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6-1.
“근데,”
“응?”
“네가 보기에도 귀여워?”
“뭐가?”
“…….”
“…….”
수아와 부쩍 친해졌다. 마음이 놓여서일까 다른 동기들보다 수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편했다.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수아의 팔을 툭 치며 은근슬쩍 물었다. 내 물음에 한동안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수아가 쯧쯧, 짧게 혀를 차며 나를 지나쳐간다.
“왜.”
“넌 이제 내가 편한가보다?”
“그럼, 불편하겠냐?”
“…….”
“…….”
“너 보기보다 좀 뻔뻔하다.”
질색을 하는 그 반응이 웃겨서 일부러 더 그랬다. 수아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왜 대답이 없냐고. 어서 말을 해보라고 닦달을 하니까, 수아가 주먹 쥔 손을 내 앞에 흔들어 보이며 커플 주제에 염장 지르지 마라. 하며 경고한다.
“너는, 애가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해.”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긴. 네가 알아서 잘 생각해봐. 이게 긍정적인 말인지 부정적인 말인지 생각을 좀 해보란 말이야.”
“뭐야….”
생각 안 해봐도 알 것 같다. 썩 좋은 뜻으로 한 말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뭐, 아예 나쁜 뜻만 담긴 건 아닌 것 같으니 모른 척 넘어가야겠다. 들고 있던 책을 넣고, 사물함에 든 책을 빼면서 스윽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니 시간이 애매하다. 수업은 끝났는데 다음 시간까지 겨우 20분 남짓 남아있어서 기다리는 시간동안 어딜 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민하는 사이, 수아도 시간을 확인하고는 참 애매하게 남았네. 20분 동안 뭐하냐.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뒤적인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고개를 돌려봤더니….
“여기서 뭐해. 니네 둘이 요즘 부쩍 붙어 다닌다?”
선배 여럿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온다. 몇몇은 며칠 전 술자리에 있었던 얼굴이다. 게다가, 보라 누나도 있다. 괜히 껄끄러워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굳어갔다.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붙어 다니긴요. 얘가 저 따라다니는 거죠.”
“그래? 종인이 여자 친구 있다더니….”
“에이. 장난이죠. 애인 있다고 친구랑 같이 다니면 안 된다는 법 있나요, 뭐.”
수아의 농담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선배의 따가운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아왔다. 보라 누나 때문에 내가 곱게 보이지는 않는지 선배들과 마주한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아서 그 눈빛을 피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아는 그런 내가 걱정이라도 되었던 건지, 은근슬쩍 내 팔을 힘 있게 쥐었다 놓는다. 그래…. 이럴 때 일수록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나 때문에 수아만 더 난감해 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배들은 오늘은 수업 없는 거예요?”
“우리는 끝났어. 부럽지?”
“완전 부러워요. 진짜. 와... 저희는 이제 곧 수업 들으러 가봐야 되는데….”
“으이구, 힘내. 너네도 그거 하나 들으면 끝 아닌가?”
“네! 끝이에요!”
“그나저나, 종인이 너는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
조금 가라앉은 내 기분을 눈치 챈 수아가 일부러 선배들에게 살갑게 굴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와중에, 선배 한 명이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태껏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 선배를 바라보았다.
…보라 누나다.
“…….”
“…….”
대답이 없자, 수아가 고개를 돌려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여자 친구랑 싸우기라도 했나봐?”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 대신, 입술을 말아 물었다.
“…….”
“…….”
여러 개의 눈동자가 나와 보라 누나를 향해 있었다. 왠지, 대답하기가 싫었다. 누나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 친구’라는 단어도 싫었고, 나를 바라보는 그 원망 섞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도 싫었다.
“…….”
“…….”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나는 왜 누나에게서 그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보라 언니! 그날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그렇게 대답도 없이, 고요한 그 상태로 눈동자만 마주하고 있는 사이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던 수아가 불쑥 말을 꺼내며 누나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누나의 시선 대신 시야에 찬 수아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수아의 물음에도 대답을 않던 보라 누나를 다른 선배가 잡아끌며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그만 갈게. 수아야, 수업 잘 듣고 다음에 보자.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모습에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소문이 다 난 것 같던데. 오늘 이 일도 금방 퍼지겠지. 그땐 몇 명이 나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으이구, 등신….”
수아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친다. 나를 대신해서 선배들을 상대했던 수아가 고마웠다. 너한테는 참, 고마운 게 많다. 그 날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좀, 괜찮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수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힘없이 웃었다.
“…뭐가.”
“…….”
“…수업이나 들어가자.”
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체 뭐가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걸 겪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마음이 답답할수록 한숨만 늘어간다. 경수가 한숨 쉴 때마다 옆에서 그러다 땅 꺼지겠다고 말리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댔다. 등 뒤로 폭신하게 닿아오는 촉감에 나도 모르게 나른해져 눈을 감았다.
“…….”
왠지,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보라 누나와 마주친 이후로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아버리는 바람에 그 다음 수업에도 제대로 집중을 하질 못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조금, 지쳐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엔 기분이 좋아도 안 좋은 척하며 표정을 잘 숨겨왔던 것 같은데 요즘엔 그게 잘 안 된다. 그래도 다행인건 경수에게는 이런 내 상황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나저나 경수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도경수가 있다. 감았던 눈을 뜨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녀석에게 연락해볼까 하다가 잠시 망설였다. 물론 지금 이런 기분으로 경수를 만나더라도 그 녀석의 얼굴만 본다면 절로 웃음이 나겠지만 오늘만큼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도, 마음도 지친다. 푹 자고 일어나면 조금은 개운해질까. 그럼, 모든 걱정과 고민을 덜어내고 난 후에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사실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얼른 녀석의 얼굴을 보고, 온기를 느끼고 싶다.
[종인아]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음에, 혹시나 녀석인가 싶은 마음에 액정을 쳐다보았다. 내가 너 보고 싶은 만큼 너도 나 보고 싶은 거야, 경수야?
[지금 집 앞인데…나올래?]
보라 누나였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앉은 보라 누나의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메시지를 받고 나간 집 앞에 서 있는 누나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퉁퉁 부어버린 두 눈을 하고서 나를 보고 애써 웃는 그 얼굴에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왔냐는 물음도 없이, 누나를 이끌고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혹시나, 경수가 보면 오해할 것 같아서.
“왜….”
“…….”
“왜 왔냐고, 안 물어봐?”
많이 울었는지 목소리도 잠겨서 엉망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지만 그런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앉아있는 누나가 나 때문에 울었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요 며칠 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 혼란이 누나에게서 비롯된 것도 다 알고 있었고. 그래도, 온전히 누나의 탓으로 돌릴 순 없었다. 어떻게 보면, 누나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겪어야 될 일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눈앞에 앉은 누나는 나보다 더 힘든 얼굴을 하고 있어서 원망도 할 수가 없었다. 착잡한 마음에 누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앞에 놓인 컵만 만지작거렸다.
“…왜 오셨는지 알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누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 때문에 기분 나빴다면,”
“…….”
“미안해.”
“…….”
“너 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어.”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누나의 입에서 나온 미안하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참 이상하게도,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내가 경수에게 제대로 신경을 못써줘서, 내가 누나에게 선을 제대로 긋지 않아서…. 그래서 모두다 엉켜버리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에요. 누나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
“사과하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
누나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괜스레 내가 더 미안해지고 만다.
“…고마워.”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할 것도, 고마워할 것도 아니라고. 맞은편에 앉은 누나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누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간다. 놀란 마음에 얼른 티슈를 건네자 그걸 받아들 생각도 못하고, 누나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만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우는 도경수를 달래는 법만 알지, 다른 사람을 달래는 법은 잘 몰라서 더 당황스러웠다. 경수가 울 때처럼, 다가가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나….”
조금씩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에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을 잡아 내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티슈로 닦아주었다. 나 때문인지, 누나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려 입술을 깨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종인아.”
“…네.”
“…….”
“…….”
“나 너 좋아해.”
누나의 얼굴을 닦아주던 손을 내렸다.
“나 너 좋아한다고.”
“…….”
“알고, 있었지?”
내 얼굴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누나의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
“죄송해요, 누나.”
“…왜.”
“…….”
“수아, 때문이니?”
“수아 아닌 거 아시잖아요.”
“…수아, 아니야?”
“아니에요.”
“근데, 왜….”
누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수아를 의심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 때문에 수아가 괜히 밉보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라고 경수의 사진을 당당하게 꺼내 보일 수 없는 내가 못 견디게 미웠다.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이 상황이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내가 못나서 그런 거야, 경수야. 내가 비겁해서 너를 자랑할 수 없는 거야…. 다 내 탓이야. 정말, 미안해. 미안해….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누나에게 보여드릴 순 없지만,”
“…….”
“정말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누나의 눈가에 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닦아줄 수가 없었다.
“누나에게도 정말 미안해요.”
“…….”
“근데….”
“…….”
“…그 녀석한테 더 미안해요.”
울고 있는 누나의 얼굴 위로,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경수의 얼굴이 겹쳤다. 차라리 너도 울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미안했을 텐데. 나를 질책하기라도 하는 듯이, 평소보다 더 밝게 웃고 있는 그 얼굴 때문에 나 또한 눈물이 날 뻔했다.
“미안해요….”
一
“뭐야, 여자 친구…?”
보라 누나가 먼저 자리를 떠난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에 오는 길에 김혜인을 만났다. 보라 누나와 함께 있는 걸 본 모양인지 집에 오는 길 내내 어깨를 잡고 물어오는 누나가 귀찮아서 잡은 손을 쳐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
“여자 친구도 아닌데 왜 네 앞에서 울고 있었냐고.”
“…….”
“어이, 김종인.”
“…….”
“왜 대답이 없어.”
꼬박꼬박 대답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누나의 질문 공세에도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그저 묵묵부답 고개만 저었다. 그래도 끝까지 따라붙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몇 번의 질문이 더 있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못 본 척 하라는 내 말에 수긍을 했는지 의외로 누나가 말이 없다.
“…….”
“…….”
“…왜?”
“…….”
대신, 굳게 입을 다문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누나가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집에 들어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누나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서 낯설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얼른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까….
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 억지로 눈을 감으면, 울고 있는 보라 누나의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누나의 마음을 거절한 것도 편치 않았고, 그 때에 경수를 떳떳하게 보여주지 못한 것도 아직 가슴에 쌓여있다. 경수가 모를 일이라도, 그래도 미안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못난 놈이었나 싶어서 또 한숨이 새어나오고. 누나에게도, 수아에게도, 경수에게도 미안한 마음만 자꾸만 든다. 그렇게 긴긴밤을 한숨으로 채울 것인지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고민들에 혼자 앓고 있는 찰나에 경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액정에 떠있는 녀석의 이름에 잠시 울컥했다.
“…….”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혀있었지만, 경수에게만은 내가 약해진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얼른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오늘 새벽에 업뎃했어야했는데
인티 점검이라서 지금 올려요^^;
예쁘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