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욕망이 가득한 제 아가리를 쳐들고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시상에, 무슨 불이 저리 크게 났디야. 사람들의 말소리가 의미 없는 웅성거림이 되어 내 귓가를 울렸다. 누군가가 119를 불렀는지, 새빨간 소방차가 굉음을 내며 내 앞에 도착했다. 비키세요!! 위험합니다!! 소방관이 나를 밀치고 이미 거의 다 타버려 뼈대만 남은 집으로 뛰쳐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방관들은 검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두 구의 시체를 끌고 집 밖에 나왔다. 조금 작은 것은 엄마고, 큰 것은 아빠일까? 낄낄. 웃음이 나와서 그냥 웃었다. 그러다 들것에 실려 내 옆을 지나치는 시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화마는 지독하게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집도, 가족도, 추억도, 시간도. 모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물의 형태
w. 무냑
"관린님, 4황자님이 인간을 데려오셨습니다."
"..애송이 녀석. 쓸데없는 짓을.."
관린은 큰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아직 제 힘을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황제 즉위식이 앞당겨지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불리한 일이었다. 관린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지성을 쳐다보았다. 지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를 더 덧붙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지성은 뱀처럼 웃었다. 화(火)의 가문이 권세를 잡아야, 저 또한 불타오르지 않겠습니까? 시꺼먼 속내는 삼킨 채로.
"대면식은."
"반려가 되실 분의 체력이 약해, 3일 후로 미뤄졌습니다."
3일.. 3일 후라.. 관린은 초초하게 손톱을 물어뜯다 일순간 얼굴에 그런 기색을 싹 지워버렸다. 만나러 가야겠구나.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제 어미를 닮아 매혹적이고 화려한 미소만이 남았다.
-
"일어나세요."
유화의 부름에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대휘가 준 목걸이로 움직임이 수월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물속은 물속이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체력 소모가 심해서, 나는 병자처럼 몇 시간을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유화의 말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다시 잠에 들고. 잠에 들면 또다시 내가 물에 빠지기 전의 꿈을 꾼다.
"내가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이곳은 햇빛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며칠이 지났는지, 어느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유화는 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당신들의 시간으로는, 이틀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식사는 다 마치셨습니까? 유화는 그리 말하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렇게 적게 드시면, 수면에 지장이 있습니다.
"수면에 지장이라뇨."
"그것이.. 대면식 이전까지는 아무런 힘도 받지 못하시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식사에 수면제를 넣었습니다."
"아..."
내 탄식에 유화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 행동이 내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넣지 말까요? 나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채비를 했다. 잠시만, 어딜 가시게요..? 유화는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황급히 나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유화는 입술을 지긋이 감쳐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멀리 가시면 아니 됩니다.
물속은 고요하다. 가끔씩 지나가던 인어들이 내 두 다리를 보고 흠칫 놀라 고개를 숙이는 것만 빼면, 궁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그 속을 헤매며 헤엄치기만 하다가, 금이 잔뜩 가버린 작은 창문을 발견하였다. 아마 구석진 곳에 있어 아무도 수리할 생각을 하지 못한 듯싶었다. 툭,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보자, 파사삭- 창문은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유리조각들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다가, 센 물살에 휘말려 사라져버렸다. 저것이 바로 유화가 경고했던 해류 같았다.
나는 깨진 창문 틈으로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본 궁은 꽤나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바닷속이니만큼 어두워 그 형체가 흐릿했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창문 난간을 위태롭게 부여잡고 유리조각을 삼킨 해류를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과 해초가 헤엄을 치는 건지 쓸려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그곳을 지나간다.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그런 풍경. 이것조차, 꿈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기나긴 악몽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여기서 깨면 나는 다시 하굣길로 돌아가,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방에 올라와 책을 펴고…
깨어나야겠다. 나는 잡고 있던 난간을 내 의지로 놓아버렸다. 두둥실, 떠오르나 싶던 내 몸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류가 점점 가까워진다. 가까이서 본 해류는 조금 더 죽음을 닮아있었다. 큰 물고기들은 제 헤엄을 통제하지 못해 이리저리 휩쓸리고, 작은 물고기들은 이미 몸체가 갈가리 찢겨 뼛조각만 나뒹굴고 있었다. 나도 저기에 휩쓸리면 몸이 찢기려나. 무섭지는 않았다. 빨리 꿈에서 깨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손끝이 물의 흐름에 닿으려던 그 순간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그리고, 누군가가 내 허리를 낚아챘다.
-
K
그곳을 지나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끔씩 궁이 답답할 때, 시종들 몰래 드나들던 외진 곳의 창문을 어떤 멍청이가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화가 나기도 잠시, 옅은 피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생전 맡아 본 적 없는 기묘한 향이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이런 묘한 피 냄새를 풍기는 이는 누굴까, 궁금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을 지나쳤다. 아직 난간에 붙어있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의 끝에는 채 흩어지지 못한 혈흔이 걸려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추락하는 흰 형체를 발견했다.
"저 미친..."
절로 욕이 나왔다. 여인이 빨려 들어가는 해류는 사(死)류라는 악칭이 붙을 만큼 악독한 것이었다. 저리 내버려 두면 필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여인을 뒤쫓아,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었다.
언제부터, 아랫것들의 목숨을 그리 귀히 여겼다고.. 제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의문은 여인의 두 다리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얼굴에 처연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는 한바탕 호통을 치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나지막하게 속삭일 뿐이었다.
"웃고..있었어요.."
대휘가 데려왔다던 인간 여자인가.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었다. 악독하게도, 그의 눈에는 그 모습이 퍽 아름답게 보였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아, 너는 정말로 이 세상 것이 아니구나.
"가져야겠다."
그는 깨진 창문 파편에 깊게 베인 그녀의 손목을 핥다가, 이내 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묘한 혈향이 저 말고 또 다른 이를 홀릴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