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총] 범죄 B
*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죽고 싶어. 죽고 싶은데 아직 죽을 수가 없어. 너는 내 말 믿어줄 거지? 설마 변백현 말 믿는 거 아니지?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난 결백해. 내가 죽인 게 아니란 말이야. 제발. 반성도 많이 했어. 이만하면 그만 괴롭힐 때도 됐잖아. 밤마다 꿈에 박찬열이 나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나한테 말한다고. 왜 그랬어? 이렇게. 눈을 뜨면 내 방이야. 꿈에서 깬 줄 알고 안심하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내 곁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느껴져. 옆을 보면 얼굴 반쪽이 날아가서 속이 훤히 보이는 박찬열이 있어. 그리고 날 노려봐. 미치겠다고 나도.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난 그저 하라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야.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다 변백현 그 새끼가 꾸민 짓이야.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다 계획한 일이라고. 뭐야? 너도 안 믿는 거야? 너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 그렇지. 씨발. 그럴 줄 알았어. 그래. 지금까지 날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거지? 개새끼야. 진정하라고? 날 믿는다고?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좆같아.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다 없애버리고 싶어. 기회만 된다면, 변백현 얼굴 반쪽도 마저 날려버리고 싶어. 그 나불거리던 아가리. 확 찢어발기고 싶다.
씨발. 너 나 믿지?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진짜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알지? 너 나 옆에서 많이 지켜봤잖아. 나랑 같이 지냈던 만큼 변백현이랑도 지내봤잖아. 내가 그럴 사람이야? 내가 박찬열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변백현이지. 그렇지. 내가 아니라 변백현이 그랬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그렇다고 대답해, 개년아. 어, 그래. 진정했어. 진정했지. 아까부터 쭉 진정해 있었어. 너도 알잖아. 응. 말해달라고? 그 날 일을? 그래. 말해줄게. 넌 나 믿으니까, 너만 알고 있어. 어디 가서 말 안 할 거지? 하기만 해 봐. 변백현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 알겠어? 알겠냐고. 녹음기 같은 거 없지? 주머니 털어봐. 음, 됐어. 없네. 좋아. 거기 앉아.
시작은, 그래. 시작은 변백현이었어. 그 개 같은 새끼가 내 인생을 망친 거야. 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아주 작정을 한 거라고. 변백현이랑 박찬열이랑 오세훈이랑 같이 밥 먹는 걸 어쩌다가 보게 됐어. 오세훈.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믿을래? 그리고 오세훈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박찬열이 얼마나 좆같았는지, 넌 모르겠지. 그래도 숨기려고 했어. 난 숨길 수 있었어. 박찬열이랑 있는 세훈이가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것만 바라봐도 괜찮았다고. 난 애인 있는 사람을 건드릴 만큼 더러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변백현은 아니었어. 변백현은 내가 오세훈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더라고? 그리고 매일 나를 유혹했어. 진짜 보고만 있어도 좋아? 네가 옆으로 가고 싶지 않아? 박찬열 때문에 세훈이가 너를 안 보잖아. 박찬열만 없으면 너도 기회가 생기는 거야……. 그리고 난 흔들렸어. 그 표정 뭐야? 내가 한심해? 내 말이 웃겨? 너 지금 내가 우습구나. 아니야? 아니라고, 씨발년아. 애초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너 내 약점 잡으려고 말해달라고 한 거지?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어. ……어! 미안. 미안해. 실수로 그런 거야. 머리에서 피 나네. 왜 헨드폰이 하필 거기 있어서. 일부러 던진 건 아니었어. 내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휴지 줄게. 피가 별로 안 나서 다행이다. 이게 다 변백현 때문이야. 변백현이 날 망쳐놓은 거야. 괜찮으니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라고? 알겠어. 미안해. 많이 아파? 괜찮지?
그래. 하여튼 난 흔들렸고 그 이후로 변백현이랑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어. 그래도 난 살인 같은 범죄를 생각한 적은 없었어. 맹세코, 한 번도 박찬열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그 후로 변백현이랑 만나면 박찬열 욕을 온종일 했어. 날이 갈수록 욕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처음에는 나쁜 놈, 부러운 새끼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씨발새끼, 죽이고 싶다, 강에 내던져도 시원찮을 년이 돼 있더라. 그래도 괜찮았어.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안 했잖아? 박찬열이랑 오세훈 앞에서는 우리 둘 다 얌전하고 착한 친구들이 됐잖아. 아무 문제 없잖아? 몰래 그런 건데 뭐 어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 욕을 시원하게 하고 나면 저런 식으로 합리화를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어쩌다 보니까 변백현네 집에서 영화를 보게 됐는데, 잔인하다고 소문이 난 영화더라고. 그땐 술도 좀 마셨고, 정신도 몽롱하고. 제정신이 아니었지. 한 마디로. 변백현도 그랬냐고? 음. 취했었지. 취한 것 같았지. 정확히 말하자면 변백현은 취한 척을 했어. TV에서는 마침 살인범이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장면이 나왔고, 나는 역겨웠지만, 꾹 참고 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변백현은 어떨지 궁금해서 옆을 봤는데, 걔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무표정이었냐고? 웃고 있었냐고? 둘 다 아니야. 차라리 둘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미친. 그 미친놈은 날 보고 있었어.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고. 순간 소름이 확 끼쳐서 집에 간다고 일어나는데 변백현이 말을 걸었어. 종인아, 우리도 한 번 해볼래. 오세훈 갖고 싶지, 라고. 뭔 개소리냐고 하고 현관까지 나갔는데 변백현이 발목을 갑자기 확 잡아채는 거야. 진짜 미친 새끼가 따로 없었지. 그러더니 나보고 뭐라 했냐면……. 생각 중이야. 그래. 생각났다. 겁만 주자고. 그러면 박찬열도 알아서 오세훈이랑 헤어질 거라고. 몰래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 존나 웃긴 건 내가 그 말에 혹했다는 거지.
그리고 다음 날, 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아까 말했잖아. 술 때문에 그런 거라고. 술이 깨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그런데 그 날 밤 변백현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 종인아, 지금이 기회야. 그러면서 가방에 있는 망치를 꺼내서 보여주더라. 망치가 가로등 빛을 받아서 번쩍거리는데. 아, 뭔가 잘못됐구나 하고 느꼈지. 그때 변백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좀 따라가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갑자기 화를 내더라. 이 새끼 병신이네. 너 오세훈 안 좋아하지? 앞말은 참을 수 있었는데 뒷말은 못 참겠더라. 내가 오세훈을 안 좋아한다고? 기가 찼단 말이지. 너무 화가 나서 변백현 멱살을 잡고 온갖 욕을 다 했어. 변백현은 그걸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날 달래기 시작했어. 종인아. 괜찮아. 겁만 주고 오는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빨리 가자. 기다리고 있다가 박찬열 오면 이걸로 살짝 치면 돼. 그러면 쓰러지기만 하고 죽지도 않아. 상처도 안 날 걸. 응? 종인아. 너 나 따라올 거잖아. 그렇지? ……그 말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더라.
결국, 변백현을 따라 나섰어. 박찬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안 했고. 그냥 걷기만 했지. 변백현은 묘하게 신 나 보이기까지 했어. 한 시간을 걷고 나서야 박찬열 집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허름하더라. 하도 멋을 내고 다니길래 존나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보안도 허술하고. 열쇠 찾는 건 일도 아니었어. 집 앞 화분 밑에 있었으니까. 열쇠는 문을 따고 다시 화분 밑에 넣어뒀어. 그리고 집 문을 잠그고 나니까, 갑자기 냉기가 확 올라오더라. 진짜 더럽게 추웠어. 그렇게 추웠는데도 이마랑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변백현은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뒤지더니 다시 현관으로 와서 보조등을 부쉈어. 그러고는 신이 나서 지 혼자 지껄여댔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했고. 여기 문 뒤에 서 있는 거야. 박찬열이 들어오면 보조등이 안 들어오니까 스위치를 켜려고 거실 쪽으로 가서 더듬거릴 거고, 그때 살짝 내리치면 돼. 네가 내리쳐. 내가 신호 줄 테니까. 저렇게 계획을 말해주는데 시발, 영화에서 나온 살인범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어. 게다가 나한테 내리치라니? 갑자기 저런 개소리를 하니까 정신이 빠지데.
20분쯤 서 있었나, 밖에서 화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나는 거야.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어. 1초가 1년 같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박찬열이 들어왔어. 난 공황상태여서 도저히 망치로 뭘 할 처지가 아니었어. 박찬열이 벽을 더듬거리면서 스위치를 찾았고, 변백현은 내 손에 있던 망치를 빼서 그대로 박찬열의 머리를 내리쳤어. 살짝 칠 거라고 했었는데. 무슨 소리가 난 줄 알아?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봤어. 진짜. 소리만 들어도 토할 것 같더라.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사람 한 명이 죽는 소리. 박찬열이 죽는 소리. 난 그대로 주저앉았고 변백현은 망치를 바닥에 던졌어.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봤지. 변백현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쓸모없는 새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했어. 그러고 나서 변백현은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어. 알아들어? 그대로 나를 두고 나가버렸다니까. 한참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이대로 있으면 내가 꼼짝없이 뒤집어쓰겠구나. 앉은 채로 박찬열 옆으로 기어갔어. 바닥은 피로 흥건했고, 죽은 박찬열한테 애도를 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박찬열이 눈을 번쩍 떴어. 너무 놀라서 비명도 안 나오더라. 그 큰 눈알이 쏟아질 것 마냥 이리저리 구르다가 나한테서 멈추는데,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니까. 박찬열이 날 봤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다는 뜻이야. 이대로 박찬열을 두고 가면 내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잖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애초에 변백현이 노린 게 이거였을 거야. 그 새끼의 속셈에 놀아난 나를 원망하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치를 집었어. 박찬열의 눈이 나를 향했다가, 망치로 향했고. 나는 박찬열의 눈을 그대로 내리쳤어. 생소한 감각에 너무 놀라서 두세 번 더 내리쳤던 것 같아. 사실 모르겠어. 두세 번보다 더 많이 내리쳤을 수도 있고. 망치를 내려놓고 박찬열의 얼굴을 다시 봤는데, 처음치고는 좀 잘 처리한 것 같았어. 나 자신이 잠깐 자랑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나는 망치를 가방에 넣고 집을 뛰쳐나왔어. 우리 집까지 가는데 알 수 없는 전율 때문에 몸이 떨리더라. 뛰어가는데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어. 얼굴에 닿는 눈을 느끼고 나서야 뛰는 걸 멈췄어. 맞는 눈 하나하나가 뜨겁더라. 온몸이 땀범벅이었고 옷에는 시커먼 피가 묻어있었고. 꼴이 말이 아니었지. 집에 오자마자 망치를 씻었어. 피는 뜨거운 물에 녹아서 금방 없어졌는데 알 수 없는 찌꺼기들이 잘 안 떨어지더라. 수세미로 긁으니까 떨어지더라고. 아직 수세미에 껴있을지도 모르겠네. 그게 끝이야.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시작은 변백현이었어. 너도 이제 내 결백 믿을 수 있지? 뭐라고? 물 켠 건 왜 말 안 해주냐고? 무슨 물? 박찬열네 집이 온통 물바다였다고? 변백현이 고맙다고 전해달라 했다고? 씨발. 무슨 개소리야. 더 말할 것도 없어. 없다고. 난 미친. 수도꼭지를 건든 적도 없어. 난 물 켜고 간 적 없다고. 미친. 어떤 새끼야. 너야? 너냐고? 미쳤어. 미쳤지. 나가. 결국 너도 변백현이랑 한패지? 나가, 씨발새끼야. 미친. 난 물 켠 적 없단 말이야. 난 박찬열만 죽였다고. 아니지. 내가 죽인 게 아니지. 너도 다 들었잖아. 내 탓 아닌 거. 이게 다 변백현, 변백현 때문이야. 그 이후로 오세훈 털끝 하나도 못 봤어. 날 이용한 거야. 물? 물이 뭐가 중요해. 변백현이 켰겠지. 아니라고?
그럼 누가 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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