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2차전
Round 9
눈치가 둔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예민하다거나 빠른 편도 아니었다. 일찍이 크루활동으로 인해 사회생활과 눈치를 익혀 왔지만 이상하게 연애에 관해서는 경험으로 익힌 게 아닌 이상 깨달음이 늦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온 몸의 신경과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지금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여길 것들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음... 나는 자몽주스! 자몽 주스에 시럽은 빼고 주세요! 새콤해도 상관 없어요, 괜찮아요"
"요즘 진짜 커피 안 먹는다. 하루에 커피 한 잔이라도 못 먹으면 삶을 살 수가 없다며"
"어? 요즘은 좀 달달하고 새콤한 게 끌리더라고. 당이 부족한가봐.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가"
우선, 하루에 한 잔이라도 못 마시면 살 수가 없다던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지도 않은 게 벌써 두 달째였고 셀 수도 없이 늘어난 한숨 쉬는 횟수와 멍한 눈을 하는 시간. 그 외에도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꼽을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엔 잘 먹지도 않던 것들이 끌린다며 앞장서 걸어갈 때에도, 아무 일 아니라고 했지만 아파보이는 표정도 속이 안 좋아보였던 것도. 이렇게 수상하고 이상한 것 투성이인데도 너는 그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그렇게 둘러댔고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넘어 가 주었다. 캐묻기 보다는 말 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어서
"...아니야"
"하.. 됐다, 이 얘긴 그만하자"
"나 갈게, 여기 더 있다간 싸울 것 같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점점 지쳐만 갔었다. 네가 너무 예민하고 힘들어보여 말하지 못 했지만 사실은 나도 너 못지 않게 많이 힘들고 예민했으니까.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웃고 울며 그렇게 공감하고 이해 받으며 풀어내고 싶었는데 너는 뭐가 그리 힘든지 말 해 주지도 않으면서 내게 투정만 부려서, 예전과 달리 나도 널 받아내기엔 내 마음 속에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우리 사이는 좋지 못한 결말을 맺은 채 끝이 나 버렸다.
사실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나 했던 순간이 종종 있었기에. 그 이유라면 모든 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혼자 힘들어 하고 있을 너를 나는 충분히 도와주고 챙길 마음이 넘치도록 있었으니까.
"나는 절대 결혼은 안 할 거야. 네가 싫어서도 아니고 난 그냥 '결혼' 그 자체가 싫어. 자신도 없고"
연애 초기에, 그리고 우리 사이가 더 단단해지고 깊어졌을 때 몇 번 들었던 말이다. 너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내겐 연애 상대 그 이상은 아니라고. 그건 누가 와도 똑같은 생각이고 그래도 나는 네가 너무 좋고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들을 들었었다. 하지만 아마 네가 알았다면 놀라고 당황했겠지만, 나는 결혼은 싫다고 말하던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꼭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단 생각이 든 나는, 그럼 이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라면 괜찮겠다, 한 번쯤 해 볼만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런 나였기에 만약 그 상상이 현실이었다면, 오롯이 나의 능력만으로 너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만약 이게 내게 주어진 기회라면, 이런 못된 생각을 가진 나를 네가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주고 싶었는데 넌 끝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 사이 멀어져 버린 우리였기에 끝내 나는 그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린 채 너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2년 가까이 훌쩍 흘러있었고 취준생이던 나는 운 좋게도 어느 직장에 취직할 수 있게 되었다. 서툰 것도 어려운 것도 많은 직장 생활이었지만 우선 취업을 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행복했으며 충분히 배울 것도 많고 할 수록 흥미도 생겨서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중 운 좋게 콜라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막내인지라 아무래도 잡일을 많이 맡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일거란 확신이 들어 이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카톡이 와 있었다. 정중한 말투를 보니 아마도 상대편 회사인가보다 하고 문득 이름을 보니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이었다. 설마 같은 사람일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기에 그냥 또다른 누구겠거니하며 지금쯤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인턴으로 다니던 그 회사에 취직을 했을까 아니면 다른 곳을 다니고 있을까 하고 잠깐 네 생각을 하며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카톡 창을 열었다
"아기 엄마신가보다. 애가 귀엽네"
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동그라미 가득한 볼의 주인공이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프사를 확인하게 되었던 것 같다. 빵빵한 볼을 뽐내며 머리엔 사랑스러운 삔을 꽂고 있는, 예쁜 공주님을 키우는 아이 엄마시구나, 아이 돌보면서 일하시기 힘들텐데 고생이 많으시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건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던 게 현실이 되는 순간, 사람은 모든 게 일시정지 된다던 게 사실이었구나. 나 못지 않게 상대도 놀랐다는 느낌이 지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더 확실하게 해 줬다.
전화를 끊고 나니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는데 생각치도 못한 순간에 마주하게 된 너는 내게 행운인걸까 불행인걸까. 그리고 너란 걸 알게 된 순간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방금 내가 본 아이는 정말 너의 아이인걸까 아니면, 혹시 우리의 아이인 건 아닐까 하고.
-
회사 첫 면접날 이후로 몇 년만에 잠을 설쳤다. 하고픈 말 가득하던 머릿속이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또 새하얘지려는 걸 겨우 다잡았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네 목소리를 듣자마자 혹시나 하는 못난 희망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너의 프로필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그 속에 너와 꼭 닮은 아이와 네가 예쁘게 웃고 있어서,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그 많은 기록들 속 그 어디에도 아이 아빠의 모습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아서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손 끝에서 놓쳐버린 기회가 다시 내게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겨서.
핸드폰을 붙잡고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텅 비어버린 너의 프사만 괜히 바라보다 대화창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수 십번 반복하며 고민 끝에 겨우 보낸 한 줄. 새삼스런 존댓말에 스스로 간지러워 할 때쯤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내 쪽을 바라보는 너에 애써 괜찮은 척, 쿨한 척 핸드폰을 흔들며 곧장 다음 말을 써 내려 갔다. 그땐 진짜 무슨 정신에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긴장했던 것 같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시간 나면 그 때 마시자]
[요]
한참을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하는 것 같더니 저런 귀여운 답장이 돌아왔다. 아마 존대를 해야 하는건지, 어떤 내용을 보내야 하는건지 고민했을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생각보다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몰래 웃음이 나고 말았다. 분명 봤겠지, 기분 나빠했으면 어떡하지. 오랜만에 보는 첫인상 이렇게 남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쉽네요. 그래, 그럼 그러자요]
나는 나름대로 장난기 섞어서 답장을 보낸건데 어째 효과가 긍정적이진 못 한 것 같았다.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보아하니 자책 아닌 자책을 하고 있는 거겠지. 괜찮다고, 귀엽다고 덧붙이려다 괜한 역효과가 날까 차마 말을 잇지 못 했다. 선약이 있다던 말이 거짓은 아닌지 곧장 발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린 미팅에 시간이 붕 떠버려 애매해져 버렸다. 약속시간까진 꽤 남았고 그렇다고 집에 들려 쉬기에는 빠듯한 그런 딱, 뭘 하기엔 애매한 시간. 결국 고민을 거듭하다 근처 카페에서 쉬다가 약속 장소로 향하기로 했다. 여주를 봐서인지 문득 생각난 자몽에이드를 사 들고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 도로가 막힐 것을 대비해 조금 일찍 차에 몸을 실었다가 뜻밖의 행운을 맞이했다.
"어?"
여주의 사진 속 그 아이였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일찍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괜시리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둘을 빤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찍 시작된 교통 체증에 짜증이 났었지만 이젠 덕분에 둘을 더 오래, 천천히 볼 수 있어 고마워졌다. 그나저나, 저 아이 왜 낯이 익지? 누구 닮은 것 같은데? 여주 말고.. 아, 뭐지. 어디서 봤지...
"...걔 저건데? 나 3살 때랑 똑같이 생겼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물론 내 바람이 아주 커서 그렇게 느낄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지. 인간적으로, 너무 심각하게 나를 닮았잖아. 김여주 취향이 올곶은 소나무라서 아직은 존재 미상 신원 미상의 아이 아빠가 나랑 비슷하게 생긴 게 아니라면 1%의 확률을 한 10%쯤으로 올려도 되는 거 아닐까? 응?
♥라뷰♥ [뿜뿜이][0618][빔빔][브룩][윤맞봄][오예스][0303][옹스더][미적분쉣][마다녤]
[샘봄][코뭉뭉][다녤쿠][영이][레드][0713][빵빰][코알루][쩨아리][밍멩뮹][흰둥이][슝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