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돌고래-
소녀는 숲의 주인이였다.
소녀의 숲은 소녀가 원하는 대로 작동했다.
소녀가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눈이 내렸고,포도가 먹고 싶다고 느끼면 단풍나무에도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분명 숲에도 계절은 있었지만,날씨가 제멋대로였기에 그 계절을 표현하는 무엇가는 없었다.그러므로 소녀는 계절을 몰랐다.
숲은 소녀의 것이였다.
그렇지만 소녀는 그것을 몰랐다.소녀는 모르는 것이 참 많은 소녀였다.
소녀는 자신이 초록색 노트에 끄적여둔 글을 흝어보았다.
소녀의 글씨는 소녀의 머리만큼 동글동글해서,마치 알사탕 같았다.
노트는 아주 커다란 사탕통인 셈이였다.
만약 노트가 정말 알사탕이였다면,소녀는 그 사탕들이 모두 딸기우유맛이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평생 두고두고 꺼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소녀는 동물들이 알사탕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지 알지 못했다.
소녀는 서점에 가져다 놓기만 할 뿐,그 책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동물들은 초록색 책의 신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나,다람쥐와 호랑이가 말이다.
어느 날 소녀는 무릎엔 개를 올려놓고 털을 쓰다듬으며 여느 때처럼 오른손엔 연필을,왼손엔 노트를 들고 있었다.
왠일인지 소녀는 처음으로 쓸 글이 없다고 느꼈다.그것은 꽤 두려운 것이였다.
평소의 소녀가 이야기보따리였다면,오늘은 그 보따리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죄다 훔쳐간 기분이였다.
소녀는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장 아끼는 녹색 후드티ㅡ나비의 애벌레와 비스무리한 예쁜 색이였다.ㅡ를 뒤집어썼다.
물론,초록색 노트와 연필도 챙겼다.혹시나 이야기도둑이 이야기를 돌려주러 올지도 모른다.
소녀의 개가 고개를 들고 소녀를 뒤따라갔다.
소녀가 산책을 나가겠다고 결심하자,숲은 어느새 산책하기 좋은 따스한 날씨로 변해 있었다.
소녀는 소녀의 개,그리고 초록색 노트와 함께 바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다는 숲의 중심에 위치한 통나무에서ㅡ그것은 100개의 나이테를 가지고 있었다.ㅡ쭉 왼쪽으로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숲의 왼쪽에는 바다가,오른쪽에는 산이 위치했다.
숲은 산과 바다의 경계인 셈이였다.
소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숲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이 산책이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소녀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알,아름답게 일렁이는 물결.
소녀는 눈을 감고 바다의 모습을 상상했다.너무나 근사한 모습이였다.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감은 채 계속 걸었다.
갑자기 소녀의 개가 월월,하고 짖기 시작했다.바다에 도착한 모습이였다.
소녀는 눈을 떴다.
소녀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굴렸다.데굴데굴,알사탕처럼.
내리쬐는 햇살은 피부를 채찍질하는 찬바람으로,반짝이는 모래알은 희게 쌓인 눈으로,아름답게 일렁이는 물결은 꽁꽁 얼어붙은 바다로 변해 있었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그란 눈만 깜빡였다.
눈을 매우 좋아하는 소녀의 개는 눈밭을 이리저리 뛰어놀았다.숲에선 서리가 낀 풀잎 때문에,제대로 뛰어놀기가 불편했기에 개는 바다의 모습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였다.산책하기 적합한 날씨였던 숲에서 벗어나니 한겨울의 날씨가 바다에선 그대로일수밖에.
하지만 숲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소녀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소녀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숲의 날씨가 바다의 날씨와 다른 것일까?소녀는 궁금했다.
초록색 노트를 꼭 껴안고 있던 소녀의 눈에 낯선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맨발 차림의 낯선 뒷모습은 머리가 무척 길었고,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소녀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낯선 뒷모습에게 순간의 존경심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길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소녀는,긴 머리의 무언가를 보면 늘 마음속으로 그 인내심에 박수를 쳐 주었다.
사자도 그 박수의 대상이였고,버드나무도 그 박수의 대상이였다.
낯선 이의 머리칼이 찬바람에 날리자,그녀의 맨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춥겠다,소녀는 생각했다.이 날씨에 민소매라니.
낯선 뒷모습은 무언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 해 보였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소녀의 개보다 크고,회색의 것이였다.
소녀는 뛰놀고 있는 개를 등지고 뒷모습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채 부르기도 전에,낯선 뒷모습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앳된 여자아이였다.이목구비 자체가 아기같이 동글동글했기보다는,풍기는 분위기에서 앳되었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소녀는 여자아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릴 것이라 생각했다.그리곤 이내,왠지 모르게 돌고래와 잘 어울리는 아이라고도 생각했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엔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서리가 끼어 있었다.
소녀는 놀랐다.풀잎에나 끼는 서리가,왜 머리카락에 끼어 있는 것일까.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일까.
여자아이가 내려다 보고 있던 물체를 확인한 소녀는,서리 낀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우연의 일치인지,그것은 돌고래였다.
하지만 꽁꽁 얼어서 생기가 없어진 빳빳한 모습이였다.죽었나?소녀는 궁금했다.겉모습만 보면 확실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소녀의 상상 속의 동그랗게 말린 모양의 예쁜 돌고래와 여자아이의 맨발 언저리에 빳빳하게 굳은 돌고래는,너무나 다른 모습이였다.
언제 왔는지,소녀의 개는 코로 딱딱한 돌고래를 툭툭 건드렸다.
가까이서 보니 돌고래는 회색이 아니라,하얀 얼음이 낀 푸른색이였다.
소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여자아이가 서리가 낀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입을 열었다.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너,돌고래의 진실을 아니?」
「...모르겠어.뭔데?말 해줘.」
「싫어.어린이는 알면 안 돼.」
소녀는 눈을 찌푸렸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이 여자아이는,너무나 당연하게 반말을 쓰는 데다가 자신에게 어린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건 말도 안 되었다.
소녀는 스스로를 아주 비열하고 영악하고 사악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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