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못 마신다고 칭얼대거나 내빼는 애들 있으면 알지. 시작해. 시작한다. 빠빠빠-빠빠 빠빠빠빠빠- 술래가 일어남으로써 서로들 눈치를 보듯 천천히 그렇지만 보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턱을 손에 괴어 누가 봐도 술독에 빠져 영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 명과 팔짱을 낀 채 그것을 고요히 지켜보는 또 다른 한 명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임상 진행이 안 되는 상황에 동아리 회장이 팔짱을 끼고 있던 학생을 불렀다.
아주 발칙한 우리 사이
W. 토미
01
" 형. 주사가 바뀔 수도 있는 거에요?"
성운의 진지한 물음에 아침 훈련을 마무리 중이던 지성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자식이 아침부터 무슨 개소리를 입에 고이 담았나 싶은 표정이었다.
" 그럼 넌 주사가 똑같냐. 아픈 사람마다 병명이 다른데."
" 그 주사 말고 술 취했을 때 그 주사."
" 아- 그럼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애들 보니까 주사 맨날 다르던데."
" 그래요?"
" 그 중에서도 네가 원탑이잖아. 조증갑 새끼야."
여태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지성을 가만히 쳐다보던 성운이 궁금증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기억을 하지. 원래 못 했는데. 그러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지성 탓에 성운이 순간 중심을 잃었다. 너 무슨 사고 쳤냐. 쿵하며 엉덩방아를 잔디 필드에 찧은 성운이 지성을 째려봤다.
" 내가 어린애에요. 사고 치게."
" 너 사고 쳤던데. 아마 혼날 걸."
자기 말만 딱 잘라 말하고는 자리를 옮기는 지성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성운의 앞으로 축구공을 한 손에 들고 있던 담당 코치가 다가섰다.
" 아주 체육학부를 물 먹여라. 새끼야."
" 죄송합니다."
" 하필이면 건드려도 법학과를 건드리냐. 반성은 됐고 넌 군기부터 바짝 들어야 해. 오늘 마무리는 네가 다 해. 알겠지."
연신 고개를 아래로 까딱거리며 죄송합니다를 외치던 성운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바뀐 코치가 저 코치냐. 이에 성운이 속상함에 한숨을 내쉬며 아래로 숙인 얼굴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후드티를 주섬주섬 고쳐매는 여주를 성운이 어이없게 바라봤다.
" 교양 수업 들으러 가자."
" 싫어. 안 갈래."
" 왜 안 가. 동아리 회장 있을까봐 그러냐."
" 아닌데."
" 그러면 쫄려서 그러냐."
" 기억도 안 나는 게 자꾸 까불래. 네가 나 막지만 않았어도-"
" 또 싸움닭을 내가 말렸고만."
너 새끼는 친구 하나는 잘 둔 줄 아세요. 아, 김재환도 뭐 일조했으니 두 명이네.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들만 연달아 내뱉던 여주에게 끌려가면서도 성운은 계속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 아 진짜. 난 이거 듣기 싫은데.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고."
" 감동도 없고. 그렇지? 그럼 왜 신청했냐. 즐거워 보이는 다른 교양이나 신청하지."
" 그나마 필수적인 교양들 중에선 이게 제일 재미있어 보였으니까."
"............"
" 아는 사람도 있기도 했고."
성운이 훅하니 찔러들어오는 여주의 질문들에 애써 둘러댔다. 괜히 칭얼댔나. 성운이 밖으로 들리지 않을 말들을 속으로 연신 투덜댔다.
" 그래서 째겠다야 뭐야. 이거 필수잖아."
" 누가 짼대."
" 그러니까 곱게 따라와라."
" 그러는 넌 이거 왜 듣는데. 네가 나 이거 추천해줬잖아."
성운이 어디갈까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강의실을 찾아다니는 뒷꽁무늬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면서 캐물었다. 민현 선배 있으니까. 그러자 여주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폰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예상했던 답안지였지만 언제나 시험은 성운에게 힘든 존재였다. 성운이 뜻하지 않은 속상함과 배신감이 감돌던 입 안을 달싹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닌데."
아주 그냥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저기 회색 후드티를 입으며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그 아이를. 그리고 이제서야 여주가 성운을 돌아봤다. 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성운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아프지 않게 내빼며 기나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멈춰섰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의 완고한 목소리가 텅 빈 강의실로 가득 찬 복도를 가득 채워나갔다.
" 내가 본 거라곤 네 속옷 정도라고."
순간 여주의 눈이 동그래짐과 동시에 입이 떡하니 벌려졌다. 꽤나 놀란 모양새가 통쾌했다. 성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욕실 문 앞에 던져져있던 옷가지들을 본 건 사실이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과장을 한 것 뿐이었다. 당당해진 성운에겐 한 치의 잘못함이라곤 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너 ㅁ..뭐라...ㄱ..그랬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 여주를 여전히 장난끼 가득한 낯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던 성운이 태연스레 살짝 미소지었다. 옛날엔 이 웃음이 참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저 두툼한 아랫입술을 확 뜯어버렸어야 했다고 여주는 자연스레 생각했다.
" 아무 일도 없었다며.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 넌 어떤 쪽이냐."
" 천당 가고 싶지."
" 그냥 물어본 거야. 네 의견이 매우 궁금해서."
이 자식이 진짜 사람을 가지고 노는구나.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보이는 성운에게 한 발 두 발 여주가 가까이 다가섰다. 답지 않게 표정을 굳히며 가깝게 다가오는 그녀를 성운이 심드렁하게 두 눈으로 내려다봤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건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에 해당되기도 하는 사항이였다. 장난으로 보여? 이게. 여주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혀. 그 모습에 성운또한 진지하게 응했다.
" 밤에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는 기분을 알기나 해. 알면 이딴 장난 못 쳐."
" 네가 날 자꾸 피하니까. 그 날 이후로 나 찾아온 적 있기나 하냐."
" 그건...."
" 내가 먼저 연락하고 문자하고- 근데 그것마저 씹잖아, 너."
" 미안."
" 됐어. 뭐할려고 고생을 사서 해.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 친구 사이에 가끔 안 만날 수도 있는 거지."
" 우리가 죽을 죄 졌냐. 만나지도 못 하게."
" 졌어. 네 침대에서 같이 눈 뜬 건."
너 맨날 그랬는데, 술 취하면. 성운이 속으로만 간결하게 말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하지만 실수한 건 옳은 소리였다. 놀라지 않게 이 아이가 일어나기 몇 분 전에는 항상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는데 그 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쿨쿨거리며 목베개를 해주며 자고 있었으니. 비밀을 들켜버린 건 오롯이 자신의 오인이고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렇게 그에겐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늦겠다. 나 펜도 좀 빌려주고."
머쓱해진 분위기에 머리만 긁적이던 성운이 교양 책을 여주의 눈 앞에 흔들어보이다 급히 걸음을 옆으로 옯겨 먼저 지나쳐갔다. 너 강의실은 어딘지 알고 가냐. 괜히 툴툴거리며 뒤늦게 멋쩍어진 여주가 성운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먼저 앞서가던 성운이 다시 운동화를 천천히 끌며 걸음을 멈추었다.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너 혼자는 안 둬."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그러니까."
" ..........."
" 책임진다고, 나는."
결연하게 말을 끝내던 그가 다시금 운동화를 바닥에 끌며 부산하게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강의실에 들어갔다는 걸 알면서도 한 동안 여주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이후로 마음이 이상한 게 서서히 미쳐가고 있나보다. 벙찐 모양새로 같은 자리에 주구장창 가만히 서 있던 여주가 후드 티 위로 올려맨 가방을 다시 고쳐맸다. 미쳤다. 이 모든 상황들이. 그녀가 이내 고쳐맨 가방끈을 손아귀에 꽉 쥐고서 강의실을 들어섰다. 그리고 마주했다.
어쩌냐. 저기 민현 선배 있는데.
개구진 얼굴을 밖으로 띄운 채 얄밉게 입모양을 속삭이던 그 자식을 말이다. 여기 자리 있어요. 죄송합니다. 자기 옆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을 재빨리 돌려보내는 성운이 여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뺏긴다, 너. 여전히 입모양으로 말을 전해오는 성운을 여주가 조용히 지켜보다 이내 그에게로 발을 떼었다. 여주가 그의 옆자리에 가방을 툭하니 올려두었다. 시끄러. 그리고는 머리가 복잡한지 피식하며 웃는 성운에게 펜을 넘겨주며 그녀가 그에게로 등을 돌려 엎드렸다.
피곤한지 천천히 눈을 뜨며 날 내려다보던 네 시선의 그 날은 도무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또 다시 모른 척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른 척 했다. 그래야 우리의 관계가 절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
저의 독자님들♥ 잘 지내셨나여!!!! 이제 프롤로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네요.....ㅎㅎ
정말 댓글들 보면서 슈퍼파워처럼 많은 힘을 얻으며 가고 있어요ㅠㅠㅠㅠㅠㅠㅠ 너무 감사드리구 요즘 날씨가 아주 살짝 환절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건강 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당!!
그럼 다음 화에서 뵐게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