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준] 다시,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e/f/9/ef95f0f8c9ba0bb83c0356384a8fb4a7.jpg)
[세준] 다시,
이리저리 물집이 잡혀 곧 허물이 벗겨질 것 같은 손에 세훈이 입을 꽁 다물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보기 흉하잖아.
열 손가락을 쫙 편 다음에 앞 뒤로 뒤집어가며 손의 상태를 확인하는 세훈의 모습은 꼭 실망에 가득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차라리 완전히 못썼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건 곧 다시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정도의 화상이었다. 스칠 때마다 아리기만 한것이 완전히 신경이 마비 되었으면 싶었던 세훈의 바람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고통이라는 감각이 생경하다. 바람이 불어도 따끔거리는 그 느낌에 세훈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살갗이 벗겨진 피부는 진물이 나오기 바빴다. 붕대를 여러번 감았음에도 새어나오는 그 누런색의 액체는 보기에도 참 별로였다. 이게 그 뭐였지, 혈장. 주위에서 들은 것만같은 잔지식으로 세훈이 혼자 묻고 답하기 시작했다. 곁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곁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웃어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도, 심지어 미워해주는 사람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세훈의 눈이 멍하게 탁한 색을 담기 시작했다. 흉하게 얼룩덜룩해진 제 손등을 보며 세훈은 생각했다.
아프다,라고.
-
세훈의 상처가 어느정도 아물기 시작했다. 화상 치료를 받으며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아픔 대신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렸던 그 상처들은 이제 없어지기 시작했고 남은것은 바람을 맞아도 간지럽기만 한 새로운 피부였다. 세훈이 제 손등을 이리저리 살폈다. 묘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세훈이 기분 좋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하나도 안 붉어.
붉은 색이 싫었던것은 아니었지만 옛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 잘 한것이 아무것도 없던 옛적으로 돌아간 것 처럼 그 순간이 오버랩 되는 것이 역겨웠다. 희미해진 옛 기억을 되짚어보려던 세훈이 지끈거리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늘 항상 이랬다.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도 무언가 깨닫는것이 있었다.
저가 붉은 색을 싫어하는 이유, 그 안에는 분명 누군가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아마, 자신을 싫어하던 사람일 것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세훈은 짐작이 됐다.
문제는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다행인거라고 주치의는 말했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안심한다는듯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어주던 그의 얼굴은 이렇게나 선명하게 잘만 생각이 나는데, 왜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생각이 나지 않을까. 손을 계속보고 있으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손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남은 잔상이 겹쳐보였었다. 손에 잔뜩 묻어있던 그 붉은색, 아마 피일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뭐였지, 진짜."
기억을 잃고 일어난 후에 생겨난 것은 세훈의 미묘한 변화였다. 앞의 기억들이 몽땅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기억이 없어도 살아갈 순 있으니까. 하지만 어딘가가 이상했다. 괜시리 숨을 쉬고 있는 제 자신이 역겨울 때가 있었고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있는 제 자신이 보기 싫을 때도 많아졌다. 나름 자신있는 몸에 얼굴이었는데, 왜 이렇게 흉하고 못나보이는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아무튼 계속해서 세훈은 그런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죽었으면 하는 기분.
이번에 손도 그랬다. 멍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정말 갑자기 멀쩡하게 꿈틀거리는 제 손가락이 싫어서, 무작정 불에 손을 지져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세훈도 모를 노릇이었다. 마구 비명을 지르며 괴로움을 토했으면서도 결코 불에서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제 구실을 못하도록, 멀쩡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도록. 세훈은 괜히 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세훈이 복잡한 속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_
서서히 돌아올 네 기억에, 너가 조금은 괴로워했으면 좋겠어.
사실은, 숨도 못 쉴만큼 내게 너는 속죄하고 있지만,
정작 너는 네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잖아.
멍청아.
-
꿈을 꿨다. 세훈의 집 거실엔 세훈과 흰 색의 남자가 서있었다. 유난히도 투명한 피부와 순박해보이는 눈, 누구한테 맞은 것인지 붉게 달아올라있는 볼과 터진 입술은 그의 외모를 반감시키는 것 같았다.
한참 거친숨을 내몰아쉬며 화를 죽이려던 세훈이 한심하게 저를 쳐다보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쥔채로 밀어부쳤다. 남자는 곧 땅에 철퍼덕 부딪히며 쓰러지게 되었고 세훈은 그런 남자의 위에 올라타있었다. 남자가 헉,하며 뜻하지 않은 신음을 냈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았다. 괴로워 하며 눈썹을 찡그리는 남자에 세훈이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남자의 목이 힘없이 따라 흔들렸지만 그런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제 화에만 미쳐 소리를 지르는 세훈이었다.
"미친년."
"....."
"씨발, 내가 우스워? 계속해서 경고했잖아. 언젠가 터질거란 걸 왜 몰라, 왜!!!"
"알고 있었어."
"뭐?"
뭐라 그랬어, 씨발년아. 다시 말해봐. 남자의 뺨을 연신 내려치던 세훈이 그렇게 말했다. 다시, 너 정말 다시 말해봐.
남자는 그런 세훈의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은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알고있었다고.라고 답했다. 전부 알고 있었어.
"빨리 터지길 바랬어."
터져서 네가 나를 내쳤으면 좋겠어, 세훈아.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순애보 같은 건 없다. 이런 미친놈에게 어떤 식의 사랑을 주란 말인가, 남자는 결코 마조히스트도 아니었고, 새디스트도 아니었다. 그냥 단지 그 어린날 순수했던 세훈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세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저를 내쳐주었으면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 무엇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표현에 있어 어긋남이 있을뿐 예나지금이나, 지금이 더했으면 더했지 남자에 대한 세훈의 사랑이 덜 해지지는 않았다. 소유하고 싶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누구와도 너가 말을 섞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소한 바램들은 곧 서로를 망가뜨리는 집착으로 변질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날 밤, 세훈의 손은 붉게 물들었다. 아주 붉게, 남자의 모든것을 앗아갈 정도로.
_
세훈이 몸을 일으켰다. 땀으로 흠뻑젖은 제 등과 침대시트가 늦은 새벽 달빛에 비추어 옅게 보였다. 세훈이 당장 침대에서 빠져나와 맨발로 집을 나섰다. 추운 겨울바람에 곧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디든, 어디든 좋으니 자유롭게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다. 너의 소리가 없는곳으로 가야만 했다. 갑자기 상기된 그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것이었다. 내가 후회하는 그 지난날을 모두 잊고 싶었구나. 그래서 나는 기억을 잃었구나.
본능적이게도 나는 너에게 속죄하려 애썼구나.
아파트 복도끝 비상구 계단에 세훈이 웅크려 앉았다. 넓직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만 같더니 곧 세차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기억이 없는 그 와중에도 제 몸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죽어버리라고. 죽어서 속죄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변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제 몸은 죽으라고 소리쳤다. 단순한 자살 중독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젠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얼어붙었는지 살살 아려오는 발끝에 세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아, 아니다. 살아 생전 너를 다정히 불러준 적이 있던가. 잇새사이로 나오는 울음소리에 세훈은 아찔해졌다. 손에 남아있던 그 붉은 잔상은 역시나 피가 맞았다. 계속해서 내게 경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떠오를 그 기억에 조금은 대비해두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대비하지 못했다.
역시나 후회만 남았다. 후회도 하지 못하게, 내 속에서 꽁꽁 감추어두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터져버렸어.
헛된 바램이 하나 있다면,
"...김준면.."
다시, 다시 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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