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종대는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기내방송에 안대를 벗고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자신의 짐을 챙겨 바쁘게들 기내를 빠져나갔다. 종대도 기지개를 한 번 키고 장시간 비행에 굳은 몸을 일으켰다. 백팩을 메고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온 종대는 눌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스냅백을 고쳐 썼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 땅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김종대!"
반가운 목소리에 종대가 주위를 둘러봤다. 어렵지 않게 금방 익숙한 얼굴들을 찾을 수 있었다.
"변백현!"
백현이 크게 팔을 벌렸고 종대가 그대로 뛰어가 안겼다. 키가 비슷한 다큰 남자애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이 퍽 웃겼지만 지난 학기 내내 종대가 바빴던 터라 방학 때 들어오지 못해 6개월 만에 본 둘은 한참을 애틋하게 안고 있었다.
"좀 떨어져라, 떨어져. 누가 보면 오해할라."
민석이 둘을 떨어뜨리자 백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민석을 봤다.
"민석이도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종대가 백현과 떨어지자마자 민석을 끌어안았다. 종대보다 조금 작은 민석은 종대를 밀어내기 위해 끙끙댔다.
"와, 동생은 안중에도 없지?"
"쫑따!"
찬녀리!
종대가 민석을 놓고 찬열에게 달려가 안겼다. 종대보다 머리통하나는 큰 터라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은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반가움에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기요. 분위기 좋은데 죄송한데요. 니 동생이 니 캐리어 가지고 왔거든요?"
종인이 작게 툴툴대자 종대가 헤헤 웃으며 종인에게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동생 못 본새 더 까매졌어!
"아, 까만 거 아니거든!"
"까만 애다 까만 애."
백현이 낄낄대며 종대를 거들었다. 찬열도 종인을 놀리는데 가담했고 졸지에 비글즈의 먹이가 된 종인은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종대의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1.
백현과 찬열은 주말동안 본가에 있다가 종대와 함께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종대도 오랜만에 집에 오기도 했고 피곤하기도해서 바로 본가로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갑작스런 가족모임으로 호출된 탓에 집에 짐만 두고 다시 민석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웠던 가족들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려던 계획이 무산된 턱에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어머, 종대 오랜만이다."
완전 어른 다 됐네. 요만하던 꼬맹이가.
언제나 눈가가 멍든 것 처럼 퍼렇고 쥐잡아먹은 듯한 부담스러운 화장을 고집하는 큰고모의 화장품 냄새가 그리 달갑지 않았으나 어색히 웃어보였다. 큰고모의 옆에는 새로 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기껏해야 종대보다 열 살이나 많을까. 스무 살에 남자 오메가와 결혼했던 큰고모는 애를 둘 낳고 그 남자와 이혼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넘치는 페로몬을 주체하지 못해 매번 볼 때마다 애인이 바꿔있었다.
종대와 종인이 민석의 옆으로 가서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준면이형도 있었다. 다른 고모들은 시간이 안돼서 오지 못한 저녁식사는 의외로 조용했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맞다, 오빠 아직 민석이한테 말 안했지?"
식사시간 마저 수다스러운 큰고모가 소란스럽게 말했다. 종대는 고모의 입에서 나오는 민석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큰고모에게 눈치를 줬다. 큰엄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늘 무표정이던 큰아빠의 얼굴은 굳어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밥, 다 먹고 따로 얘기하지."
저녁식사 내내 분위기는 물먹은 솜뭉치마냥 무거웠다.
2.
민석은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체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던가? 잔뜩 긴장한 체 밥을 먹은 탓에 속이 더부룩한 것이 저녁이 체한듯 싶었다.
똑똑.
'들어오너라.'
민석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대답이 들렸다.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가자 쇼파에 앉아 계시는ㅡ여전히 무거운 표정의ㅡ아버지와 그 옆에 앉아계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민석이 어머니의 맡은 편에 앉았다. 그 때까지도 민석은 제가 잘못한 것을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민석아."
"예?"
놀란 탓에 조금 높은 목소리가 나왔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꾸짖는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아 안심한 민석이 다시 조용히 대답을 했다. 아버지는 민석 또래 정도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년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버릇없어 보일까 뒷말은 삼킨 민석이 아버지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너랑 결혼할 알파다."
네?
민석은 저도 모르게 놀라 큰소리를 냈다. 갑작스런 결혼통보에 할 말을 잃은 민석이 사진을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민석은 단번에 이것이 정략결혼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하, 하지만…."
"결혼은 네가 성인이 된 후에야 정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8월에 약혼식을 진행할까 하는데, 괜찮으냐?
민석은 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그 날로 하겠다며 민석을 돌려보냈다. 서재에서 나온 민석은 아직도 멍했다. 손에 들린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도 민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3.
"뭐?"
종대가 과일을 먹다말고 엄마한테 되물었다. 옆에 종인도 씹는 것도 잃은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민석이형 결혼한다고?"
종인의 물음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 채 서재 쪽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큰고모는 애인을 바래다준다며 잠깐 나간 터라 거실에는 종대네 가족뿐이었다.
"민석이 아직 미성년자잖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갑자기?
종대는 서재에서 문 열리는 소리에 입에 과일을 쑤셔 넣고 서재 앞으로 달려갔다. 멍한 표정의 민석을 보니 엄마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민, 석아…."
종대의 부름에도 여전히 멍한 민석을 보니 어렸을 때부터 민석을 보며 막연히 느껴왔던 동정심에 목이 매였다. 자유롭던 종대와 달리 어렸을 적부터 엄격한 집안에 매여 살았던 민석이 늘 불쌍했었다.
"민석아...."
민석이 힘없이 제방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종대가 따라가려했으나 종인이 혼자 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종대를 잡았다.
"어머, 집안이 왜 이렇게 조용해?"
지나치게 가볍고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4.
민석은 제 결혼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따로 애인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로얄알파 집안의 우성오메가들, 특히 남자오메가들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일이 흔했다. 물론,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니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애인 한 번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막연히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과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 막연히 상상해오던 행복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에 속이 쓰렸다. 아랫배도 살살 아파오고 속이 메스꺼운 것이 아까 저녁이 체해도 단단히 체한 것 같았다. 민석은 힘없이 침대 위에 누웠다. 허벅지 쪽의 까끌까끌한 느낌에 주머니에 쑤셔 넣어 놓았던 사진을 꺼냈다. 꼬깃꼬깃 구겨져버린 사진 속에는 민석 또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밝게 웃고 있었다. 결국에 민석은 이 소년과 결혼을 할 것이고 그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략결혼의 최종목표가 달성되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깰 수 없는 불가침조약이 되는 셈. 민석은 일찌감치 반항은 포기했다. 아니, 민석이 할 수 있는 일의 카테고리에 반항이나 거부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민석은 제 몸을 감싸는 포근한 느낌에 몸이 나른해졌다. 이 소년도 원하지 않는 결혼일 텐데, 상대가 거부하기까지 한다면 비참하기까지 할 것이다.
민석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5.
종대는 오랜만에 누워보는 제 침대가 낯설었다. 이제 키 큰 양키들과는 안녕이구나! 종대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3년간의 유학생활을 곱씹었다. 거기서 만난 덩치 큰 프레드, 처음 만났을 때 인상 때문에 무서운 사람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박한 친구였다. 그러고 보니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늑대인간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종대가 유학 간지 얼마 안됐을 때 개봉한 영화였다. 누구랑 그 영화를 봤더라? 아, 빨간 머리의 스티브! 저와 키도 비슷하고 꽤 잘 맞는 친구였다. 백현에게도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종대는 스티브가 한국에 와 보고 싶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다음에 초대해야지. 종대는 단 십 분만에 편안해져버린 제 침대에서 뒹굴 거렸다. 편안하다 집에 오니까.
종대는 반쯤 잠들었다가 갑작스런 전화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 열두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하는 센스 없는 인간이 누굴까. 누구긴 누구야 변백현이지.
"아 왜애ㅡ. 뭐? 오랜만에 감질맛나게 봤더니 아주 보고싶어 죽겠냐?"
- 뭐라 멍멍거리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웃음기 가득한 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누구보고 멍멍거린다는거야. 강아지마냥 순하게 생겨서 종대가 백현을 자주 놀리던 말이었다. 우리 배큥이 멍멍거려요?
"얘는 또 왜 멍멍거리실까. 왜 전화했어."
나 잠들었다가 깼단말야. 나 다시 잠들기힘든데.
종대의 투정에 백현의 작게 웃었다. 종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무슨말을 해도 다 좋아죽네. 백현을 놀리는 재미가 없어졌다.
-야 잠깼으면 나와. 집 앞이야.
"이 시간에? 지금 새벽 열두시란다 친구야."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집 앞이란 말이야? 같은 아파트에 살긴 하나 종대는 가장 안쪽에 있는 105동이었고 백현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102동이었다. 같은 아파트라도 단지가 꽤 넓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오빠가 맛난 거 사줄 테니까 그냥 나오세요, 좀?
"어이구, 우리 배큥이 또 멍멍거리네. 안에 들어와서 기다려라. 춥다."
금방 나갈게.
종대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흰 티셔츠위에 빨간색 카라티를 껴입었다. 바지는 츄리닝 반바지였지만 14년 지기 못 볼꼴 다본 친구에게 차릴 수 있는 최대의 격식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뭐.
6.
백현은 종대가 유학 중일 때도 종인을 보러 자주 들락날락 했던 터라 익숙하게 중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알파와 오메가, 얼핏 들어도 섹슈얼한 조합이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친구가 되는 것이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요즘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얼핏 보기엔 오메가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것 같아보였지만, 차별은 사라져도 편견은 남아있었다. 백현은 오메가 또한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개방적인 집 안 분위기 탓에 종대와 친해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도 친구사이가 될 수 있다.
백현은 16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내고 난리야."
종대가 툴툴대며 말했다. 툴툴대는 말투와 달리 입 꼬리가 잔뜩 올라가있었다.
"거 참, 오늘따라 달이 밝은 것이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런다."
"그럼 네 애인을 불러내시지 왜 나를 불러내시고 지랄이셔요?"
내가 네 애인이야? 종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백현이 종대의 어깨에 오른쪽 팔을 두르며 낄낄 웃었다.
"내가 애인이 어디 있겠냐."
백현이 바지주머니에 왼쪽 손을 넣고 편의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대와 백현은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아파트 단지 내에 놀이터로 향했다. 다른 105동 뒤쪽에 있는 이곳은 최근에 새로 지은 다른 놀이터들과는 달리 매우 낡아있었다. 종대는 자연스럽게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앉았고 백현도 그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다 큰 남자애 둘이 안기에는 비좁은 공간이었으나 종대와 백현을 습관처럼 그 곳을 고집했다. 녹슬어버린 미끄럼틀 위에 6년쯤 전에 쓰여 진 낙서도 그대로였다. 찬열이 우스갯 소리로 변백현은 하다못해 김종대의 속옷취향까지 알 것이라고 할 정도로 백현은 종대를 잘알았다. 하루에도 수십번 오락가락하는 종대의 기분을 가장 잘 컨트롤하는 것도 백현이었다. 그런 백현의 눈에 종대는 아까 공항에서의 한껏 들뜬 모습과 달리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어?"
꼼지락 대며 쭈쭈바만 빨던 종대에게 백현이 물었다.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만 만지작대던 종대가 입을 열었다.
"민석이 결혼한대."
백현은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으나 잠잠히 종대의 말에 집중했다.
"그것도 M그룹 막내아들내미랑."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니 뭐라 말도 못 붙이겠더라. 김민석 그 멍청한게 찍소리도 못하고 축쳐서 나오는데….
종대는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간간히 목이 메는 듯 잠긴 목소리였다.
"우리 민석이 어떡하면 좋을까…."
오지랖 넓은 걸로는 태평양 못지않은 김종대의 아픈 손가락 김민석. 둘은 거의 친형제처럼 컸지만 판이하게 다른 집안 환경덕에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민석은 종대를 걱정하면서도 동경했고, 종대도 민석을 걱정하면서도 동정했다. 종대가 고개를 떨궜다. 백현이 그런 종대를 끌어안자 종대가 백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는 않았으나 민석이 앓아야할 감정들을 대신 앓는 종대의 숨소리가 얇게 떨렸다. 백현이 가만히 규칙적으로 종대의 등을 토닥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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