
선배? 내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하자 선배가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전공 수업도 같이 듣네.' 네? 저는 방금 알았는데요. 아무튼, 선배는 여전히 내 어깨를 쥐고 있는 부학회장 오빠의 손을 떼어 내고서는 방실 방실 웃었다. '그런데 그 재환이의 그녀라는 별명은 좀 부끄럽다. 아직 정식으로 고백도 안 했는데.' 선배의 말에 내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내가 시발, 오늘도 오백번은 들은 것 같거든요.
"얘한테 막 입 털지마, 애들아."
단어 선택이 참 고급스러웠다. 선배는 여전히 얼떨떨한지 입만 어버버 하는 여자 선배들을 한 번, 그리고 내 뒤에서 민망한 제 손을 만지작 거리는 부학회장 오빠를 한 번, 마지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한 번 바라보고서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 여주는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기분 나쁘거든."
그 말을 듣고서, 문득 별로 따스한 기운이 없던 봄이, 어느새 따스한 기운을 품고서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
뒤로 갈 수록 대 환장 파티를 벌이네 진짜 겁나 충격적인 글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글은 단편일 예정이구............. 음................... 차기작도 생각해뒀어요 사실. 차기작은 겁내 차가운 경영과 김재환이얌.......
아무튼 여러분 오늘도 잘 주무시고 좋은 꿈 꾸세요....
이 글은 여주와 재환의 뽀뽀를 보고 싶어서 탄생한 글입니다. (아무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