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이나 갈까?"
일주일에 한 두 번, 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들려오는 목소리다. 나는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저가 먼저 신발을 신고 내 것까지 꺼내주기 일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든다. 텔레비전 앞에 계신 부모님께 가볍게 손을 흔들고 대문을 나선다. 시골의 밤은 풀잎이 부딪히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 등 자연스러운 것들로만 가득하다. 그리고 그중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내 옆에 있는 그를 보는 내 심정 정도.
젊은 느티나무
"인사해요. 여기는 내 딸."
그를 처음 만났던 건 그가 아직 검은 교복을 입고 다닐 때였다. 목까지 올라오는 깃과 각이 맞게 떨어지는 교복이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교복 입을 때라고 해봤자 고작 석 달 남짓이었지만. 그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동그란 얼굴이었고 분위기 역시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덜 자란 느낌이 있었다. 눈매는 기다라니 서늘한 듯했지만 동그랗기도 한 것이 약간은 순한 인상을 주었다. 그 아래로 떨어져 있는 콧대나 가는 입술, 갸름한 턱 따위들을 훑고 나니 내가 인사할 차례가 왔다.
난 내 교복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고 그도 저의 아버지 뒤에 서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어색한 공기가 만연한 공간이었지만 엄마와 건너편의 남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아마 우리가 알아서 친해질 것으로 생각할 테지.
그날은 기념이라면 밖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명, 두 명이 화장실을 오가니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나는 자기 전에 물을 한 잔 마실 요량으로 부엌으로 갔다. 겨울이 다가올 준비를 하며 찬바람을 쉴 틈도 없이 뿜는지라 밤 중에 나온 거실은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 추웠다. 양팔을 비벼 마찰을 일으켜 보지만 추위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거실 쪽으로 향하는데 부엌으로 들어오던 그와 마주쳤다. 교복 대신 흰 반팔과 남색의 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 아래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시선을 피할까 싶었지만, 그 눈동자가 친구가 입에 물려주었던 초콜릿과 비슷해 그러지도 못했다. 단순히 갈색을 띠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달큰한 것이 있는 것처럼.
"어, 잘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손길은 약간 어색했고 자라고 타이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독려하는 것이랑 비슷했다. 살짝 웃음이 날 뻔 했지만 그냥 '네.' 하는 단답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는 내가 그를 지나쳐서 가는데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발소리 외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방 안에서는 거울을 보며 크림을 바르는 엄마가 있었다. 작년 생신 때 선물로 사드렸던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펴놓은 이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톱을 매만지며 엄마가 누울 순간을 기다렸다. 엄마는 볼을 몇 번 쓸고는 방의 불을 껐다. 순식간에 빛을 잃은 듯 검게 변한 방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기 어떤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응. 괜찮네. 학교도 가깝고."
"그렇지. 그게 편하지."
몸이 편한 건 나고 마음이 편한 건 엄마겠지. 괜찮다고 말한 건 엄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엄마와 나는 본래 사람 많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없는 존재였다. 그저 아버지라는 단어가 있구나 하는 생각만 들정도로 나와는 연관이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걸로 불편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뭇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려가서 살자고.
솔직히 말하자면 달가울리가 없었다. 엄마는 몰라도 나는 나고 자란 곳이 여기라 여행 외에 이곳을 떠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이 바뀌면 모를까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더더욱. 게다가 나에게 새아버지가 생긴다는 얘기를 덧붙이고는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지.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사람이 곧 아버지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 함께 산다는 것에 어딘가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의 입술은 불만을 가득 담고 잔뜩 앞으로 나가있었다.
"태현이 걔, 잘생겼지?"
"...응."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를 미워하고 눈을 흘기고 다녔겠지. 정말로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물론 처음부터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얼굴이 마음에 들고 말수가 적은. 그런 사람이었다. 계기가 있노라고 물어본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의 존재는 물 속에 물감이 퍼지 듯 빠르고 깊숙하게 내게 스며들었으니. 그래도 꼭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날은 그날이었다. 밤 중에 부엌에서 마주치고 조금 지난 날의 아침.
그날은 학교에 갈 준비를 조금 늦게하였다. 지각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기에 급히 집을 나서려는데 바람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겉옷을 찾아 입고 갈까 했지만 시간이 촉박했고 그냥 집을 나서기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해 그래도 지각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발끈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아침 공기가 차."
하는 목소리와 함께 목에 포근한 무엇이 둘러졌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검은 교복에 모자의 챙을 잡고 있는 그가 있었다. 그는 저와 어울리는 쨍한 색의 목도리를 하고 있었는데 날이 춥다며 그것을 내게 두른 것이었다. 나는 약간 어벙벙한 상태로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두번을 돌리고도 길어서 내 배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무어라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데 입은 굳었고 그는 먼저 대문을 나섰다.
아버지가 없이 외동으로 자라 줄곧 여학교에만 다녔던 나는 남자에게서 받은 호의가 몇 되지 않았다. 호의를 보인 남자가 다 좋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런 이유들로 그의 호의는 더욱이 특별했다. 목도리는 포근하고 그와 비슷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세탁 후에 나는 비누 냄새와 약간 알싸한 무언가의 냄새.
내가 감히 예상하건데 그는 그시절부터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은 했지만 가끔 집으로 바로 들어왔을 때 코를 가까이 해보면 코를 자극하는 향이 옅게나마 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저리도 당당하게 피우는데 그시절은 어떻게 숨기며 살았는지.
"밤 공기가 차다."
그는 그가 두르고 있던 가디건을 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저는 저 앞으로 먼저 걸어가는데 어쩜 어릴적과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정하게 굴면서도 저리도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내가 부끄러워하면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여전한 사람이다. 모양과 색만 바뀌었지 포근한 건 그대로인 그의 물건도. 이제 담배 냄새를 제외하면나와 같은 향기가 나고 있지만.
찬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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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길티라고 sns에서 난리난 가난챌린지..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