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오겠죠
세훈 X 민석 X 찬열
1. 나는 썩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못되었다.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많은 것만은 분명한데도 나는 언제나 그 안에 고립되어 있었다. 꽤 큰 키, 그리고 외국인 같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던 또렷한 이목구비, 다소 넓은 어깨. 외모만으로 내 주위에 모여드는 이는 꽤 많았다. 개중 대부분이 여자임은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다가옴을 쉽사리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아마도 어릴 적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 내 눈은 조금 특별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른 이가 보는 세상과 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즈음해서였다. 해가 쨍쨍하게 떠 있던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별 생각 없이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는 쫑쫑대며 길을 건너는 도중에, 저 윗동네에 사는 구멍가게 아저씨를 마주쳤다. ―그는 내가 구멍가게 앞 오락기를 만지작 거릴 때면 내 나이 또래의 딸이 있다며 웃으며 몇백 원을 더 넣어주고는 하던 좋은 남자였다― 나와 엄마가 고개를 꾸벅하며 그를 스쳐 지나갔고, 길을 건넌 후 나는 조용히 엄마에게 물었더랬다. ‘엄마, 저 아저씨 딸이 수영장 갔다 왔나 봐.’ 하고.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엄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그리고는 빨간 불로 뒤바뀐 횡단보도 앞에서 내 어깨를 탈탈 흔들며 무슨 소리냐며 나를 닦달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는 어버버대며 엄마에게 대답했었다.
‘아저씨 딸이 목마 타고 있는데 죄다 젖었잖아.’
그것은 굳이 내가 거짓말로까지 말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새파랗게 굳어있던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도 그 아저씨의 목에 매달려있던 아이의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음을. 유달리 하얗던 나보다도 더욱 새하얗던 아이의 작은 손가락을.
엄마는 그날부터 나를 데리고 누런 불상이 놓인 집들을 찾아가느라 바빠졌다. 뻘건 천과 노란 천들이 휘날리는 집의 입구를 지나칠 때면 오한이 끼쳤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다. 그리고 그런 나날들을 몇 달간 반복했을 때, 엄마는 나를 붙잡고 말했다. 무어가 보이던 너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치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엄마를 보며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해놓고서는 고개만 연신 끄덕거렸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나는 구멍가게 아저씨의 딸이 횟집 차와 부딪혀 즉사했음을 전해 들었다. 물론 그 불쌍한 사고가 있었던 것이 내가 아저씨를 교차로에서 만나기 이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눈이 특별함을 알았다.
3. 사실 그리 불편한 일은 없었다. 티브이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귀신들처럼 내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그저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제가 죽어버린 자리나 사랑했던 이의 뒤에. 놀이기구를 타는 아버지와 아들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짓던 어머니도 있었고, 선 자리인 듯 보이는 곳에서 여자의 뒤에 가만히 서서는 안심했다는 듯 너그러이 웃던 남자도 있었다. 친구인 백현의 집 앞에는 어릴 적 사고로 잃었다는 조그마한 여동생이 언제나 반갑게 나와 백현을 맞이하곤 했다. 처음 보았을 때에 백현의 뒤로 쏙 하니 숨던 아이는 몇 번 집 앞에 사탕을 갖다놓기를 반복하자 어느새 제 오빠보다 나를 더 반겼다.
물론 그런 훈훈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꼬리를 살랑대던 과 동기 여자애의 발치에는 고기조각 같은 태아들이 언제나 붙어 따라다녔다. 처음 만났을 때에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질겁을 했는지 몰랐다. 자신이 카사노바라며 자랑삼아 말하던 선배의 뒤에는 그 지나친 여자 중 하나가 언제나 쫓아다녔다. 그 눈길은 얼음장같이 차가워 나마저도 등덜미가 오싹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나의 눈 덕에 그리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선을 그어 그 안에 고립되었다고 말해도 아마 옳을 것이었다. 그런 내가 어딘지 불안해 보였는지 백현은 언제나 내게 사람을 소개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는 했다. 누가 오지랖 넓은 놈이 아니랄까 봐 그 소개는 남자건 여자건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4. 나는 그렇게 백현의 소개로 찾아간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아는 형이 바리스타로 일하는데 그렇게 사람이 좋을 수 없다며 떠들던 백현은 나를 기어코 그 카페로 끌고 갔다. 저녁 8시. 곧 일이 끝나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던 그 사람의 가슴팍에는 ‘김 민석’이라는 세 글자가 떡하니 쓰여있었다.
“니가 백현이가 말하던 세훈이야? 듣던 대로 잘생겼네. 커피 뭐 마실래?”
“형, 백현이는 카페모카!”
“이게 어디서 되먹잖은 애교야?”
어깨를 요리조리 흔들며 가당찮은 애교를 떨던 백현의 머리를 콩 쥐어박은 그는 새하얗게 웃으며 커피머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왜,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머릿속을 뎅뎅 울리는 종소리. 나는 그날 그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분명 형이라고 백현이는 말했지만, 도무지 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애 같은 외모―딱 중학생 정도 즈음으로 보이는 말 그대로의 애 같은 외모―로 그는 그렇게 나 오세훈의 마음속을 그대로 직격 강타해버렸다. 그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내려놓으며 옆자리에 앉았을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바깥으로 당장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딱히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거부감도 가진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가 그렇게 날아들었다. 태어나서 널 만난 게 이렇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변백현. 나는 진심으로 백현에게 감사했다.
5. 민석이형이 이거 전해주래. 공강 시간 빈 강의실에 엎어져 있는 내 등 위로 백현이 가방을 턱 하니 집어던졌다. 욱신. 가슴 한 켠에 물결이 일었다. 물 한 방울 튈세라 아끼고 아껴오던 가방을 나는 어제 그의 가게에 놓고 일어섰다. 물론 지금까지 가방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나는 등 위에 얹어진 가방을 툭 하고 쳐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깟 가방, 이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백현은 떨어진 가방을 들어 먼지를 떨궈내고는 머리맡에 올렸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백현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현은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꺼냈다.
“내가 숨기려고 한 거는 아닌데, 아~ 진짜. 변명도 아니고 이게 뭐야. 어제 형이 전화 와서 갑자기 소리 지르길래 나 진짜 깜짝 놀랐거든? 근데 야, 세훈아. 솔직히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 게 자기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니가 놀란 건 이해하는데, 난 게이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텅 빈 강의실에 백현의 동성애 옹호론이 넘실넘실 떠다녔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백현의 입은 ‘그래, 나쁜 거 아니지. 내가 형 좋아하는 것도 나쁜 거 아니고.’ 라는 말에 꾹 다물렸다. 백현의 손가락이 나를 한번 가리키고는 창밖 너머 형의 가게 즈음을 가리켰다. 니가, 형을? 네모진 입이 정사각형이 될 만큼 떡하니 벌어졌다. 언제부터야, 어떻게 하다가? 무슨 즐거운 이야깃거리라도 찾은 듯 내 어깨를 흔드는 백현을 뒤로하고 이미 내 머릿속은 어제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6. 백현의 첫 소개 이후 나는 문턱이 닳도록 그가 일하는 카페를 드나들었다. 공강 시간이면 나는 언제나 그 카페에 있었다.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울리지도 않게 책을 보는 척을 하거나 일하는 민석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내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당황해 하던 그의 인사가 ‘이제 왔어?’로 바뀔 즈음. 따로 주문을 하지 않아도 그가 자연스레 내 머그컵에 커피를 내줄 때 즈음. 어색해하던 민석이 무작정 다가오는 내게 마음을 조금 열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가당찮은 용기를 냈다.
“형, 내가 형이 만들어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그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앞치마를 툭툭 털며 대답했다.
“근데 나 그 커피보다 형이 더 좋은 거 같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으며 내 머그컵 가득 담긴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티스푼이 파르르 떨리며 머그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리고 그 울림은 내 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내리깔고 있던 눈을 슬쩍 올려 떴을 때 나는 그 큰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하니 고여서는 망부석처럼 굳어있는 민석을 보았다. 눈에 띄게 떨리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백현이가, 말했어?”
그리고는 대뜸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는가 싶더니 곧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작게 들리는 수화기 속 목소리는 백현이 분명했다. 민석이 카페의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니가 말한 거냐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수화기 저편 백현의 당황한 모습이 그려져 나는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그는 남자를 좋아하는 그런 류였던 듯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는 동생의 친구가 대뜸 찾아와 좋아한다 고백을 하니 어딘가에서 들은 게 있으려니 해, 저 혼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사실, 동성결혼을 하니 어쩌니 이리저리 난리라지만 어딜 가나 그리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기에. 커밍아웃, 아웃팅. 내가 민석을 좋아한 다음부터 찾아보던 인터넷 게이 커뮤니티에는 꼭 그런 류의 고민이 열에 하나는 있었다. 나는 그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자그마한 떨림이 느껴져 나는 어쩐지 그가 더 사랑스러워졌다.
“백현이가 말한 거 아니고, 나도 형이 그쪽이란건 지금 알았어요. 그냥 나는 내 마음이 어떤 거다,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거니까 그만 떨어요. 형 지금 무지 떨고 있는 거 알고 있죠?”
한참을 자리에서 부들대던 민석 덕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몇 없는 손님들이 계산을 마치고 나간 다음에야 그의 꾹 다물렸던 입이 열렸다. 내가, 좀 놀랐었나 봐. 그는 모기만 한 소리로 입술을 꾹 깨물고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7. 기타를 참 잘 치던 애였어. 아마 여기 카페에 오는 애들 중에서 가장 밝았던 애였을거고. 키도 참 컸다? 응, 세훈이 너보다 좀 더 컸을 거야, 아마. 이름도 예뻤어. 박찬열. 찬열이라고. 아까 내가 과민반응 했던 거 미안해. 근데 그 일 이후로는 나도 모르게 자꾸 그렇게 되네. ―여기서 그는 한숨을 한번 쉬었다― 찬열이가 꼭 여기서 아까 너처럼 말했었어. 내가 좋다고. 자기는 김민석이라는 사람이 좋대. 나 사실 되게 좋았다? 나도 그랬거든. 찬열이랑 같은 마음이었거든. 너처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찬열이가 좋았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게, 그리고 그게 같은 남자라는 게 흔하게 이뤄지는 일 아니잖아. 진짜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지, 나는. 그래서 앞뒤 안 보고 그냥 덥썩 좋다, 우리 한번 만나보자 했지. 웃더라. 웃으면서 날 안아주는데 태어나서 아마 내가 제일 설렜던 순간이었을걸.
그리고 뭐 흔하지. 연애했어. 진~짜 달달하게. ―그는 무너질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근데 내가 참 바보였던 게 뭐냐면. 저기 밖에 너네 학교 보이지? 여기 앉아있다 보면 너 가끔 친구도 만나고 그러지? 응, 맞아. 세훈이 니가 생각하는 대로 학교에 소문이 났어. 사실 나야 어느 정도였는지 잘 몰랐지. 그래서 그냥 백현이가 찬열이 좀 힘든가 봐요. 그렇게 말해도 나는 찬열이가 웃으니까 정말로 별거 아닌 줄 알았어. 내가 너무 멍청했나 봐.
여기 앞에 찻길 참 좁지. 양쪽에 차라도 주차해 있으면 진짜 시야 엄청 좁아지잖아. 그날도 그랬어. 노란선 위로 차 두 대가 이렇게, 이렇게 서 있었는데 딱 저 맞은편만 보이더라구. 여기 찬열이가 앉았고, 그 옆에 내가 앉아있었어.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나 하면서, 나는 기타 쳐달라고 찬열이 조르면서. 근데 길 맞은편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보이더라. 응, 예전에 찬열이랑 사귀기 전에 같이 몇 번 왔던 친구들이더라고. 내가 찬열이 얼굴을 이렇게 흘낏 보고, 그리고 그 애들을 보는데……. 한 명이 우리한테 손가락질을했어. 그러니까 옆에 있던 세 명이 우르르 이쪽을 보더라. 꽁알꽁알 뭐라고 말을 했는데, 그러다가 그 친구가 헛구역질 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어. 우리 보라는 듯이. 찬열이 성격이 또 은근 한성격하는 애였거든. 벌떡 일어나더니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야, 이 새끼들아! 하면서. 나는 참 멍청해서 나가는 찬열이를 잡을 생각도 못 했어. 그냥 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찬열이가 친구들에게서 나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찬열이가 성큼성큼 길을 건너는데……. 아, 미안. 나 잠깐 이것 좀 마실게. ―그는 식어버린 내 커피잔을 붙들고 두어 모금을 삼켰다.― 옆에서 갑자기 나온 흰색 카니발 한 대가, 찬열이를 이렇게, 퍽 하고 치여버렸어.
사람이 차에 치이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혹시? 물에 젖은 걸레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딱 그 소리가 나더라. 나는 사고 현장은 피범벅일 줄 알았어. 근데 피도 하나도 안 나더라. 찬열이가 부딪히면서 저 앞 가로수까지 날아갔어. 영화 같지? 나도 그때는 내가 무슨 영화를 보는 건가 싶었어. 찬열이가 붕 뜨더니 저까지 날아가고 인형처럼 떨어졌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찬열이 손이 꿈틀대는 걸 보고 기다시피 해서 나갔어. 진짜 하나도 안 다친 것 같았는데, 맞은편에 있던 애들은 벌써 저 멀리로 도망가고 없는데, 갑자기 찬열이 입에서 피가 이렇게, 이렇게 줄줄 쏟아지더라.
그리고 그게 끝이야. 그 예쁜 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떠주지, 영화처럼 마지막 말이라도 남겨주지. 그런 거 진짜로는 아무것도 없더라. 내가 들은 마지막 찬열이의 말이 ‘이 새끼들아‘ 이거였어. 너무하잖아.
그 날 이후로 내가 좀 아웃팅이라던가, 그런 거에 대해 좀 민감해. 그리고 내가 이렇게 찬열이 이야기 다 꺼낸 거, 왜인지 세훈이 너도 이제 대충 눈치챘을 거야. 형은 그래. 형은 찬열이 다 못 보냈어. 앞으로도 못 보낼 거야, 나는……. 그 애 그렇게 만든 게 나인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세훈아, 그거 알아? 나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면 찬열이가 차에 치이던 그 날의 꿈을 꿔.
8. 나는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앞에서 조용히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의자 뒤에 놓여있던 가방의 존재 조차 잊은 채 그저 멍하니 집으로 향했다. 그것이 백현의 던져준 가방이 지켜본 전날의 사연이었다.
9. 백현은 연신 엎어진 나를 보챘다. 언제부터야? 뭐 때문에 좋은 거야? 사랑? 오~ 오세훈! 하도 종알종알 대는 통에 복잡한 머리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내가 이걸 친구라고 둔 것인지. 한참을 종알대는 백현의 입을 틀어막으며 닥치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백현의 입이 다물렸다. 텅 빈 강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손을 떼어내고 다시금 책상에 얼굴을 파묻자 백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석이 형이 진짜 많이 힘들어했었어.”
백현의 입에서 나온 민석이라는 단어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백현의 말이 이어졌다.
“진짜 형이 저렇게 울다가 말라비틀어져서 죽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울고, 수면제 없이는 잠도 못 자더라. 형 죽어도 병원 안 간다는 거 내가 진짜 멱살 잡고 병원 끌고 갔었어. 그냥 사람이 아니었던 거 같아. 걸어 다니는 시체? 좀비? 그런거같았어, 진짜. 하루는 술 먹고 딱 그러더라. 내가 이렇게 숨 쉬는 게 죄스럽다고. 찬열이 그렇고 보내고 밥을 먹는 자기가 너무 한심스럽고 역겨워서 버틸 수가 없대. 형이 지금처럼 사람모양 하는 거 진짜 얼마 안 된 일이야. 찬열이가 형 이러는 거 좋아할 거 같으냐고, 형 지금 찬열이 두 번 죽이는 거라고 내가 죽어라 옆에서 떠들었더니 그제서야 저렇게 지내게 된 거야. 나는 니가 민석이 형 잘 잡아줬으면 좋겠다.”
엎어져 있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백현이 말했다. 정 많은 백현이 나를 민석이 형에게 소개시켜 준 것도 아마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빨리 찬열이라는 사람을 잊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나는 형이 찬열이를 빨리 잊었으면 좋겠어. 백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동기 여자애 하나가 쓱 몸을 들이밀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멋쩍은 웃음을 지은 여자가 앞쪽 자리에 턱 하니 퍼질러 앉았다. 여자의 손에 들린 커피잔에서 김민석의 냄새가 났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에서 백현이 뭐라 뭐라 말을 했지만,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0. 오케이, 옷 깔끔하고. 머리 단정하고. 인물 좋고. 딱 좋아. 나는 민석의 가게 옆 피자집의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민석의 가게 안을 염탐했다. 카운터에 앉아 멍하니 구석을 바라보는 민석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찡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막 가게 문을 열려는 찰나, 내 눈에 비친 것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카운터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앉아있었다고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인지 사실 잘 알 수는 없었다. 원목으로 된 나무 의자가 그의 몸 뒤로 비쳐 보였다. 그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보아왔던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이였다. 커다란 키, 뎅그런 눈망울, 시원하게 생긴 그 사람의 귀가 쫑긋거렸다.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터 그가 저기에 있었지?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던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눈을 가지고 지내온지가 워낙 오래된 터라, 나에게 이미 그런 존재들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도 이제는 그것의 존재를 느끼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기에 아마 나는 그를 그리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민석의 과거를 듣는 그때도 그는 가게 구석에 있었다. 내가 시시때때로 들러 커피를 맛볼 때도 그는 언제나 존재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내 기억 속 구석구석에 그가 있었다. 내가 참으로 민석이 형만 보아왔구나. 나는 작게 미소 짓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멍하니 앉아있던 민석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물론 그의 시선도 나를 쫓아왔다.
“……왔네.”
“내가 무슨 못 올 곳 왔어요? 왜 이렇게 축 처져있어.”
입을 삐죽 내밀며 카운터 앞, 그러니까 그 존재가 앉은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가 작게 웃었다. 덩달아 민석 역시 멋쩍게 웃었다. 아, 정말로 내가 제대로 반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 멋쩍은 웃음이 귀여워 미치겠는 걸 보면. 앉아서 빤히 민석을 쳐다보고 있자 민석이 몸을 돌려 항상 내게 내놓던 잔을 꺼냈다. 원두를 내리는 소리와 스팀 소리. 김민석의 공간에 내가 있다는 것이 묘하게 행복했다. 한참을 그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었을까, 종소리와 함께 손님으로 보이는 두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사실 둘만의 시간을 깨는 그녀들이 조금 미웠다―. 종달새처럼 저들끼리 지저귀던 여자들이 카운터로 와 민석을 불렀다.
“저기 오빠.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오.”
애교스런 말투에 괜시리 기분이 나빠 인상을 쓰는데 민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네 하고 답했다. 저러니까 이놈 저놈 꼬이는 거야. 나 같은 놈이라던가. 내 입이 댓 발 나온 건 보이지도 않는지 민석과 여자들은 말을 이었다.
“제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해서 여기 오픈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왔었거든요? 근데 그때 여기 커피 나오던 잔이 너무 예쁜 거야. 오빠 기억해요? 그 잔 뭐 어디서 수입해왔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하여튼 제가 이번에 결혼을 하는데 식기세트 장만하다가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서……. 혹시 그거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있어요?”
“아, 그게 어떤 거 말씀하시는지 제가 잘 모르겠는데. 저희 잔이 몇 번 바뀌어서요.”
민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한 여자가 질문한 여자에게 거봐, 그게 언제인데 기억을 하겠냐구. 하며 타박을 줬다. 그래도 굽히지 않는 여자가 잘 생각해보라며 민석을 재촉했다. 민석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송글 하고 맺혔다. 이거 내가 슬슬 끼어들어서 쫓아 내야 하나. 형이 당황하잖아. 한참을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내 앞에 반투명한 손이 스윽 내저어졌다. 이건 또 뭐야?
11. 내저어진 손은 내 맞은편에 있던 그였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멋쩍게 웃는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큰 키로 찬장 제일 위쪽에 있는 서랍을 톡톡 두드렸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리 두드렸다. ‘여기.’ 그의 입 모양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움직인 대로 카운터 안으로 향했다. 여자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그가 가리킨 서랍을 열자 핑크색과 노란색의 앙증맞은 꽃이 그려진 하얀 자기 잔이 먼지가 앉은 채 쌓여있었다. 밀쳐진 터라 인상을 한껏 쓰던 여자가 어! 하며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저거, 저거 맞다! 야, 거봐. 여기 오면 알 수 있다니까?”
민석이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 오밀조밀 모인 얼굴에 담긴 표정은 정말로 오묘해서 나는 뭐라 답해야 할는지 몰랐다. 멍하니 나를 보는 민석의 어깨를 여자가 툭툭 치더니 쫑알거리며 물었다. 저거 혹시 어떤건지 알 수 있어요? 민석은 그제서야 내게서 얼굴을 돌리더니 서랍을 뒤적거렸다. 이건 가격이 좀 나가요. 저도 그래서 한 세트만 사서 잠시 썼던 건데, 그때 오셨었나 보네요. 제가 연락처를 적어 드릴게요. 조근조근 말하는 민석에게 여자들은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타박하던 친구는 정말로 알게 될 줄은 몰랐는지 머리를 두어 번 긁적였다. 어느새인가 원래 제 자리로 돌아간 그는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는 확신했다. 저 존재가 김민석을 그토록 행복하게 했고, 힘들게 했던 ‘그’라는 것을. 그래, 그는 박찬열이라는 이가 분명했다.
12. 여자들이 감사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간 뒤에도 민석은 자리로 돌아온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요, 나 커피 안줄 거에요? 퉁명스런 물음에 민석은 아 참, 하고 몸을 돌렸다. 이미 아까 내렸던 커피는 차게 식어있었다. 민석은 다시금 말없이 커피를 내렸다. 나는 내 앞에 자리한 그―찬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작게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했다.
좋아할 만했네. 훤칠하기도 하고. 자알 생겼네. 무슨 미련이 이리 남아 여기에 아직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이 좋아했구나 싶어 질투 비슷한 감정도 뭉클 피어났다. 그래도 뭐 별수 있나. 이미 떠난 이를 질투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느새 커피를 다 내린 민석이 내 잔에 가득 따스한 커피를 담아왔다. 은은한 커피 향. 김민석의 냄새.
“형, 우리 사귀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존대인지 반말인지도 모르고 민석은 화들짝 놀랐다. 손에 들린 커피잔이 다시금 파르르 떨렸다. 세훈아, 말했잖아. 나는……. 어버버거리며 말하는 민석의 말을 끊었다.
“아무것도 안 해줘도 괜찮아. 나 안 좋아해도 괜찮아. 내가 형을 좋아하니까.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면 돼. 그러니까 우리 한번 만나보자, 형.”
민석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한숨이 거절을 해야 하는데 뭐라 말해야 하나 하는 망설임의 의미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 형이 오세훈을 뭐로 아는 거야. 나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뒤로 한 채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한마디 말을 남기고.
“오늘부터 우리 1일. 알겠지?”
뒤에서 민석이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안 들려. 알게 뭐야. 자고로 옛말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했다. 나는 길 건너에 도착해서 흘낏 가게 안을 보았다. 그는 내게 정말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90도로 숙인 허리가 어쩌면 조금 슬펐다. 나는 민석이 쫓아올까 싶어 다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13.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공강 시간마다 민석의 가게에 가는 것도 변함없었고, 카페의 내 자리도, 내 잔도 여전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민석이 퇴근하는 길을 바래다 주게 되었다는 것 정도.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사뭇 느린 진전이었지만 나에게는 매우 큰 한걸음이었다. 사실은 그마저도 몇 날 며칠을 들러붙어 징징거린 덕에 얻어낸 특전이었다. 연하라는 게 참 좋지. 징징거리는 것마저 용납이 되니까. 나는 연하의 특권을 마음껏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현은 니가 애냐며 비웃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뭐 두어대 쥐어패니 입을 다물기는 했다. 겨울의 바람은 살을 에게 차가웠지만 민석과 함께하는 시간만은 따스했다.
민석에 대해 알게 된 사실도 꽤 많았다. 백현을 쥐어박고 걷어차며 얻어낸 정보들에 은근슬쩍 민석과 대화하다 얻어걸리는 것들로. 민석은 그림을 좋아했다. 어쩌면 커피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귀갓길에 있는 갤러리를 지날 때면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민석은 언제나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이 걸린 갤러리를 지날 때 그 앞에서 걸음이 한껏 느려졌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그림을 향해있기 일쑤였다. 백현의 말로는 카페를 처음 연 이유도 남는 시간에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지금은 안 그려? 나의 질문에 백현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백현이 그런 대답을 한 이유를 내가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나 이까지 왔는데 집 구경 좀 시켜주면 뭐가 덧나요?”
“안된다니까. 집도 더럽고, 뭐 대접할 것도 없어.”
민석이 혼자 살고있는 오피스텔 앞에서 한참을 말씨름을 벌였다. 그리고 언제와 같이 결과는 내 승리였다. 허락을 구한다거나 그런 게 무슨 필요인가. 나는 민석을 현관 앞까지만 데려다 준다고 한껏 꼬드기고는 현관 앞에서 민석을 들여보내기 이전에 쏙 몸을 집어넣었다. 현관에 들어선지 1초 만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민석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신나서 안으로 달려들어 가던 내 발걸음이 멈췄다. 아, 익숙한 얼굴. 거실의 곳곳에 걸려있는 캔버스에는 너무나 익숙한 이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카페에 항상 앉아있던 그, 찬열의 모습이. 가장 크게 걸린 캔버스에는 등을 내보인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그가 있었다. 매끄럽게 드러난 상반신이 그 그림을 그릴 때의 민석의 모습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게 했다. 거실에 있는 그림은 족히 수십 장은 되어 보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민석이 조용히 다가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민석의 심장이 우는 것만 같아 나는 죄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너는 이렇게 추억만으로 살고 있구나. 흠흠. 나는 헛기침을 하고 괜시리 웃었다.
“자알 생겼다. 그림 여기서 그리는 거야?”
“……아니. 이제 안 그려.”
민석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내가 멋대로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나는 오늘 집에 가서 백현을 다시금 닦달하기로 마음먹었다. 민석의 뒤로 현관을 통과하듯 들어온 그가 가만히 제 몸이 그려진 캔버스를 손으로 쓸었다. 내 눈이 민석에게 있었더라면, 그를 볼 수 있었더라면 민석은 조금 더 행복했을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무지근하게 내려앉은 집안의 공기 속에서 민석은 조용히 내게 주스 한 잔을 따라주었다. 여전히 캔버스를 만지작거리는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14. 아이고, 오세훈. 이 멍청한 새끼야. 너는 또 그걸 들어갔어? 우리 불쌍한 민석이 형 어쩐대. 형이 그림 진짜 좋아해. 커피 아니면 그림. 하루 종일 그랬을걸? 근데 뭐 내가 이걸 굳이 말로 해야겠느냐마는, 찬열이 가고 형 붓 꺾었어. 전시회 한답시고 갤러리도 예약해 뒀었는데 그냥 그만뒀어. 위약금 다 물어줘 가면서. 그럴만하지, 내는 그림이라고 해봤자 죄다 박찬열 그 새끼 그림인데. 진짜 재능이 아까워서 갤러리 주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형 가르치던 선생도 그렇고 얼마나 붙들었는지 몰라. 근데도 끝까지 안 그린다더라.
붓에 박찬열이 산대요. 캔버스에 박찬열이 사신대. 그 씨발 흔해빠진 물감에도 박찬열님이 사신대잖아. 그림 도구들은 어쨌는지도 모르겠다. 집안 다 뒤져봐도 보이지도 않어. 새로 도구 사다 주고 그래 봐도 평생 그런 짓 안 할 거라 그러더라. 진짜 재능이 아깝지. 내 친구긴 하지만 박찬열이 민석이 형 미래 끊은 거나 다름이 없어. 미안한 소리지만 진짜 형 그림으로 잘 될 줄 알았거든. 나나 형 주위에 있는 사람들 전부. 아마 박찬열이 천국에서 그 꼴 보면 기함을 할 거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닐걸. 그 새끼가 얼마나 눈물이 많은 새낀데…….
15. 나는 그날 집 안의 모습을 괘념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다 알고 시작한 건데 마음 아파 할 이유가 없었다. 인간 오세훈, 그 정도로 힘들어할 남자 절대 아니지. 과대의 공강이라는 문자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민석의 카페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카운터에 앉아있는 민석과, 그를 바라보는 찬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민석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는 찬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왔어? 나 왔어. 두 마디가 오간 뒤로 민석은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들에 정신없이 카운터를 헤매였다. 내 앞에 놓인 잔을 후후 불어가며 마시고 있을 때, 찬열이 내게 무어라 손짓을 했다.
그의 손이 민석을 한번 가리키더니 손을 들어 붓을 잡는 모양새를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듯 허공을 슥슥 그으며 제스추어를 취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연이어 숙여지는 허리. 나는 그들을 보면서도 한 번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 그가 하는 말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림, 그릴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그 눈망울이 너무나 슬퍼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은 내 고갯짓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괜스레 식어빠진 커피를 후후 불었다.
퇴근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애당초 대학가 카페가 그리 오랜 시간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기에 민석은 8시 즈음 되어 가게 문을 닫았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의 영업이 끝났다. 나는 가자, 하고 말하며 민석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언젠가는 내가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 그의 손이 자연스레 내 허리에 감기기를 기원하며 그의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걸었다.
민석은 더이상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제지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빨리 자신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거실에 휑뎅하게 놓여진 소파에 앉아 민석이 내민 잔을 받았다. 하루종일 커피 마셨잖아. 민석이 내민 잔에 담긴 건 샛노란 오렌지 주스였다. 이런 작은 것에 감사하는 오세훈이 될 줄이야. 내 생각 한 거지? 하며 되묻는 내게 민석은 입꼬리 한쪽을 슥 올렸다. 주스 잔을 내려놓고 나는 말을 꺼냈다.
“그림, 다시 그리자. 형.”
“변백현이 또 뭐라고 떠들었어? 그거 내가 언제 한번 입 꿰매준다고 전해. 통 오질 않으니 말을 못하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민석이었지만 나는 그의 비죽 올라간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떠나간 박찬열과 동일한 언어였다. 그림 도구들은 다 어쨌어. 작게 묻자 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억 안 나. 창고 어디에 집어 던졌든, 넣어뒀든 처박아 둔 거 같은데 기억 안 나.”
나는 대뜸 일어나 거실 한쪽편의 창고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을 벌컥 열자 뿌연 먼지들이 앞을 감쌌다. 콜록콜록. 기침 두어 번을 하고서야 어지럽혀진 창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그곳에 있었다. 여름 이후 사용하지 않았던 먼지 쌓인 선풍기에, 예전에 썼을법한 낡은 커피머신. 김민석의 과거는 그곳에 다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민석은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먼지가 묻어 양말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찬열이 나를 스치듯 지나가 창고 구석 매트리스 아래에 깔린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트리스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민석이 거실에서부터 화다닥 달려들었다.
“뭐! 뭐하려고!”
내 팔을 잡아끄는 민석의 손을 떨구어 내고는 나는 상자를 끄집어냈다. ‘사랑하는 너와 나. 찬열, 민석.’ 먼지 쌓인 나무 상자에는 네임펜으로 작게 끄적여져 있었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겠지. 그저 찬열과 네 이야기를 들추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언제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는 붓과 물감들, 팔레트들이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민석이 까무룩 주저앉으며 눈물 두어 방울을 떨구었다.
“나한테 왜 이래, 세훈아…….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울먹이는 그를 찬열이 가만히 뒤에서 끌어안았다. 닿을 리 없었다.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이였다. 찬열은 제 몸과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울고 있는 민석의 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나는 조용히 민석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겨내야지. 견뎌내야지. 너는 살아야지. 중얼거리는 내 말을 민석이 들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내 품에서 민석은 한참을 울었다.
16. 민석은 붓을 다시 들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의 가슴을 파헤치고도 일주일도 더 뒤에 있었던 일이었다. 붓을 보고 눈물 한 방울, 물감을 짜면서 눈물 한 방울. 백현은 나더러 지독하다 했다. 나는 민석을 캔버스 앞에 앉혀놓고 그가 우는 것을 온전히 지켜보았다. 그저 울다 울다 지칠 때쯤 한번은 기대겠지. 안절부절못하는 찬열이 그 주위를 연신 맴돌았지만 나는 그저 기다렸다. 기어코 그가 붓을 들어 캔버스에 첫 색을 칠했을 때, 나는 조용히 민석을 끌어안았다. 잘했어, 잘했어. 민석도 울고, 나도 울고, 찬열도 울었다. 사랑이란 건 참으로 지독했다.
17. 민석이 처음으로 그려낸 것은 자신의 카페 내부였다. 값비싼 원목들로 이루어진 나무상자 같은 제 가게를 천천히 그려냈다. 따사롭게 느껴지는 햇살비친 카페의 그림은 분명 매우 잘 그려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다. 나는 그 이유를 몇 날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이 희뿌옇게 남아 마무리 되지 못한 탓이었다. 눈치 없이 백현이 그것에 대해 물으려 했으나 다행히도 재빠르게 움직여준 내 손은 백현의 입을 틀어막는 것에 성공했다. 그 희뿌연 유리창 너머에는 찬열이 마지막을 맞이한 곳이 있었다. 나는 조급함을 버렸다. 성질 급한 오세훈, 이제 다 죽었구만. 백현은 나를 보며 놀려대기 바빴지만 나는 그저 망부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내 일상은 단조로웠다. 카페에 지박령처럼 붙어서는 일하는 민석을 바라보다, 일이 끝나면 민석을 바래다주고, 잠깐 들러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그 일상에는 늘 찬열이 함께했다. 나는 그런 찬열을 질투하면서도 미워하지 못했다. 겨울이 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18. 민석은 카페로 들어서는 세훈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였다. 손님들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고생했다며 어깨를 주물거리는 세훈의 손을 민석은 그저 내버려 두었다. 노곤한 몸이 바닥으로 훅하고 꺼지는 느낌이었다. 고 가는 손으로 안마는 또 어쩜 이리 잘해. 민석은 작게 미소를 짓고는 카운터 안에 있던 도시락통을 전자레인지에 쓱 넣었다. 별 이유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솥은 밥이 다 되었다며 울었고, 어제 사오고서는 깜박하고 챙겨 넣지 못한 계란 한 판이 식탁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랬기 때문에.
“어? 뭐야? 형 도시락 싼거에요? 와, 대박. 내꺼도 있는거야?”
제 키를 생각 못 하고 좋다며 방방 뛰던 세훈은 기어코 카운터 위 찬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야. 머리를 문질거리며 입을 비죽 내미는 세훈이 귀여워 무심코 헛웃음이 터져 나온 민석이었다. 어쩌면 하는 짓이 저리도 찬열이랑 비슷할까. 전혀 닮지 않은 세훈의 얼굴 위로 찬열의 얼굴이 겹쳤다. 구석에 처박혀있던 모서리 완충제를 끄집어내는 민석의 가슴 한구석이 따끔하고 아파져 왔다. 대충 뾰족한 부분에 완충제를 붙인 민석은 말없이 데워진 그릇들을 꺼내어 자리에 펼쳤다. 세훈이 쪼르르 달려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찬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도톰하게 부쳐낸 샛노란 계란말이에 작게 잘라 볶은 김치, 남아있던 고기를 대강 양념해 볶아낸 불고기. 특별한 것도 아닌데 세훈은 수저를 들고 한참이나 반찬들을 바라보았다. 하얀 쌀밥이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는 뒤로, 세훈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너는 어쩌면 찬열이 일지도 몰라. 민석은 제 수저에 고기 한 점을 올려주는 세훈을 보며 생각했다.
백현이 찾아와 한참을 종알거리다 갔다. 퇴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술 한잔 하자며 보채는 백현을, 세훈은 뒷덜미를 잡고는 쫓아냈다. 그 모습이 왠지 집 지키는 강아지 같기도 했지만 민석은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가게의 불을 끄고 문을 잠그자 세훈이 그 큰 키로 셔터문을 손으로 죽 잡아 끌어내렸다. 옆에 놓인 쇠 지렛대를 꺼내려던 민석은 거기서 또 한 번 멈칫했다. 예전 낑낑대며 셔터를 내리려고 하다 떨어트린 지렛대에 머리를 맞아 찢어졌던 적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찬열은 그런 민석을 보며 다 제 잘못이라며 엉엉 울고는 퇴근 때마다 와서 셔터문을 내려주고는 했었다. 세훈이야 무심코 하는 행동이겠지만 민석에게는 달랐다. 다시금 세훈의 얼굴 위로 찬열이 스쳤다. 이상하게도 세훈은 정말로 찬열같은 행동을 참 많이 하고는 했다. 물론 그랬기에 더욱 세훈을 제 선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민석은 조용히 내밀어진 세훈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세훈은 맞잡은 손을 제 코트 주머니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핫팩이 안에 있었건만 맞잡은 손에서 주는 열기를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따뜻하지? 웃는 세훈에게 민석은 조금 죄스러웠다.
19. 민석의 현관 앞에서 세훈은 발을 잠시 멈추었다. 민석이 왜 그러냐는 듯 뒤를 돌아보자 세훈이 가만히 민석을 끌어안았다. 복도 등에 꼬인 벌레 한 마리가 시끄럽게 왱왱거렸다. 기다리겠다고만 마음먹었었는데, 오늘 하루만 봐줘. 세훈은 민석의 어깨를 잡고는 그 작달막한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끈적거리지 않는 그 가벼운 입맞춤은 마치 성자의 발에 입맞춤을 하는 순례자와도 같았다. 세훈의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음을 민석은 알았다. 멍하니 바닥으로 축 처져있던 민석의 팔이 조용히 들어 올려졌다. 들어 올린 팔이 세훈의 허리를 감싸고 나서야 세훈의 떨림이 멎었다. 민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은 아주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입맞춤이었다. 복도의 센서 등이 점멸하더니 곧 암흑에 휩싸였다.
20. 하루 온종일 들떠있는 나를 더러 백현이 미쳤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오세훈이 드디어 미쳤어! 온 강의실에 떠들고 다닐 기세라 나는 백현의 입에 손가락을 푹 쑤셔 넣었다. 켁켁 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에 나는 양손을 모아 총을 만들어 백현을 향해 빵 하고 쏘았다. 백현은 진심으로 나를 향해 미친놈이라며 소리 질렀다. 그래, 나는 미쳤다. 니가 민석이 형이랑 뽀뽀하고 나면 제정신 일 거 같으냐. 나는 혼자 어제의 키스를 되새김질하며 연신 흐흐 웃었다. 백현이 휴대폰을 두드려 무언가를 찾는가 싶더니 내 앞에 정신병원 연락처 목록을 슥 들이밀었다. 예헷. 그래도 좋다, 나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를 바라본 민석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왔어. 괜스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 나는 한참 발을 동동 굴렀다. 조만간 민석의 그림에는 유리창 너머도 그려질 것만 같아 그것이 더없이 기뻤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자니 찬열이 가만히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키스 들킨 거야? 시답잖은 고민으로 끙끙대고 있자 민석이 커피를 슥 내려놓고는 카운터로 쫑쫑 도망을 갔다. 그게 귀여워서 또 한 번 박장대소. 카운터에서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날아들어 머리를 때렸다. 신은 아마 김민석을 만나라고 나를 세상에 내려보낸 게 아닐까.
21. 한참을 커피 한 모금에 웃음 한번, 또 한 모금에 웃음 한번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었을까, 가게 문이 열리는 종소리에 민석이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카페에 정적이 흘렀다. 연신 키득거리던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들었을 때, 민석은 카운터에 서서 파랗게 질린 입술로 바들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누군가. 현석이었다. 찬열을 손가락질하느라 바빴던 그 무리의 대장 격인 인물.
“야, 오세훈. 너 요즘 여기 산다며 아주?”
그 목소리에 민석의 몸이 다시금 떨렸다. 내가 민석을 살피는 것을 본 것인지, 현석이 민석을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금 내게 비웃듯 말을 건냈다. 그의 옆자리에 있는 찬열의 표정 역시 이제껏 본 것 중 더없이 무표정했다.
“너도 박찬열처럼 저거한테 갔냐? 뭐 우리 과 남자 새끼들은 죄다 왜 이래? 뭔 커피에 남자 꼬시는 약이라도 섞어서 파나.”
카페에 나오는 음악 소리도 그의 목소리를 덮어주지는 못했다. 한 사람이 저 때문에 죽었다면 철이 들 법도 한데, 그의 목소리에는 민석을 향한 혐오감, 아니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감이 지독하게 깔려있었다. 말로만 듣던 호모포비아가 이런 건가. 세훈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카페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것은 여전히 열려있는 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웩. 씨발, 더러워. 현석의 입에서 걸걸하니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한껏 거만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의자에 기대었다. 나는 얼마 전 내게 고백을 했던 여자 ‘친구’를 떠올렸다.
“은지가 나 좋대지? 눈이 홱 도셨어, 그래서?”
“지랄하고 있네. 은지가 니가 호모새낀건 알어? 씨-발, 소문 한번 쫙 내줘?”
어이고, 멋진 협박이십니다. 나는 정말이지 배가 찢어질 듯 웃고는 더더욱 거만한 자세로 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이거 어쩌냐.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우리 과 애들 그거 다 안지 좀 됐다? 은지는 나보고 짝사랑 힘들겠다면서 술까지 사주신다던데?”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내가 공강 시간만 되면 백현조차 버리고 어디론가 튀어가는 게 일상이 되어있는 터라, 웬만한 과 아이들은 거진 다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그들의 물음에 솔직히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찬열의 일이 있은 이후로 아이들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해는 현석의 무리에 대한 반발 심리이기도 했다. 어디서든 대장 노릇을 해야 속이 풀리는 성격의 현석은 꽤나 아이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과대랍시고 여기저기 끼어들지, 여기저기 집적대지. 찬열의 일을 자랑이랍시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 그 미움에 더 일조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죽은 일을 저렇게 이야기하고 다녀? 쟤 진짜 정신 이상한 애 같아. 그것이 대다수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이제는 사회생활을 배워가는 나이이기에 면전에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릴 법도 했을 텐데, 이 자기밖에 모르는 놈은 남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얼마 전에 과 모임은 연락 오디? 와, 이거 어쩌냐.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호모 새끼는 과 모임 가서 신나게 놀다 오셨는데 잘나신 과대님은 집가서 손가락만 빠셨네?”
현석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 얼굴에 몇 차례 더 독설을 퍼부었다. 그가 중간중간 씨발, 개새끼, 뭐라 뭐라 욕질을 하면서 말을 끊으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내게로 급격히 기울어 있었다. 흘낏 쳐다본 민석의 표정은 여전히 그리 좋지 않았지만 현석이 처음 왔을 때보다야 훨씬 나았다. 군대나 가라, 미친놈아. 너 제대하고 나면 아는 애 없어서 좀 살만해지지 않겠냐? 대장질 좀 그만하고.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하자 현석이 벌떡 일어나 내게 주먹을 날렸다. 딱히 피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 얼얼한 뺨을 주물거리며 다시금 웃었다.
“이제 정당방위네?”
나는 말없이 현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가는가 싶더니 돼지마냥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발을 들어 배를 걷어차자 현석이 억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나는 그 위로 다시 한 번 그를 찍어 눌렀다. 털썩. 현석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옆에 있던 의자가 넘어져 현석의 머리를 쿵 하고 찧었다. 합기도 배운 백현이도 못 이기는 나를 디룩디룩 살찐 니가 어떻게 이길 생각인지 모르겠네. 나는 중얼중얼 거리며 쓰러진 현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반항을 하는가 싶더니 곧 웅크린 채 얻어맞고만 있는 현석을 얼마나 더 지르밟았을까, 누군가 내 옷깃을 쭉 잡아당겼다. 민석이었다.
22. 전화번호부를 뒤져 그 돼지무리 중 한 명을 불러내자 한껏 귀찮아하던 그는 곧 와서는 현석을 짊어지고 떠났다. 야, 세훈아.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는 짐꾼을 보아하니 저 무리에서 퇴출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민석은 부어오른 내 뺨에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연신 대어주고 있었다. 찬열은 맞은편에 앉아 꾸벅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그 자식을 패주고 싶었었나 보았다. 문득 찬열의 등에 비치는 의자의 색이 짙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들었는지 어딘가서 백현이 쪼르르 달려왔다. 맞은 건 나인데도 백현은 오자마자 민석의 안위를 살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물대다 내게 머리를 쿵 하고 쥐어박혔다. 새끼, 벌써 니꺼 챙기냐. 백현의 부루퉁한 말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던 눈으로 민석이 와아 하고 웃었다.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테이블 위 커피잔으로 퐁당 하고 빠졌다.
23. 그 날 이후 카페는 꽤나 북적거렸다. 소식을 들은 과 아이들이 쭈뼛쭈뼛 찾아와서는 내 안위를 묻거나 혹은 격려의 말을 전했다. 민석은 그것이 꽤나 부끄러운 모양인지 기어코 내게 카운터를 맡기고 구석 자리로 쏙 하니 숨어 그림을 이어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이제 햇살 비치는 창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길 너머 뿌연 누군가의 실루엣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실루엣이 나임을 나는 확신했다. 아직 그려지려면 한참을 멀어 보였지만, 분명 삐딱하게 서서는 카페를 바라보는 그것은 나임이 분명했다. 제 자리를 잃은 찬열은 구석에 숨어들어 민석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 어림 너머로 뒤 나무 벽의 옹이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24. 벚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가게 창문을 넘어 숨어들었다. 가만히 커피잔 위로 숨어든 벚꽃임은 소금쟁이 마냥 그 위를 신나게 헤엄쳤다. 가게의 문이 열렸고,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꾸러기같은 목소리가 카페를 메웠다.
“형! 얼른 가게 문 닫고 나와! 차 시간 다 돼간다, 얼른얼른!”
며칠 전부터 여행 이야기에 들떠있던 세훈이 그 기다란 팔다리를 휘적휘적 흔들며 민석에게 손짓했다. 구석에 박힌 지렛대는 이제 꺼낼 일이 없었다. 그가 기다란 팔로 셔터를 내려 줄 테니까. 민석이 운전을 한다는 것을 굳이 낭만을 찾으며 버스를 예약한 어린 세훈은, 연신 다급히 민석을 재촉했다. 알았어, 나갈게. 미적거리며 가게를 나서서는, 등에 멘 가방을 세훈을 향해 휙 던지자 휘청 하며 그걸 받아낸다.
민석은 팔랑거리며 앞서 걸었다. 큰길에서 택시나 잡아두고 있어야지. 저 뒤에서 세훈이 같이 가자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세훈을 보자 세훈은 누군가에게 인사하듯 가게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 희뿌연 아지랑이 같은 것을 본 것 같기도 했으나 눈을 두어 번 비비적거리자 달려오는 세훈이 전부였다.
양 어깨에 묵직하니 가방을 멘 세훈이 ‘혀엉‘하며 민석에게 업히듯 달라붙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체온에 민석은 미소 지었다. 간간히 그의 얼굴에 찬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온전히 세훈의 모습으로 보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민석은 그렇게 믿었다. 그들이 떠난 카페의 한구석에 날아든 벚꽃잎이 그림 위로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림 속 따스한 카페의 전경에는 유리창 밖에서 손 흔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프렌치 코트를 걸친 그 남자의 얼굴이 완성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도 그 날은 민석이 온전히 찬열을 추억 상자에 넣는 날일 것이 분명했다. 하늘에서 투툭거리는 소리와 함께 촉촉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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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영화보다 훨씬 잘 만든 드라마는 처음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