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립보서 4:19
나의 기억 속 이민형.
한낱 다정함조차 존재하지 않은 채
파도 한번 치지 못하는 살얼음으로 뒤덮인 겨울 빙판과도 같던
내가 연민을 느껴볼 수 있었던 유일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눈동자를 빛내며 운동장 너머를 가리키는 재현의 모습에 작열하는 햇살을 피해 눈을 찡그리며 운동장 반대편을 응시했다.
살다보면 별의 별 광경을 다 보게 된다더니,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내 모습을 천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재현의 너머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웬 여자아이와 함께 운동장 벤치에 앉아있는 민형이 보였다. 봄의 홧홧한 온기 사이로 넘어오는 산들바람을 배경 삼아 제 검은 머리칼을 살랑이며.
설마, 여자친구?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제 옆구리를 찔러오며 묻는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재현이 입가에 미소를 완연히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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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의 그 무료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할 때면 총구의 잘빠진 금속 몸체를 앞에 두었을 때와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들곤 했다. 허나 여태 나의 눈 안에 담겼던 이민형의 모습이 허상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지금 내 눈앞의 그는 마치 소년과도 같았다. 나를 질리게 했던 평소의 냉랭함 따위는 햇살에 증발해 녹아내린 것 마냥 우습게. 그 모습을 소년기의 유쾌한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인 정재현이 내 옆에서 연신 피실피실 바람빠지는 웃음을 터트림에도 나는 입꼬리가 경직된 것처럼 찰나의 순간마저도 그와 함께 웃어보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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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네, 이민형은. 자기 마음 가는대로 연애도 해보고." 씹어뱉듯 내뱉은 말에 달뜬 어린아이의 표정을 띄고있던 재현의 낯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말을 해도 무슨 그렇게..."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을 응시하는 재현을 앞에 둔 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뜨겁다 못해 들끓는 감정을 숨긴 채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것 뿐이었다.
"꼭 내 인생만 이 지랄이지."
야, 김여주. 퍽 심각한 표정을 하며 내게 손을 뻗는 재현을 무시한 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무식하게도 뜨거이 내리쬐는 햇살의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채 운동장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바람을 타고 유연한 왈츠를 추던 한번도 손을 타지 않은 민형의 결 좋은 머리칼,
웃는 법조차 모를 정도로 고장난 듯 해보이던 민형의 뻣뻣한 낯빛에 조용히 일렁이던 그 아이같은 순수함.
이 모든걸 축복하듯, 그 너머로 내리쬐어오는 싱그러운 햇살.
이민형이 단 한번이라도 그런 얼굴을 해보인 적이 있었던가.
나도,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면 그런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을까.
자꾸만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난 단 한순간도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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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나 좀 봐봐."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달려온건지, 재현이 다소 흥건해진 이마를 교복 셔츠의 소매깃으로 훔치며 내 책상 모서리를 제 손으로 꽉 죄었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바래진 녀석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양 별 감흥 없이 훓고 있던 교과서로 눈을 돌렸다. "지금 네 얼굴보면 죽어버리고 싶어질 것 같아." 차분히 내뱉은 나의 폭언에 재현은 물론 옆에서 기척 하나 없이 멍하니 나와 재현을 바라보고 있던 동영마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동영에겐 처음 접하는 나의 모습이었겠지만, 재현에게는 아니었다. 흔하디 흔한 나의 지랄맞은 화풀이 따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터.
"김여주 제발..."
나와 제가 서있는 이 공간이 공연히 노출된 장소라는 걸 잊은 양, 재현은 제 이마를 짚으며 내 앞에서 보란 듯 무너져내렸다. "한번도 이렇게 크게 반응한 적은 없었잖아, 너." 대체 뭐가 문젠데. 재현의 그 말 한마디에 무너져내리고 싶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럼 한번 네가 나로 살아봐. 그 병신같이 불쌍하게만 보이던 새끼가 얼마나 좆같을정도로 부러워지는지, 네가 한번 나로 살아봐." 점점 격해지는 목소리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며 씹어뱉은 내 대답에 재현은 순간 멍한 눈을 해보였다. 텅 비어버린 채 위험신호를 내뿜고 있는 재현의 눈동자 너머로 수많은 질문들이 무의식 너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민형이 부러워?
그렇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했더라도 마음 편히 얘기하고 있었을 것 같아?
"나와. 나와서 얘기좀 해."
이제 재현은 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떨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그의 손아귀에 잡힌 내 손목을 빼내기도 전에, 말간 손등이 재현과 나의 것 위로 겹쳤다.
"싫대."
"여주는 너랑 말 섞기 싫대."
대체 지금부터 난,
널 어떡해야 좋을까.
"왜그랬어. 걔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한숨을 쉬며 교실 밖으로 물러나는 재현의 뒷모습을 보며 끝끝내 울음이 터져버리고 만 나를 달래준답시고 동영이 향한 곳은 고작 빈 교실이었다. "괜찮아. 재현이 나쁜애 아니잖아." 여주 친구니까, 맞지? 역시나 평소 그러던 것 처럼 재현의 이름을 뭉근하게 발음한 동영이 투명히 제 속까지 비추어내며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동영의 웃음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다 이내 다시 엉엉 울어제끼는 내 모습에 당황한 기색 역력히 동영이 서투른 손길로 내 등을 쓸어내린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밖에 없어. 다 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거야." 그걸 몰라? 애꿎은 동영에게 화풀이를 하며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으로 그를 흘기자 동영은 파르르 떨리는 나의 눈꺼풀 위로 겹쳐오는 슬픔과 무력감을 가만히 헤아리다 말고 돌연 축 쳐진 어깨를 끌어다 제 가슴에 내 머리를 뉘었다. "세상엔 여주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그걸 몰라. 일전에 내가 뱉어냈던 투정어린 말의 끄트머리를 똑같이 따라 읊으며 동영이 눈을 가만히 감는다. 창고 안 눅진한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내 머리칼 사이로 마치 선율을 매만지듯 말갛게 일직선을 그리는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떠보인다.
나는 네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라 좋다.
어린시절 내 등불이 되어주곤 했던 부모님처럼 눈 감았다 떠보이면 사라지는 내 상상 끝의 산물이 아니라 좋다.
감히 헤아리지도 못할 기나긴 시간동안 눈을 감은 채 잠에 들어도, 눈을 떠보이면 손에 잡히는 너의 아름다운 피사체가 좋다.
너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감사함에 벅차오르곤 한다.
-
"그래도 재현이는 여주를 생각해주는 사람들 중 하나잖아."
두 발이 묶여버린 양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생각을 않는 내 등을 떠밀며 동영은 연거푸 재현과 나의 화해를 강조했다. "이럴꺼면 아까 왜 정재현한테 뭐라고 해준건데-" 여리여리한 몸집과는 달리 우직한 힘으로 날 밀어붙이는 동영의 손길에 밀려나듯 움직이며 항의하는 내 모습에 그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응수했다. "아까는 여주가 준비가 덜 되보여서 그랬던거고." 지금은 충분히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처음 마주하는 동영의 단호한 모습에 한풀 꺾인 채 그의 응원 아닌 응원을 받으며 교실 밖으로 나섰다. 화해도 화해라지만, 대체 녀석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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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재현은 한번도 나와 크게 다퉈본 적이 없었다. 근 4년간 살을 부비고 살아왔으면 한번쯤 치고박고 싸울만도 한데, 재현은 단 한번도 내 심기를 크게 건드린 적이 없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꽤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태용의 앞에서는 그러지 못해서였을까, 재현의 앞에만 서면 나는 희한하리만치 괴팍하게도 성질을 부리며 그를 괴롭히기 일쑤였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내 심기를 건드리면 그 화를 죄없는 재현에게 왕창 풀어버리기도 했고, 재현이 내 말을 하나라도 거역하는 날에는 그가 진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나의 횡포의 이유는 유독 나에게만 휘두르게 쉽게 굴었던 재현의 유한 성격이 아니었다.
재현은 비밀이 많았다.
나의 모든 비밀에 관해 낯간지러울 정도로 낱낱이 알고있는 재현과는 달리, 나는 녀석의 비밀에 대해 단 한가지의 진상도 알지 못한 채 눈이 먼 사람처럼 살았다.
하얗고 까만 피아노 건반 위를 유영하는 그의 손가락에 대해서도 몰랐고,
뒷골목에서 일하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한 태를 자랑하는 그의 손목을 가로지르는 길고 짧은 흉터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그토록 그 날렵한 모습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어둡고도 끈적한 암흑에 대해 알고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탈인데,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더이상 나랑 붙어먹고 있기 싫어질지도 몰라."
그 모든 진실들로부터 도망치고있는 사람은
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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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들이 있다.
가령 사랑하는 마음이라던가, 하는 어린날의 망각 따위가 아닐지라도,
서로의 눈동자 깊은 그 어딘가를 응시하기만 해도 전해지는.
그런 진심들이 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들어선 체육창고 안에는, 매트 위에 걸터앉아 입 밖으로 뿌연 연기를 내뱉고 있는 정재현이 있었다.
"우리 김여주 언제 나한테 사과하러 오나, 하고 새갑 뜯었는데 벌써 독대 남았다."
재현의 발 밑을 아득하니 수놓고 있는 때타버린 담배꽁초들을 어색하게 발로 치워내며 재현의 앞에 엉거주춤 서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고개 들어봐."
부드러운 재현의 음성에도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는 뒷목에 여전히 습기가 눅진하게 베인 체육창고의 희끄무레한 바닥을 응시하며 입술을 퍽 깊게 씹었다.
"내가 미안하니까, 고개 들어 김여주."
그 말에 다시금 울음이 터져버린건, 한순간이었다.
"왜 또 울어, 왜."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높이 쌓인 매트 위에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재현이 이내 다른 한손으로 내 뒷통수를 감싸안은 채 제 품에 날 안았다.
"나, 나 운거. 어떻, 어떻게 알았어." 숨넘어가도록 흐끅, 하는 소리를 반복하며 묻는 내 모습에 웃어제낀 재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항상 말했지. 너는 얼굴에서 다 나타난다고."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지속된 그와 나의 침묵 끝에, 재현은 끝내 축축하니 젖어든 제 와이셔츠에서 내 얼굴을 떼어냈다. 다정하니 숙인 고개에 톱니바퀴 맞물리듯 겹쳐오는 그와 나의 시선이 아무도 없는 체육창고의 불쾌하리만치 습한 공기 위를 하릴없이 부유했다.
부드러운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재현의 갈색 눈동자.
"미안해-"
"사랑하는게 너한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멋대로 치부해버려서 미안하고,"
"아직 마음 제대로 풀리지도 않은 너한테 막무가내로 몰아붙여서 미안해."
그리고 난 항상 부드러운 그 모든 것들에 지독히도 취약했다.
무슨일인지... 더보기란 수정을 몇번이고 해보아도... 되지가 않네요...
일전에 언급드렸던 문제와 슬럼프 문제 모두 극복하고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천천히 자리잡다 곧 연재폭주기관차 탑승하도록 하겠습니다.
8화부터는 기존에 답답하다 느끼셨을 수도 있는 스페이싱도 바꾸어보았는데 어떤가요...ㅎㅎ
쉬는 와중에도 종종 댓글남겨주신 독자님들과 신알신 취소를 누르지 않아주신 모든 독자님들 그리고 기다려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__)
암호닉은 신청마감이며 곧 정리해서 리스트를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