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마주쳤다.
내 착각일까? 그냥 부끄러웠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부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봤다. 그래서 그냥 피했다. 못 본 척, 못 알아본척하면서. 그도 그냥 나를 지나쳤다. 사실 조금은 허무했다. 나를 알아봐 주고 아는 척해주진않을까. 그는 냉정하게 내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불필요한 행동이기도 하니까 냉정하게 느끼는 건나뿐이다. 1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들이 아무렇지 않았나 보다. 뭐 3년이나 된 얘기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도 이내 멈춰 서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앞을 향했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고,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야
...
생까냐?
...
왜 아는척하는 거 싫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뭐 하는데
그냥 아는 척 할 사이 아니잖아.
그러네.
....
3년 동안 그는 더 커져있었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려다보는 건 익숙하지 않다.
잘 지냈나?
뭐 못 지낸 건 아니니까.
난 못 지냈는데.
아, 그래?
왠지 안 물어보나? 예나 지금이나 정없는 건 똑같네.
물어 보고 싶지 않은데.
니 때문이라면 믿을래?
....
농담이다. 표정 풀어라.
그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시절 아무도 오지 않는 옆 건물 옥상이었다. 나는 전학을 왔었다. 처음이라 많은 아이들이 내게 관심을 보였었다. 빨리 식을 줄 알았던 그 관심은 오래갔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엄마가 매일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은 참 빠르게 퍼졌고. 나는 불륜녀의 딸이 되었다. 그런 소문도 이제는 재미가 없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와 친구를 하지 않았고, 나는 점심시간마다 옥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잠을 잤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하루는 변수가 생겼다.
책을 읽던 도중에 인기척이 났고, 나는 숨었다. 아이들이 무서웠다.
한 남학생이었다.
그는 난간에 자리를 잡더니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몰래 훔쳐보다 눈이 마주쳤다.
니 뭐꼬.
응?
네 뭔데 여 있냐고.
뭐가. 네가 전세 냈어?
아가 뭐 이리 까탈스럽노.
그는 사투리를 썼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딱 봐도 '나 불량해요'라고 적힌 그런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고 갈 줄 알았던 그는 예상외로 그는 내 옆으로 슬금슬금 오더니 말을 건넸다.
재밌나?
담배 냄새나.
내 말에 멋쩍은 듯 그는 담배를 발로 지져 끈 후 아깝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니 친구 없제.
...
친구 없구만.
그에게 짜증이 났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책을 들고 교실로 향했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교실로 향해, 자리로 돌아가 엎드렸다. 빨리 수업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그는 그 이후로 꾸준히 점심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며 말을 걸었다. 오늘도 책을 보냐, 밥은 먹었냐, 날씨가 참 좋다는 말들을 했다. 그런 그가 참 귀찮았다. 그의 명찰에는 박우진 세 글자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우리 반에 자기 친구를 보러 자주 놀러 왔고 내게 아는 척을 했다. 나는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의 친구는 왜 저런 애한테 인사를 하냐는 듯 굴었고, 박우진은 내 눈치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은 나한테 호의적으로 구는 그가 고마웠다.
하루는 내가 그에게 물었다.
너 우리 엄마 얘기 몰라?
꼭 우리 엄마 소문을 모르는 아이 같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모르냐고.
아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는 정말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날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