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형 다 컸네. 재현은 생각했다.
낮에도 종종 말없이 집을 나서는 그는 늘 이곳을 찾았다. 낮과 밤이 아주 다른 길목, 현란하고 또 황량한 길의 중심이었다. 울렁대는 붉은 등불이 흘러 넘쳐 길바닥까지 전부 쓸쓸한 색으로 바꾸어 버리는 곳.
재현은 이 길목의 낮을 사랑했다. 붉은색의 밤과 무채색의 낮은, 일렁이는 수면의 위와 아래만큼이나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불빛이라고는 투명한 햇빛 뿐이었다. 싸늘한 가을 하늘의 푸른빛은 이 가게들과 몹시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인공적인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간, 재현은 푸른빛 사이에 파묻힌 채로 숨을 들이쉬었다.
길게 늘어선 가게들은 전부 똑같이 생겼다. 차이라고는 나무 벽에 패인 흠결들의 위치, 모양, 지붕 끝의 기와가 깨진 정도 따위였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지붕 끄트머리마다 둥실둥실 매달린 둥그런 홍등의 크기마저 모두 같았다. 집의 네모난 모양을 따라 하나같이 빙 둘러져 있는 마루는 비교적 깨끗이 닦여 있는 편이었다. 해가 지고 나면 수많은 발자국들이 새겨졌다 사라지는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코끝에 묘하게 맴도는 향내를 들이마시던 재현은 마루 위에 몸을 눕혀 버렸다.
아직까지 어린 애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다 커서 형아들 연애사업에도 끼어들 정도가 됐다.
여주에게 경고랍시고 하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가장 염두에 둔 사람은 저일 것이었다. 의미 없이 구름의 조각들을 세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재현에게서 흐응, 하고 웃음소리가 났다. 별 생각 없었는데, 이민형이 그러니까 마음이 생기잖아.
철벽 같던 방어막에 균열이 생겼다. 숨기고 있던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건 재현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예상 밖의 재미가 생기네. 재현은 지난 날 스친 칼날에 생긴 상처를 살살 매만졌다. 이제 거의 아물어 가는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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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그 새끼 또 지만 모르지. 그게 어딜 봐서 마음 없이 하는 짓이야? 그놈이 여자 대하는 거 매일같이 본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 분명히 신경 엄청 쓰고 있는 거다. 아마 지금도 어디 기어나가서 멍청하게 김여주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걸.”
“도영아,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재현이도 오글거리는 첫사랑 좀 해 보면 좋지. 너야말로 별걸 다 신경쓴다.”
“아, 뭐라는 거야. 정재현 하는 짓이 웃기니까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저번에도 요 앞에서 애 끌어안고 궁상떨고 있는 거 내가 봤다고.”
“그래서, 넌 그게 부러웠어?”
“아 또 뭐가 부러워! 내가 왜 걔를 부러워 해. 부러울 것 하나도 없어.”
“뭐야, 김도영도 뭐 있었네.”
오 미터 가량 떨어진 소파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람 빠진 팔걸이에 엑스자로 꼰 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얼굴을 괸 태용이었다.
누가 봐도 붉어진 얼굴의 도영이 태용을 노려보았다. 김도영 쟤는 왜 통나무짝에 대고 설전을 펼치나 몰라. 아무리 떠들어 봐야 반응은 한결같았다. 빙글빙글 웃으며 반듯한 서류 낱장들을 분류하던 태일이 검은 글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이쯤 되면 여주가 문제네. 여기저기 다 홀리고 다니니, 원. 우리 순진해빠진 도영이 마음만 상하게, 그치.”
“형 진짜 그만 해라. 난 걔랑 어떻게 해 볼 생각도 없고, 그러면 안 된다고.”
“멍청한 놈.”
또다시 소파 방향에서 날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태용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비틀어 팔걸이를 베고 똑바로 누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곳저곳 찢긴 소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 골목의 섭리는 그에게 습관과도 같았다. 태용은 거의 한 달 여만에 돌아온 아늑한 지하실의 공기가 좋았다.
비가 오면 끊임없이 제 자신을 난도질하는 일도, 그래서 여름 내내 그치지 않던 비가 억지로 끌어올린 습도도 모두 불쾌했다. 눈에 띄게 건조하고 쌀쌀해진 가을 공기가 당분간 출장을 나갈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게 만들었다. 분명 여주의 귀가가 점점 늦어진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에는 단둘이 집에 있는 게 어색해서 별일 없이 외출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묘한 고집이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눌러앉아 살지는 않겠다는, 쓸모도 없는 고집. 태용은 정이 많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자꾸만 잃은 동생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가 괜한 일에 발을 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는 빈 집이 많았다.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있는 빌라의 꼭대기 층 단칸방 또한 그랬다. 태용은 종종 버려진 가구들로 가득 찬 빈 방의 창틀만 남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곤 했다. 창틀의 홈에 주르르 늘어선 탄알들을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안녕, 우리 예쁜이. 어딜 갔다 왔길래 그렇게 땀을 흘려? 감기 들겠다.”
뭐야. 태용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김도영 말이 맞나?”
모퉁이를 돌아 걸어가는 여주를 발견한 순간, 손끝에서 튕겨지던 차가운 금속 물체가 틱, 하고 창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태용의 시야를 지나는 곳까지 끝없이 뻗은 홍등가의 길 한가운데였다. 재현이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바로 그 길. 그리고 그 길에서 담장 하나를 둔 바로 옆 골목에 여주가 있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가게의 나무 마루에 앉아 있던 재현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담장을 기어올랐다. 귀신같이 여주의 발걸음을 알아챈 건지, 재빠른 몸놀림으로 담장 꼭대기까지 기어 오른 재현은 담장 너머 발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자마자 날카롭게 세워진 가시덤불에도 개의치 않고 담장 아래로 풀썩 뛰어내렸다. 태용은 심통인 줄만 알았던 도영의 푸념을 되새겼다. 그게 어딜 봐서 마음 없이 하는 짓이야?
정말 그렇네. 담장을 타넘는 동안 그새 조금 멀어진 여주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폭 껴안은 재현이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태용에게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원래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외진 담장 아래였다. 오늘따라 날이 서 있던 태용의 촉을 피해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여러 가지 하네.
“누구랑 뭘 하고 왔길래 심장은 콩콩콩, 놀란 토끼 새끼도 아니고.”
“아… 정재현이네. 지금 오빠 때문에 놀라서 그렇잖아.”
“흐흥, 나 때문이라니까 듣기는 좋은데, 나 때문 아닌 것 같은데.”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확 뛰어들면 누가 안 놀라.”
재현은 거의 가두듯이 꽉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길의 끝에서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 여주를 언뜻 보았다. 마침 계속 그녀의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환각을 본 줄 알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몸이 재산이다, 항상 생각해 온 제가 이토록 몸을 험하게 굴린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재현이 동작을 멈추었다. 인기척이 꽤 났다고 생각했는데, 제 존재도 모르고 서둘러 걸어가는 마른 등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아마도 저쪽에 있는 높고 고압적인 건물에 겁이 나서 그런 것일 터다. 얇은 담장의 너머에는 후리와가 있었다. 재현이 낮 시간마다 여유를 부리는 가게들의 한가운데였다. 담을 타넘었는데도 으리으리한 가게의 꼭대기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무서워하고 있구나. 재현은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강도 아니야. 안녕, 우리 예쁜이.
앞뒤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재현은 제가 내뱉고도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들어도 변태 사기꾼 같은 호칭과, 놀란 여자애를 안심시키기 위한 변명. 품에 안긴 여주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쯧, 혀를 찬 재현이 여주의 몸을 돌려 저와 마주보게 만들었다.
“춥잖아, 이리 와.”
재현이 늘 그렇듯 그와 한 몸처럼 보이는 수트 위에 걸치고 있던 긴 코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주를 감싼 팔이 등허리를 도닥이며 그녀를 담벼락 아래로 천천히 이끌었다.
“이제 가디건 쪼가리 한 장 걸치고 돌아다니기에는 바람이 세단 말이야. 그러고 어디 갔다 온 거야?”
대답 없는 여주를 잠시간 들여다보던 재현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큰 손마디가 은색의 금속체를 달그락 열었다. 구불구불하게 꼬인 뱀 세 마리로 장식된 지포라이터였다. 탄력 있게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파란 불꽃이 타올랐다. 담벼락에 여주의 몸을 붙이고 그 앞을 감싸고 선 재현이 라이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코트 자락을 넓게 펼쳤다. 따뜻하지. 몸 좀 녹이고 가자.
“……고마워.”
라이터의 불꽃이 바람에 닿지 않도록 품 안으로 숨기던 재현이 여주를 보았다. 지난번 대놓고 던진 고백에는 답이 없었다. 그 후로 돌아온 건 편한 말투와 조금의 친밀함 정도였다. 가뜩이나 시허연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다. 아직까지 후리와의 근처를 지나칠 때면 늘 이렇게 긴장하는 모양이었다. 긴장하는 모양새가 더 위험한데. 재현은 자신의 모토를 떠올렸다.
약한 마음이 들 때는 티를 내선 안 된다. 두려움이든 미련이든, 무언가에 의미를 두는 순간 얽매이게 되는 건 정해진 결말이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마음은 안 변하나?”
“자꾸 부담주는 거 별로야. 여자 많이 만나봤다면서 그것도 몰라?”
“단호하네. 그건 알겠는데 말 돌리지 마라. 그 언니들이랑 너랑 같아?”
“…….다를 건 또 뭐야. 나도,”
두려움에 쿵쿵 심장을 울리면서도 더듬대며 말을 이어가는 여주가 대견해서 계속 뻔뻔한 척 말장난을 걸던 재현의 말이 멈추었다. 아니, 그러지 마.
“그건 아냐.”
“…….”
“달라. 전혀. 그 여자들이랑 너는 뼛속부터 달라.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하는 행동까지 전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왜 너는 자꾸 너를 볼 장 다 본 애로 만들어. 난 한 번도 네가 나쁜 물 들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고맙지만-”
“…….”
“나도 똑같아, 그 여자들이랑.”
“……그래? 그럼 나도 똑같네.”
가만히 여주의 눈동자를 쳐다보던 재현이 라이터 불을 껐다.
어두운 군청색이 된 하늘에서 가을밤의 공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매가 휘었다.
방금 전 여주의 어떤 감정도 없이 담백한 어조는 그녀에게 무언가 재현이 모르는 비밀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게 했다. 그 애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재현은 더 이상 의견을 피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속물이면 나도 속물 하지 뭐.
장난스런 웃음을 되찾은 재현이 느물거리며 끈적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리 와 봐. 찬 금속을 들고 있는 동안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이 여주의 뒷목을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게 하는 낡은 오브제처럼 우뚝 선 건물 앞에서 강하게 박동하던 장기는 더 이상 두려움으로 뛰고 있지 않았다. 눅눅한 진심으로 점철된 분위기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거북스러운 위로보다는 맞닿은 살의 온기가 더 낫다. 재현은 본능에 치우치기로 했다.
그저 말없이 차가운 손이 이끄는 대로 얼굴을 내어 주면서 여주는 생각했다. 정말로 우린 똑같았나 보다. 칼에 흉터가 났던 정재현과 지금의 나.
지금 정재현과 입을 맞추면, 내가 나눠 주었던 온기를 다시 빼앗아 오면, 저 괴기한 목조 저택 앞에서도 태연해질까. 웃으면서 자기의 일을 말하는 정재현처럼.
여주는 말없이 재현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고마워. 나 혼자 이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들을 품 안에서 머릿속에 수백 번 되뇌이며, 여주는 천천히 뒷목 언저리에 닿아 오는 온기를 내버려두었다. 방금의 입맞춤은 그녀에게 오롯이 성스러운 위로가 되었다. 똑같이 깊고 찬 하수구 물에 침식된 재현이 건네는. 찬란한 밤이 시작되기 직전의 위로. 그의 의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분위기도 좋은데 이제 곧 밤이라 뭘 더 할 수는 없겠네. 오늘은 작정하고 꼬셔보려고 했는데, 내가 워낙 건전한 사람이라… 밤이 되면 강제로 금욕적이야. 그래도 이건 이거 나름대로 섹시하지 않아?”
재현이 여주와 나누는 진지한 대화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어쩐지 가라앉은 둘 사이의 공기는 묘하게 선정적이기도, 숨이 막히기도 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 적막을 즐기듯 느릿느릿한 속도로 여주의 날개뼈 부근을 쓸던 재현이 평소에 밥 먹듯이 던져 대는 특유의 농담으로 분위기를 홱 바꾸었다. 희곡의 주인공인 마냥 뻔뻔하고 매끄러운 음성이었다. 해가 거의 다 저물고 하늘에 남은 주홍빛의 작은 연기 무리 같은 것이 흐트러졌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주홍빛 연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재현은 일을 빠지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재현은 여주의 목을 감싸안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을 피해 멈추어 섰을 때와 똑같이 뒷목 언저리에 가끔씩 짧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면서.
“이것 좀 풀고 가. 더워.”
“왜, 내가 추워서 그런 건데. 너한테 옷 다 주고 난 얼어 죽으라고? 혹시 지금 나한테 설레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절대 안 풀지.”
“아니. 안 설레는데. 설레발 치지 마.”
목에 감긴 팔을 풀라는 것은 혹시라도 누가 보고 오해할까 봐서였지만, 여주도 사실 어느 정도는 기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우’일 것이라는 착각을 핑계 삼아 골목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거의 끌어안듯 목에 감겨 있는 재현의 팔을 그냥 두었을 뿐이었다.
“싫다잖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 초입에 거의 버려지듯이 방치된 평상이었다. 하수구의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채로 둘을 빤히 바라보던 도영이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방향이 확실한 어조였다. 재현을 향했던 눈길이 스르륵 여주의 얼굴을 향했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미간을 팬 채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 결국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담배를 평상에 그대로 비볐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제 목에 대충 휘감겨 있던 목도리를 풀어낸 도영이 빠르게 걸어와 재현의 팔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그대로 목도리로 둘러쌌다. 꽤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배어든 듯한 비누 향 사이로 쌉싸름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야. 넌 덥다고 하면 쟤가 떨어지겠냐. 정재현은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어, 일부러. 능구렁이같은 새끼라서.”
“면전에 대고 너무 하네. 능구렁이라니….”
담담한 목소리로 작게 욕을 읊조린 도영이 재현의 불퉁한 중얼거림을 싹 무시하고 여주의 소매 자락을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살갗이 전혀 닿지 않는, 재현과는 정반대의 손길이었다. 길이며 품이 남아돌아 통나무처럼 보이는 코트 끝자락을 보고 혀를 찬 도영이 여주를 재현의 반대편으로 숨겼다.
“김여주가 곤란해하잖아. 네가 얘를 좋아하든 뭘 하든 네 맘이지만 아직 준비도 안 된 애한테 너무 집적거리지 말라고.”
재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연 재현을 뒤로 하고 여주에게 돌아 선 도영의 흰 손이 코트의 양 소매 끝을 꾹 다잡았다.
“이런 거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뭐 마려운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굳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정재현이나 나나, 그런다고 너 안 잡아먹어.”
허리를 약간 숙여 키를 맞춘 도영이 여주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부 아닌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여주의 머리 위에 재현과는 달리 따뜻한 손바닥이 약하게 두어 번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난 머리가 아파서 바람 좀 더 쐬다 갈게, 쟤 삐친 것 같아도 넘어가지 마. 아니니까.
태일은 시끄럽게 들어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환풍구가 나 있는 건물 초입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까지 꾸준히 시끄럽다가 뻥 뚫린 지하 입구에서부터 조용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숨기는 관계라도 있나.
태일의 차분한 시선이 아주 잠시간 여주의 어깨에 얹어져 있는 재현의 손을 향했다. 가깝다. 안 그래도 최근 며칠간 둘 사이의 기류가 미묘했다.
여주의 어깨 언저리에서 눈을 돌린 태일의 시선이 흰 서류 위를 부유했다. 글자가 아니라 종이 위를 보고 있다. 그는 금색 클립이 달린 만년필을 달각대다가, 서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가는 목을 한 번 쓸고 나서 부시시한 머리를 흩뜨렸다. 그리고 그 특유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은 보고 있던 서류를 부드럽게 뒤집어 책상 위에 쌓인 십여 개의 파일들 속에 밀어넣는 일련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나서 태일은 마치 둘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재현이 늦었네, 출근.”
소파에서 빨래를 개다 그대로 잠든 태용을 발견하고 조심조심 들어서던 재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여주가 추운데 혼자 오고 있길래, 데려다 주고 나가려고.”
“늦은 거야? 미안, 나 때문에…. 이거 얼른 입고 가.”
“됐어, 뭘 미안해. 난 좀 늦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더라.”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서둘러 벗어 든 여주가 재현에게 옷을 내밀었다. 태일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코트를 받아 들고 거울 속에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던 재현이 태일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 간다. 여주에게는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계단을 뛰어오르는 재현을 보던 태일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관계다. 내 앞이라고 내외하는 게 아니라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겁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태용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웃던 여주가 태일이 만년필 뚜껑을 닫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제 좀 편해졌나 보네?”
“정재현이랑요? 그 오빠가 자꾸 말을 거니까 아무래도….”
“너무 경계심이 없는 것 아니야?”
묘한 장난기가 담긴 눈이 곧게 여주를 쳐다보았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을 약간 끌어올린 태일이 공기처럼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별 뜻 없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냥 뭐, 너무 사람을 잘 믿는 것 같아서. 원래 그런 편이었나?”
공기 중에는 가시가 있었다. 태일은 묘한 과거형의 말투를 사용했다. 왜인지 꾸중하는 듯한 어투로 내뱉은 태일이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너, 모르핀이 뭔지 알아?”
“……잘 몰라요.”
“그래? 정말로 몰라?”
“무기나 전투기 이름 같은 거… 아니에요?”
“무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웃는 듯 아닌 듯한 태일의 눈빛이 꿰뚫듯 여주를 지나 그녀가 입고 있는 바지 주머니 부근을 향했다. 하얀 가루와 젖은 자국 몇 방울, 며칠 새 자주 보이는 자국들이었다. 소매에도, 가끔은 머리칼 끄트머리에도 튀어 있었다.
태일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감을 느꼈다. 후리와에서 몇 년을 지낸 여주가 모르핀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마도 모르핀을 모른 척하는 이유는 태일과의 기억이 떠올랐거나 혹은, 무언가 그와 관련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겠지. 호기심 많은 꼬마아이처럼 여주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던 태일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무기일 수도 있겠다.
만면에 핀 따스한 웃음을 보고 이유 모를 한기가 들었을 무렵, 태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툼한 겉옷을 걸쳤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갈 채비를 한 태일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네. 곧 애들 들어올 거야. 여주는 영문도 모르고 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다정한 말투인데 어딘가 차갑다. 태일과 대화할 때면 늘 의도적으로 만든 듯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서워. 태일이 나가는 소리에 벽 쪽을 향해서 자고 있던 태용이 반대로 돌아누웠다.
지난 여름에 다쳤던 어깨가 아픈지 잠결에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여주가 천천히 소파로 다가가 태용의 품이 만들어낸 공간에 상체를 눕혔다. 딱 그에게 닿지 않을 정도로만 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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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보풀입니다...
2부는 규칙적으로 업데이트하기로 했는데... 석고대죄 하는 중이에요.
물론 핑계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조금 핑계를 대 보자면 제가 수능과 조금은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더...ㅜㅜ
그래서 의도치 않게 글을 쓸 시간을 뺏기고 말았네요..! 다음 편부터는 빨리빨리 쓰도록 노력해 볼게요 흑흑ㅎ긓규ㅠㅠㅠㅠㅠ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방학 때는 제대로 따박따박 올 거예요! 기다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