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민현이 손을 뻗자, 다니엘이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누나 그냥 쉴래? 까짓거 학사 경고 먹고 우리 회사 들어와."
다니엘이 헛소리를 하자 민현이 정색했다.
"선배 그런 사람 아니야."
"뭐라노."
벌써 한시간째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나는 덩치가 산만한 남정네 둘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러자 한참 투닥거리던 둘이 동시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얼굴값 하는 후배들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민현에게 붙들렸다. 머릿속에서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그 네 글자가 뇌리에 박혀서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도저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어서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자 민현은 오히려 집요하게 제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괜찮아요?"
걱정돼서 와 봤는데…
좋아해요.
미쳤다. 이제는 얘의 모든 말이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민현을 힐끔 쳐다보다가 간신히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민현을 떨어뜨려놓으려 했지만 민현은 뒤에서 내 두 팔뚝을 잡고 부축했다. 그러니까, 거진 민현에게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티가 나지 않게 몸을 비틀어보았지만 팔에 감긴 민현의 손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그냥 후다닥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에 다니엘이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다니엘은 민현과 요상한 자세를 취하는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짙은 색 찢어진 청바지에 라이더 자켓. 귀에는 크롬하츠 피어싱을 달랑거리는 피지컬 좋은 남자가 표정을 굳히니 오금이 저렸다. 민현아 제발 이것 좀 놔 줄ㄹ… 싸움이라도 날 성 싶어서 두려워진 나는 몸을 더 격렬하게 비틀었다. 결국 그 애의 품을 빠져나오는 덴 성공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다니엘은 나를 세게 끌어당긴 후에 내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기다란 팔은 내 어깨를 넘어서 쇄골까지 휘감았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좀 불순한 의도가 담긴 자세였다. 민현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완벽하게 굳어버렸다. 사회과학대 얼음왕자. 문득 그런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지나가면서 몇번 주워들은 적이 있는 그 오글거리는 별명이 민현의 것이였음을 깨달았다.
"놔 줘."
민현이 말했다. 그 두 음절이 나는 이를 씹어내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분노가 다니엘에게까지 전달되진 못한 것 같았다. 다니엘은 코웃음을 쳤다.
"니가 뭔데 나보고 놓으라 마라야."
"아…"
씨발. 좀 차갑긴 해도 꽤 젠틀한 편이라 그런 저속한 표현을 입에 담을 것 같진 않았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민현의 화가 피크를 찍은 것 만은 분명했다. 나는 민현의 옷자락을 잡았다. 동시에 붙잡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니엘도, 제 심기가 불편한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얘들아 일단 수업은 들어야지. 그만 싸우고."
내 말에 둘의 기싸움은 잠시 일단락 되는 듯 싶었다. 우리는 강의실로 동시에 들어왔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웬수같은 잘난 후배님들 덕분이었다.
"자..잠깐..너네 둘 다 여기 앉게?"
이미 수업은 글러먹었고 구석에 앉아서 머리나 좀 식히려는데, 후배님들은 도무지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까는 그렇게 으르렁대더니 내가 하는 말에 둘이 짜기라도 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눈빛으로 그렇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양 옆에 사람이 있으면 집중을 잘 못해."
나는 누가 들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을 쳤다. 당연히 먹혀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럼 강아지라고 생각해요."
다니엘이 그렇게 대답했다. 너라도 제정신으로 굴어라 제발. 나는 다니엘을 외면하고 애절한 표정으로 민현을 쳐다보았으나 그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명백한 동조였다.
"누나 수업 열심히 안 듣잖아요."
거기다가 친히 확인사살까지 하신다. 얜 그렇게 안 생겨서 은근 웃긴 구석이 있네.
결국에는 왼쪽에 다니엘, 오른쪽에 황민현을 두고 강의를 듣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황민현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양다린가봐. 여자 능력자네. 나는 얘들 중 한놈이라도 빡쳐서 그 말에 따박따박 대꾸해주기를 바랬으나, 안타깝게도 애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의문이 들었다. 고백한 사람이 얘네가 아닌가? 근데 그럼 지금 이 행동들은 뭔데? 나는 공간스런 혼란을 몸소 체험중이었다.
둘 중에 한 놈이 나한테 고백을 했다 치자. 그럼 나머지 한 놈 행동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데. 녹음이 안 되는 동안 무슨 사고라도 쳤나? 나는 한 놈한테 고백을 받고, 한 놈한테는 사고를 친 건가? 아니면 두 놈이 동시에 고백을 했는데 한 놈 목소리만 녹음이 된 건가? 아니 근데 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시발… 뭐지?
"누나 입술 뜯지 마요. 예쁜 얼굴 상해."
아, 나도 모르게 입술을 뜯고 있었나보다. 다니엘은 내 손목을 잡아서 천천히 내렸다. 민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은근히 만지지 마. 변태 새끼야."
"흐응. 그러는 본인도 만만찮게 불순하지 않나?"
다니엘은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으로 베베 꼬며 민현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상황만 아니었다면, 여자 여럿 홀렸을 그런 미소였다. 대화 내용으로 유추해보건데,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떠한 일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녹음파일에는 둘이 대화하는 부분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는 민현이 저지했다.
"선배, 오늘은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데려다 줄게요"
"씨발, 집은 또 언제 알았대. 누나, 저새끼 따라가지 마요. 험한 일 당할라."
머리가 아파왔다.
"누가봐도 너보단 내 쪽이 더 안전해보이지 않을까."
"지랄. 누나, 저랑 달달한 거나 먹으러 가요."
"달달한 거 제 집에 많은데."
"미친 놈. 은근 슬쩍 집으로 데려가려고 그러네."
"난 너랑은 달라서 그렇고 그런 짓 안 해."
"그렇고 그런 짓? 이거 존나 웃긴 새끼네. 안 그래요 누ㄴ…"
"그만해 이 미친 놈들아!"
결국 참다 참다 한계에 도달한 나는 빽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교수와 학우 전체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수그리고 앉아 책상에 머리를 쿵- 박자 상태가 메롱된 나를 눈치 챘는지 양 옆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평탄한 대학생활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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