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오 선배랑은 연락해?"
나노카의 말에 빨대로 컵 바닥을 휘젓던 손을 멈추었다. 바닥에 시럽이 가라앉아 커피 맛이 썼다. 아니. 나는 짧게 대답하고선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대었다.
"아쉽다. 선배가 너 되게 많이 챙겨줬었잖아."
"그 선배 성격이 원래 그래."
"그래도 너한텐 뭔가 특별한 게 있었어."
살풋 웃음이 났다. 그랬었나.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당연히 사귈 줄 알았어. 아니다. 나 포함해서 동아리 애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걸."
"그 정도야?"
"선배가 애들 단체로 챙겨주는 건 흔했어도 누구 한 명만 데려다 주고 그런 건 없었으니까."
매번 데려다 준 것도 아닌데.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린 시절은 이다지 궁핍하지 않았다. 외교관 아버지 밑에서 자라 중고등학교를 조선에선 꽤나 알아주는 명문 사립학교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조선으로 이주해 온 일본인 부모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 곳에 뒷 돈이나 지인 없이 반도인으로 입학한 나는 정말 드문 케이스였다.
일반계 고등학교와 비교하지도 못 할 정도로 학비가 비쌌던 만큼 학교엔 부잣집 애들이 많이 다녔다. 부모 직업군도 천차만별이었다. 경제계, 법조계, 연예계, 심지어 일본 왕세자 첩의 아들까지 우리 학교를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언뜻 스쳐지나가는 정도로만 들었던 게 끝이지만.
그러나 그 서자가 같은 동아리 선배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동아리원끼리 영화관에 가서 각자 보고싶은 걸 보는 게 전부인 동아리에 들었었는데, 여름방학식 바로 전 주에 어떤 선배와 영화가 단 둘이서만 겹친 적이 있었다.
오와다 카츠오.
한 학년 위인 카츠오 선배와는 말은 커녕 인사조차 해본 적도 없었다. 아는 거라곤 그저 집이 엄청 잘산다, 축구를 잘한다, 잘생겼다. 그 정도. 반대로 나는 특별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조금 거리를 둔 채로 같이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했던 생각이 그것이었다. 저 선배가 내 이름은 알까.
북적이던 영화관엔 어느새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엘레베이터에 올라타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하질 않으니 물음이 없는 거겠지.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엘레베이터에 탐과 동시에, 선배가 내게 물었다.
─ 바래다 줄까?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번에 나란 여자애를 믿을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내 나이에게 기대하는 십 대의 생기도 없이 조용하고, 지루하고, 종일 책만 껴안고 사는 나를.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믿었다. 우릴 데리러 온 사람은 일본 황궁 뱃지를 단 경호원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표정을 감추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그는 놀란 내 얼굴을 분명 봤으면서도, 비밀로 해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학교에 소문 났었을 때 큰일 날 뻔 했어. 숨어 살고 있거든. 지금.
뭘까. 이 사람.
멍청하게도,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웃었다.
04. 오와다 카츠오
의사의 인상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성우는 그 이유가 뭘까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안경이 무테로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성우가 먼저 말을 붙였다.
"안경 바꾸셨네요."
의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성우의 치료를 맡은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상태는 제자리였다. 그는 여전히 불을 무서워하고, 악몽을 꾸며, 조선인을 혐오했다.
"한 주 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센터는 병원이라기보단 저택을 개조한 상담소에 가까웠다. 의사는 쇼파에서 일어서서는 부엌에서 차를 내오며 물었다.
"친한 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요?"
의사는 무언가 더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여주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저가 조선인에 대해 극도로 거부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걸 물려고 들겠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고쳐나가길 권유하면서. 그래서 성우는 입을 닫았다. 그게 끝이에요.
"그렇군요."
중국계 정신과 의사인 토모이케 나카야는 성우가 그나마 호감을 가진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서가 첫 번째,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라서가 두 번째.
"저번에 말씀 드렸던 최면 치료, 다음 주로 잡아볼까 합니다."
처음 치료를 의뢰 받았을 때 만났던 고등학생의 성우는 반 쯤 정신이 나간 사람과 같았다. 자신 주위에 누군가 접근하기만 해도 소리를 질러댔고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악몽으로 잠도 세 시간 이상을 못 자서 몸까지 피폐해져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선인, 특히 조선인 사내만 보면 반사적으로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성우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 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최면 유도만 들어가면 눈 앞에 나타나는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중단된 경우만 수차례였다.
불. 불길이 솟고 있다. 조선인 사내가 갇혀있는 그를 향해 화염병을 던진다.
그 날 밤 이후로 나는 김재환을 피했다. 티가 안나려고 노력했지만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그날부로 외출이 잦았고 집에 붙어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곧 서로에게 신경을 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잊었다. 과외하는 집이 그 유명한 스가타 가문인 걸 알면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말릴 것이 분명했다. 김재환도 아마 그것쯤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끼리 친한 사이였으니 외조부께서 항일 단체에 소속돼 있으셨다는 것도 알고 있겠고.
아냐, 김재환은 어차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타입은 아니다.
주말 내내 과외를 그만두지 않고도 스트레스를 적게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대충 하는 것. 어차피 개강하고 바로 그만 둘 거라면 그 자식이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뿐해졌다.
간만에 와서 그런지 2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복도에서부터 그와 마주치지 않길 바랬다.
"아사코 씨. 오셨어요?"
다행히 그 위엔 그가 아닌 가정부가 있었다. 목소리는 나를 반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어딘가 난처해보였다. 나는 그녀가 품에 한아름 들고 있는 빈 술병들로 시선을 옮겼다.
"네. 그것들은 다 뭐에요?"
"아, 이게…"
그럼 그렇지. 그녀의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지나쳐서는 회색 문을 세게 열어재꼈다. 문이 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큰 소리가 났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화가 나서, 나를 기만하고 있는 저 태도가 치욕스러워서. 우습게도 불과 한 시간 전에 대충하자고 다짐했던 나인데.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보인 것은 늘 아무것도 없었던 책상 위에 올려진 값비싼 양주들과 술이 반 쯤 채워져있는 잔들이었다. 그 옆엔 과일안주가 올려진 커피테이블이 있었고 양주를 병째로 들이마시는 옹성우도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병을 옆에 내려놓고는 웃었다.
"이 집에 너가 물어낼 수 있을 정도로 싼 물건은 없어. 저 문까지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스가타 씨, 수업 하겠습니다."
나는 문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가정부에게 손짓했다. 병들 좀 치워달라는 뜻이었다.
"오늘은 맘대로 못 할 걸."
"확률 첫 번째 단원으로 기초문제만 준비했습니다."
가정부가 조심스레 들어와 병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치웠다. 옹성우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제 옆에 있는 병을 꽉 쥐었다.
"아줌마, 얘한테 손님 계신다는 거 왜 말 안 했어."
손님이라는 말에 내 눈길이 자연스레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태연히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말했다. 오늘 맘대로 못 한다니까. 아직 안 가셨거든.
그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방 안쪽에 붙어있던 화장실 문이 덜컥 열렸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계속해서 자기 암시를 걸었다. 괜찮아. 대충 하기로 했잖아. 대충하자.
"내가 말했지? 보여줄 사람 있다고. 이 여자야. 내 과외."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복도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었다.
"돈이 많이 궁하대. 어때. 형이 좀 도와줄래?"
대답이 없었다. 정적 사이로 옹성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야 너머로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는 키 큰 남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뭐, 저 여자가 맘에 들기라도 해? 옹성우가 옆에서 그에게 물었다.
옹성우의 말에 상대 쪽에서도 장단을 맞춰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또 한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 반응 없이 나가버릴까. 그러면 순식간에 재미가 식어버릴 텐데.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빳빳이 굳어버렸다.
"김여주."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 두근대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그걸 듣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시선을 쫓아오는 그의 눈과 눈을 마주했다. 황민현이 반 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게 제 비밀에 대해 얘기했던 그 날처럼, 멍청하게 아무 말도 않고는 웃기만 했다. 그간 그를 혼자 그리워했던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