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00
Written by. 치코
RUHAN x XIUMIN
"미친 새끼. 또 저기서 쳐자고 있어."
한국에서 뉴욕으로 주거지를 옮긴지는 두 달이 채 안됐다. 도피 형식으로 보내진 유학은 달갑지 않았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잘 적응해내고 있었다. 어퍼 이스트 지역 중에서도 골든 코스트라 불리 우는 5th Ave에 살게 된 이유는 단순히 보안 때문이었다. 진저 브래드 하우스라 칭해지는 빌딩 No.45의 값비싼 임대료에도 이곳에 둥지를 튼 건, 어린 시절의 고충이 잔해로 남아서였다. 어디서든 몸을 건사하는 일이 습관으로 굳어져 버려, 밤이 되면 불안해 한다는 것을 부모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민석은 어퍼 이스트의 정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집 가까이엔 세인트 패트릭 성당과 센트럴 파크가 있었고, 오물과 쓰레기로 난무한 뉴욕의 거리에 비해 깨끗한 점도 좋았다. 재학 중인 세인트 버나드 스쿨과도 지하철을 타면 한 번에 가기에 교통편도 괜찮았다.
"Hey, Hey!"
조기 교육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민석은 적절한 본보기였다. 미국에 온 지 겨우 5주가 막 지난 신참 뉴요커는 언어의 장벽을 무시할 수 없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남자는 감싸고 있던 무릎에 얼굴을 더욱 깊이 묻었다. 깨기는커녕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술주정을 부리는 양키를 한 대 쥐어 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긴 미국이었다. 가뜩이나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뻗어있는 남자에 심기를 건드려봤자 총 밖에 더 맞을까 싶었다. 처량한 저 모습은 분명 시련을 당한 사람의 것이다. 그러니 매번 알코올에 찌들어 문 앞에 기대있지! 그 철저한 보안도 뚫고 문 앞을 지키는 남자의 집착이 새삼 무서웠다. 괜히 코 꿰일라. 자리를 뜨려던 민석이 다시 뒤를 돌아봤다.
잠에 취해있는 남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눈치를 보던 민석이 매고 있던 백팩에서 포스트 잇과 펜을 꺼내들었다. 평평한 벽면에 기대 메시지를 남겼다. 모국어로 꽉 찬 종이가 뿌듯했다. 애국심은 바로 이런거라며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빽빽한 문장에 간간히 이모티콘을 넣었다. 어차피 내 의도나 내용을 파악하지도 못 할텐데, 이모티콘을 보고 대충 호감의 표시로 보지 않을까. 영어로 항의글 넣었다가 정말로 대가리에 총 맞으면 어떡해! 어차피 영어로는 쓰지도 못 하지만. 프론트 누나에게 크레임을 걸면 그만이나 그것도 막상 귀찮았다.
장난스레 남긴 종이를 한 장 떼어내 입에 물고 펜과 포스트잇을 가방에 넣었다. 옆집 사람이 잘 볼 수 있게 도어 한 가운데에 붙이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음번에도 이러고 있으면 그 땐 정말 데스크 누나한테 일러야지. 민석은 제가 맞는 일을 했다고 끄덕이며 한 블록 옆에 있는 문 앞에 섰다. 8자리의 보안키를 누르고 지문을 인식시키자 곧 알림 음이 울렸다. 문을 여는 손짓에 경쾌함이 어렸다. 사람의 움직임을 센서로 감지해 조명의 명암을 조절하는 식의 복도는, 민석의 퇴장으로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슥한 복도엔 술에 쩔은 잔챙이만 남아있었다.
집에 들어온 민석이 신발을 휙휙 벗어재끼곤 침대로 직행했다. 늘어지듯 엎어진 몸에 시트를 휘감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여러 생각이 떠오르려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앞발로 밀고 들어온 만두가 민석을 반기려 침대에 껑충 올랐다. 육중한 무게에 윽- 소리를 내자 좋다고 얼굴을 핥았다. 대충 얼굴을 부벼주고,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만두를 밀어냈다. 내려가, 이 새끼야. 은근슬쩍 올라오네. 개털을 들이마시며 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펫 위에 조용히 앉은 만두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스피츠 종인 만두는 장모인 탓에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털이 빠졌다. 새끼였을 땐 데리고 자도 괜찮았는데….
새하얀 털로 감싸진 만두의 꼬리를 살살 만져주자, 콧바람을 훅 내뱉곤 카펫에 배를 뉘었다. 잠잠해진 공간에, 머릿속에선 여러 얼굴들이 스쳤다. 개중엔 채드의 얼굴도 있었다.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졌다. 채드에게 품은 민석의 감정은 철저한 경멸이었다. 새학기가 개강된 첫 날부터 민석은 놀림감으로 전락됐다. 교내의 트러블 메이커인 채드가 민석을 곱게 보지 않아서였는데, 그 이유는 동양인이라는 것에 있었다. 미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립학교인 탓에 백인 우월주의가 심했다.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대화로 민석을 조롱하는 채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멍청한 코쟁이새끼를 감당해야 할 내일에 피곤해졌다. 집에서까지 시달릴 필요는 없겠지. 축축 쳐지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기어가듯 옷장 앞에 서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꺼내 들었다. 씻고 심슨봐야지. 아, 피곤해. 벽난로 위에 붙은 시계는 11시를 가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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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슬으슬 떨리는 몸과 뻐근하다 못 해 감각이 없는 허리에 잠이 깼다. 불편한 자세로 얼마나 복도에 굴렀는지 모를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인사불성이 된 루한을 문 앞에 내버려두고 갔을 직원들이 떠올랐다. 잔뜩 먹여논게 누군데…. 이를 부득부득 갈며 차가운 복도에서 몸을 일으켰다. 굽혀져 있던 무릎이 제 구실을 못하고 휘청거렸다. 대충 벽면을 짚어 몸을 세운 루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어깨를 앞 뒤로 돌렸다. 왁스로 굳은 머리를 헤집곤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4시가 갓 지나있었다.
높지도 않은 주량에 보드카를 술술 넘긴 탓에 몸이 잔뜩 둔해졌다. 직원들한테 집 패스워드라도 뿌려야 하는건가. 루한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문 앞에 섰다. 넥타이를 끌어내리며 패스워드를 입력하던 중 낯선 종이가 눈에 띄었다. 뭐야. 중앙에 붙어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떼어낸 루한이 눈을 가늘게 떠 내용을 확인했다. 적힌 글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어였다. 동글한 글씨가 적힌 내용에 루한이 인상을 찡그렸다.
'1504호 문 앞에 취객 무서워서 집을 못 오겠거든요. 그러다 난동이라도 부리면 어떡해요? :) 그러고 술까지 취해서 몇 날 며칠 앞에서 자고 있던데. 싫으시면 선을 확실하게 그으셔야죠! <3 여자가 줏대도 없이 정말. 무튼 조취 바람. :^) ' 취객? 난동? 여자? 제 술버릇이 고약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니고 집 앞에 기대 그저 잠만 잤을거다. 또 1504호에 동양인 남자가 산다는 걸 모르는 같은 층 주민은 거의 없다.
간간히 섞인 이모티콘과 내용이 부조화를 이뤘다. 장난치는건가. 루한은 곧 쓸 때 없이 뻣뻣한 종이를 사정없이 구겼다. 눈을 조금 붙인 후에 바로 출근을 해야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손이 느릿했다. 그런데 이 빌딩에 한국인 살았었나? 입주 한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동양인이라면 친해질 의사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쪽지에 남겨진 내용은 저에 대해 완벽히 오해한 사람의 것이었다. 루한은 귀찮은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곧 락커가 해제되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닫힌 문에 복도가 어두워졌다.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