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어.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비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더니,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온다. 지금도.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 가끔 몸에 소름이 돋을 땐 있었는데 오늘은 정도가 좀 심하더라. 편의점에서 급히 우산을 사고 나오는 길에 무심코 옆을 쳐다봤는데, 낙엽이 다 져가고 있었어. 근데 나 올해 낙엽 처음 봐.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는데, 사람들 옷이 다 두껍더라. 나 혼자 반팔 반바지였어. 웃기지? 아니, 별로 웃기진 않나.
아무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영영 여름에 멈춰버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 내 시간도 잘만 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너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따라 죽으려고 했었다. 사실은, 너 살아있는 거 확인한 후에도. 몇 번. 그 정도로 힘들었었어. 근데 이렇게 너 숨쉬고 있는 거 보니까 안 죽길 참 잘 잘했다.
며칠전에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어. 너 치고 도망간 그 개새끼가 잡혔대. 연락받고 바로 뛰쳐나가서 그 개새끼 얼굴을 칼로 난도질 해버리려고 했는데, 참았어. 네 생각이 났거든. 너는 내 이런 모습 알 리가 없잖아. 나는 늘 네 앞에서 온갖 착한 척, 순수한 척 내숭만 떨었으니까. 너한테 예쁨받고 싶어서. 근데 네가 이런 내 더러운 모습을 보면 정말로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그래서 참았어. 이것도 잘했지?
그러니까, 나는 정말 잘 살고 있어. 병신새끼마냥 복수한다고 칼을 갈지도 않았고, 술도 많이 안 마셨고, 담배는 아예 끊었어. 집에 틀어박혀서 폐인처럼 생활하는 것도 몇 달 전에 그만 뒀어. 이제는 나름 친구놈들 몇몇 불러다가 놀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예쁜 것도 많이 보고. 그러면서 살아. 사람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있잖아. 꿈 속은 많이 행복해? 너 원래 뭐 하나 꽂혔다가 금방 질리는 스타일인데, 꿈 속은 어지간히 재밌나 봐.
있잖아. 그 꿈에서는 내가 나와? 난 이런데 넌 이렇게 웃고 있는 거 보면 배알 꼴려서 별로 묻고 싶지는 않은데, 그건 좀 궁금하다.
나온다면 어때? 난 거기서도 지금처럼 못 돼 쳐먹은 새끼야? 아니면, 너한테 잘해주고 있어?
나는 반반이야. 네 꿈 속에 나오는 내가 정말 개새끼라서 네가 아, 더럽다 하고 꿈에서 빨리 깨줬으면 하는 마음 반, 꿈 속의 내가 다정하고, 또 다정한 사람이라 내가 못 해준 사랑까지 다 해줬으면 하는 마음, 반.
있잖아. 여기는 놀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예쁜 것도 정말 많은데, 행복하진 않아.
있잖아. 거기에는 내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네가 없어. 분명 눈에 선하고 만질 수 있는데. 그래서 더 슬프다.
있잖아. 아직도 내가 많이 미워?
나는 이제 네가 미워지려고 그래.
지훈은 핏기없는 손을 잡아 제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개가 쓰다듬을 받으려는 모양새마냥.
"…이제 그만 일어나."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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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온리같은 타임워프물입니다. 생각해둔 구상은 있지만 연재를 할 지 말 지는 미지수,,^^
소박님, 대련님, 녤뭉이님, 토끼풀님, 이수사님 암호닉 신청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힘내서 물의 형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