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오늘 예쁘게 하고 왔네. 민현의 말에 나는 파드득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민현은 가까이 다가와 은근슬쩍 내 어깨에 제 팔을 올려놓는다. 가만보면 다니엘이나 민현이나 모두 나를 제 팔걸이 쯤으로 아는 것 같다.
"팔 치워라."
"세삼스럽게."
민현은 생각보다 더 능글맞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 놈한테 얼음왕자라는 별명이 붙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나는 녀석의 팔을 손으로 잡아 끌어내릴까 하다가 그냥 반 쯤 체념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녀석들에게 적응이 된 것 같았다. 민현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대뜸 이런 말을 한다.
"요즘에는 얼굴이 안 빨게져요."
"예전에야 당황스러워서 그런거고."
"사랑이 식었다."
큭큭. 민현은 그런 농담을 던지고 나서 저 혼자서 뭐가 웃긴 지 한참을 웃었다. 웃기냐?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민현의 웃음이 멈췄다.
"아니요."
"......"
"서운해요."
대학연애삼각
탐색(2)
이 놈이나 저 놈이나 가끔씩 이런 식으로 진심을 내비칠 때면,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얘네한테 직접 녹음 파일에 대해 물어보려던 생각은 일치감치 접어버렸다. 물으려고 했다면 바로 그랬어야 했다.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이 쪽 저 쪽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핑계로 미적지근하게 굴다가 이 이상하게 엮인 삼각관계가 곪도록 방관하고 있었으니까. 명분조차 없었다. 사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면서. 결국 모든 고민은 '이대로 지내도 좋지 않을까' 라는 값싼 자기합리화로 흘러간다.
[지금 어디 있고 뭐 하는 지 보고 안 하면 저번처럼 외제차 끌고 창피주러 감] - 강다니엘.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한가. 카페 테이블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그런 생산적이지 못한 잡생각만 주구장창 하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다니엘이었다. 문자 내용을 보니 예전에 교문 앞을 지나가는 나를 다니엘이 무작정 제 차로 우겨 넣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나른 사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동안 xxx대 사랑의 도피녀로 동기들 사이에서 죽도록 놀림을 받았는데, 그 이후로 다니엘이 내 위치정보를 요구하면 군말 없이 알려주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후덜거리는 손으로 [가로수길 카페. 과제중.]을 쳐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이 카페 문을 왈칵 열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아 새끼야 저리 떨어져."
"누나 진짜 오랜만이다."
민현이 스킨쉽에 있어서 어느정도 선을 지킨다면, 다니엘은 집요하게 품을 파고드는 쪽에 속했다. 사랑받고 자란 부잣집 아들내미.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자길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무근본에 휘말려 안겨오는 덩치에 어쩔 수 없이 등을 토닥여주는 멍청이.
"과제 다 해가?"
"이제 시작이야. 너랑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이거만 먹고 가."
나는 손도 대지 않은 조각케익을 턱짓으로 가르켰다. 다니엘은 그것을 한 입 떠 먹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내게 질문을 했다.
"이제 그 새끼는 안 달라 붙어?"
비슷한 질문을 민현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성격이나 생긴 거나 상극 중의 상극이면서 생각하는 건 왜 이렇게 똑같은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다니엘을 비웃었다. 너나 걔나 내 인생의 불청객인 건 마찬가지거든요;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얼른 가."
"아직 다 안 먹었어."
다니엘은 마치 영상을 슬로우모션으로 재생시킨 것 마냥 느릿느릿 케이크 한 스푼을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나는 결국 크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 눈치를 보던 다니엘도 그제야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렇게 헤프게 웃어주면 안 되는데. 정 붙이면 안 되는데. 하지만 후회는 늘 그렇듯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할 짓을 반복한다.
"누나는 과제를 왜 해?"
한참을 옆에서 빈둥거리던 다니엘을 무시하고 한참 과제를 하니, 심심했던 건지 다니엘이 아무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 보려고 온 애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가라고만 하는 것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학점 따서 취직해야지."
"그럼 우리 회사 들어오면 나랑 놀아줄 거에요?."
"낙하산이라고 욕먹기 싫다. 지금도 잘나신 누구 덕분에 여학우분들께 욕을 한바가지로 먹고 있는데. 아주 장수하라고 염불을 외워라."
"안 그래도 나랑 천년만년 살았으면 좋겠다고 외우는 중이에요."
다니엘은 대뜸 내 무릎에 제 머리를 대고 누웠다. 주체 못하는 긴 다리가 쇼파 밖으로 흐트러졌다. 나는 다니엘의 머리를 두 팔로 들어올렸지만, 온 몸으로 버티는 남자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저 자리가 구석진 곳이라 이런 자세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수 밖에 없었다.
"조금만 잘래요."
"눈 좀 붙일거면 반대쪽 가서 편하게…"
"아니, 이게 더 편해."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데. 말만 참 잘한다. 나는 피식 웃다가, 곧 표정을 싸늘하게 굳혀버렸다.
결국, 모두 내 힘으로 알아내야 한다.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이길 바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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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말랑복숭아
미녀
짹쓰
빵야
짧게 느껴지신다면 그건 기분 탓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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