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예전에 보았던 어떤 영화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를 기억해냈다. 영화에 나오는 남녀주인공은 꼭 나와 박찬열 같았다. 두사람은 어릴 적 만난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이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어지지 못하고 끝이 나버린다. 그때 나와 박찬열은 함께 그 영화를 봤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공식을 말하는 것 같아서 영화가 좋기는 했어도 약간은 꺼림칙 했었는데, 박찬열은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게 흘리듯이 말했다.
아, 벚꽃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영화였는데도 벚꽃이 참 예쁘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와 박찬열은 어려서부터 거의 함께 자라다시피 하여 수많은 봄을 거치며 그러한 벚꽃들을 자주 봐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그 때 벚꽃이 보고싶다고 그랬을까? 봄 오면 보러가자, 나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첫사랑이 결국 이뤄지지 못하는 그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박찬열이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바라봤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의문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랬을것이다, 생각만 할 뿐. 왜냐고? 박찬열은 어느 순간 날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였더라, 호주라고 했던가. 뉴질랜드라고 했었던가. 아무튼 찬열이네 이모가 그냥 어느날 새벽에 휙 떠나버렸다고 했다. 백현이 너 얼굴도 안보고 갔었니? 걔가 왜 그랬을까. 이모는 많이 의아해했었다.
사실 이제는 알것같아요, 이모.
박찬열이 떠난지 어언 사년이 넘어가고있다. 엽서한장 전화한통 없는 무책임한 놈을 뭐라고 그렇게 좋아했었을까, 싶다. 그리고선 지금도, 널 걱정하고 좋아한다. 어디선가 밥은 잘 먹고 다닐런지, 혹시 길거리에서 잠들지는 않을런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몸매좋고 얼굴착한 누님을 만났을런지. 그런 소소한 생각들이 너가 없는 곳에서도 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네가 이십년지기인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버린 이유, 새파랬던 고등학생 시절 어느 겨울에 보여주었던 그 영화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아 너는 어렴풋이라도 알고있었다.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너는 어른이 되자마자 떠나가버렸다.
박찬열, 찬열아. 있잖아, 아주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니가 그렇게 매몰차게 떠났어도, 나는 여전히 널 좋아해.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철도에서 기차가 지나간 뒤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약간 아쉬워하다 다시 걸어간다.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슥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그 열정이 희미해져가는 것 뿐이다. 그 장면은 그런 의미를 지닌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박찬열 또한, 예전만큼의 열정은 떠오르지않는 첫사랑이다. 하지만 끝나지않을 첫사랑이다. 다만 희미해져가고, 가벼워지는 것일 뿐 마음 속의 그 존재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터였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일부러 빨리 살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 늦게 살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내가 가지고있던 박찬열 너에대한 열정은 어제보다 희미해졌고 가벼워졌다. 그러나 잊고싶진않다. 그 다음해 나와 함께 벚꽃을 보러간 그 자리에서 내게 지었던 애처로운 눈빛까지도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그때부터 였구나. 네가 내게 이따금씩 그런 눈빛을 지은 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끝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져갈 뿐이다. 내게 애처로운 눈빛을 짓던 박찬열은 오늘도 한걸음씩 내 곁에서 떨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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