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총]
범죄 A
*
안녕. 조용히, 조용히. 쉿. 조용히 좀 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데 말할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고. 너라면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음. 굳이 말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너도 봤지? 봤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너도 들었지? 뉴스에 나오더라. 30초? 아니다. 20초도 안 나온 것 같던데. 아, 물론 뉴스 말고 신문이나 인터넷에도 떴어. 그래, 아는구나. 박찬열이 죽었어. 망치로 머리를 열 번도 넘게 맞았다더라. 꼴이 말이 아니었을 거야. 박찬열 그 새끼. 머리 스타일 하나에 목메는 새끼였는데.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염색하고, 파마하고 그랬었잖아. 결국, 마지막엔 빨간색으로 염색했네. 빨간색 싫어했는데. 뭘 그런 표정을 하고 그래. 농담인 거 다 알면서. 박찬열 집 앞에 지나가다가 본 건데 경찰 한 명이 구석 전봇대에서 막 토하고 난리도 아니더라. 뭘 그렇게 처먹었는지 아주, 토하느라 하루를 다 보낼 기세였어. 경찰이 토할 정도로 끔찍했나 봐. 살은 으깨지고, 두개골은 부서지고. 얼굴은 피로 떡칠이 되어 있어서 알아볼 수도 없었겠지? 얼굴의 반이 날아갔을지도 몰라. 열 번도 넘게 맞았으면, 확실한 건 아마 뇌도 산산조각이 났을 거야. 불쌍해서 어떡하나. 잘 난 얼굴이 아주 아작이 났겠네. 왜 그래? 너도 토할 것 같아? 토하려면 화장실 가서 해. 더러우니까.
얼마나 망치를 세게 내리쳤는지 벽도 온통 피로 범벅이 됐어. 오해하지 마. 사진 찍힌 거 본 거니까. 피가 튄 모양으로 봐서는 처음에는 서 있다가 나중에는 앉아서 내려 찍은 거라던데. 잔인하기도 하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사람을 죽이고 말이야. 범인은 아직 안 잡혔냐고? 응. 안 잡혔어. 증거가 하나도 없대. 어떻게 증거가 하나도 없을 수 있냐고? 그러게 말이야. 신기하지? 이런 걸 보고 완전 범죄라고 하던데. 범인도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나 봐. 온 집 안의 수도꼭지를 다 틀어 놓고 갔대. 얼마 안 돼서 물이 집 안을 다 채웠겠지. 그래서 지문이나 머리카락 같은, 증거가 될 만한 건 다 쓸려 내려갔어. 안타깝다. 이대로 가면 미해결 사건으로 끝나겠지? 그 무서운 살인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난 소름이 끼쳐서 잠도 못 자겠더라.
세훈이? 그래.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세훈이가 얼마나 상처가 크겠어.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내가 매일 가서 돌봐주고 있어. 내가 맨날 찾아가서 죽도 끓여주고 그러는데. 정말 죽지 못해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새삼 느꼈어. 너도 알지? 세훈이랑 박찬열 좋아 죽는 사이였잖아. 세훈이가 박찬열 따라가려고 안 좋은 생각 할까 봐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물론 나도 찬열이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파. 세훈이 행동 다 이해할 수 있어. 박찬열이랑 나. 우리 진짜 친했었잖아. 처음에 세훈이랑 박찬열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도 잘 알 거야. 세훈이는 내가 정말로 아끼는 사람이고, 박찬열은 내 친한 친구였으니까. 그래도 둘을 인정해주기로 했어. 난 동성애는 괜찮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얼마 없어. 그중에서도 내 물건 가져가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그건 너도 알고. 둘 다 나한테 엄청 고마워했었는데. 박찬열이 내 손잡고 고맙다, 고맙다 비는데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어. 당장에라도 뿌리치고 싶었다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모습도 볼 수 없다니.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타이밍인가? 이젠 나올 눈물도 없어. 세훈이는 요즘 괜찮냐고? 아까도 말했잖아. 죽지 못해 산다고. 그런데 어제는 그나마 나아졌더라. 내가 말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죽도 다 토하고 그랬었는데 이젠 나 오면 고맙다고 말해주기도 하고 죽도 잘 받아먹고. 시간이 약이라는 게 정말 맞나 봐. 이런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자고? 왜? 싫어? 너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았나. 우울하고 그런 거. 맨날 가정 파탄 나는 드라마만 봤잖아. 그건 모든 드라마가 그렇다고? 아, 그래. 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요즘 책을 읽고 있어. 왜 웃고 그래. 웃지 마. 하여튼 책에 되게 흥미로운 얘기가 있더라고.
사람이 나쁜 일을 할 때면 꼭 공범을 만든대. 맞는 말 갖지 않아? 우리 학생 때만 생각해봐도 그래. 야자를 튀려고 해도 꼭 혼자서는 안 튀었잖아. 누구든 끌고 가야 마음이 놓이지. 숙제를 안 했을 때도. 나 말고도 여러 명이 안 했으면 마음이 놓이잖아. 그거랑은 얘기가 다른 것 같다고? 왜? 나는 똑같은 것 같은데. 그래, 미안해. 내가 원래 공부를 좀 못했잖아. 무슨 책이길래 그런 얘기가 있냐고? 나도 어쩌다가 본 책이야. 그냥 철학적인 내용만 주구장창 쓰여있어. 읽으면서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 그 정도로 재밌어. 다른 얘기도 말해줄까? 앞에 거랑 좀 이어지는데. 나쁜 일의 기준이 뭘까? 야자를 튀는 게 나빠? 숙제를 안 하는 게 나빠? 누구는 나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 거야. 나쁘다, 좋다, 착하다. 모두 다 주관적인 평가들이야.
좀 크게 나가볼까? 도둑질? 범죄지. 몇몇 사람들은 듣자마자 나쁜 짓이라며 질색을 할 거야. 더 깊게 들어가서, 엄마 아빠를 잃고 동생들이랑 어렵게 가정을 꾸려나가던 14세 소녀 가장이 너무 배가 고파서 길거리에 진열 돼 있던 빵을 슬쩍했어. 도둑질이지. 범죄지. 그런데 나쁜 일이야? 소녀의 동생들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침만 질질 흘리면서 누워있어.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거야. 보다 못한 소녀가 빵을 훔친 거고. 동생들을 위해 한 일인데,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그 의도가 나빠? 분명 아직도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이런 사람들은 소녀가 죄송하다고, 하지만 동생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며 눈물을 짜내면 거의 반은 넘어와. 그래, 어쩔 수가 없었구나. 하면서 빵을 주고, 그 소녀를 위해 모금을 하고. 그런다고. 범죄는 맞지만 나쁜 일은 아니야. 범죄는 맞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이렇게.
그럼, 살인은? 범죄야. 아주 큰 범죄지. 사형감이야. 그런데 살인이 그렇게 나빠? 인간도 동물이야. 어렸을 때부터 배워와서 잘 알잖아.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다른 돼지나 소 같은 동물들을 충분히 잘 이용하고 있잖아? 정말 죽어야 마땅한 쓰레기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다 뭐로 들려? 개같이 들리지. 그렇지. 네 표정이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까지 이런 말을 지껄인 건……. 살인자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본 거야. 어때? 나 좀 멋있어?
박찬열을 죽인 살인자는 아마 지금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으려나?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해. 음, 물까지 다 틀고 도망갈 정도로 치밀한 범죄자라고? 넌 후자라고 생각하는구나? 내기해볼래? 그래, 좋아. 오예. 돈 벌었네. 왜 자꾸 시계를 봐, 바빠? 약속 있다고? 2시에? 얼마 안 남았네. 아쉬워라.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보자. 살의는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은 사람이랑 살의는 없었지만 결국 죽인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나빠? 둘 다 나쁘다고. 글쎄. 어쨌든 결국 죽인 사람이 더 처벌을 받겠지. 나는? 누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냐고? 아까부터 누누이 말했잖아. 나쁘다, 좋다, 싫다. 이딴 건 다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나는 둘 다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소녀의 도둑질도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둘의 살인도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이제 가야겠다고? 진짜 아쉽네. 아까부터 아쉽다, 아쉽다 이러는 거 정말 빈말 아니야. 이런 얘기가 오랜만이라. 진짜 재밌었는데. 너도 좋았지? 뭐, 슬슬 생각도 좀 정리되고. 그렇지? 난 너 믿어. 네가 어디에서도 말 안 할거라는 거 알아. 무슨 근거로 그러냐고? 그냥.
음, 목소리가 좀 구리네. 기분 나빠? 아니지? 그래. 알아. 말 안 한다는 거 알아. 여기를 나가는 순간 내 말은 다 잊어. 그게 낫겠다. 이런 얘기 기억해봤자 기분만 찝찝하고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그런데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종인이? 김종인? 음. 좋네. 나도 마침 김종인한테 할 말 있었거든. 같이 가자고 안 해. 그렇게 중요한 말도 아니고. 네가 전해주면 되니까. 종인이한테 전해줘. 내가 진짜로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해주고. 나는 애가 겁이 많아서 그렇게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할 줄은 또 몰랐네. 깔끔할 뿐만 아니라 독한 면도 있어. 내가 이미 한 번 했는데 굳이 그렇게 여러 번을 더……. 진짜 다시 봤어. 어, 미안. 사족이 좀 길었지. 이렇게 전해줘.
물 켜고 간 건 참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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