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셰."
"뭐야 이 미친놈은…."
을씨년스러운 골목, 오늘도 조심히 자신의 거취에 가기 위해 몸을 사리던 남자가 흠칫했다.
"give me the money."
"뭐, 뭐…."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자신보다도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꽃무늬 와이셔츠, 무식하기 짝이 없게 넓직한 어깨, 사정없이 부스스하고 구불거리는 노란 머리카락. 중국 짱깨가 어디서 나대…. 남자가 푸스스 웃으며 그의 어깨를 퍽 밀쳤다.
"아리가또."
그가 손바닥을 쫙 피며 남자의 눈 앞에 덜렁댔다. 갈라져 있는 손금만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곧 코웃음을 치며 그의 손등을 내쳤다. 짝 소리가 나며 꽃무늬 와이셔츠 소매가 펄럭였다. 그가 따끔거리는 손등에 잠시 벙 쪘다.
"별 상스러운 놈을 다 봤네. 아씨, 다신 보지 맙시다."
"… …."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지나쳤다. 3월의 봄비, 아직 마르지 않은 흙바닥을 철벅철벅 지나가던 구두가 강제로 멈춰졌다. 뒤에서 목덜미를 잡은 그의 억센 손 때문이었다. 그는 놀라운 악력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자신 쪽으로 끌고갔다. 그리고 뾰루지가 난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니씨팔놈아."
예흥 In Romance
1
아침 여덟시. 길거리에 빨빨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초등학생들이 보인다. 품 안에는 좋은 냄새가 나는 반질한 노트가 있다. 3월, 봄 볕 따스한 날. 바야흐로 오늘인가. 기분 좋게 출근길을 걷던 경수는 곧 낯익은 가게 문이 보이자 미소를 지었다.
가게 Romance의 CLOSE 팻말을 OPEN으로 돌려놓은 경수가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기분 좋은 꽃내음이 문을 열자마자 물씬 풍겨온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향기였다. 경수는 그 내음을 온 몸으로 만끽하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온열기의 빛을 머금어 밤중에도 씩씩하게 자라준 꽃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곧 사각이는 익숙한 소리에 경수가 은근한 미소를 띄웠다.
"카이. 오늘도 잘 놀았어?"
꽃잎 사이로 귀를 쫑긋 세운 카이가 기지개를 키며 경수에게 다가갔다. 느릿한 그 걸음에도 기품이 서려있는 저 검은 고양이는 언젠가부터 로망스에 자리잡고 있던 도둑이었다. 맨날 꽃잎을 긁으며 장난치다 된통 경수에게 깨진 이후로 사죄하듯 경수의 주변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 그런 검은 고양이가 경수는 싫지 않았다.
"또 꽃잎 뜯어먹지는 않았지?"
카이의 입가를 매만지며 목을 쓰다듬어준 경수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 오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역시 지각인가. 사십분을 가리키는 고풍스러운 뻐꾸기 시계가 오늘따라 얄미워 보이는 경수였다.
가게 불을 키고 앞치마를 걸쳤다. 예흥의 이상한 취미로 인해 모든 가계의 장식품은 레이스가 달려있었다. 아니면 어딘가 공주풍이라던가…. 잠시 질린 표정을 한 경수는 곧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먼저 지난 밤, 가게 안으로 들였던 화분 몇개를 밖으로 내놓았다. 블라인드를 쳤던 쇼 윈도우를 올리고, 볕이 잘 들게 했다. 그 다음, 경수는 가게 구석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방 문을 열었다. 이곳은 화장실 겸 예흥의 쉼터였다. 언제나 경수를 부려먹고 예흥 자신은 이곳에 숨어 있었지…. 한숨을 쉰 경수가 화장실로 가 물뿌리개에 물을 담았다. 쫄쫄쫄 새어나오는 물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카이가 경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장님은 언제 올것 같니."
"… …."
"오늘은 또 어떤 명품을 사들였을까. 구찌 지갑? 아르마니 벨트?"
"… …."
"니가 뭘 알겠냐."
한숨을 쉰 경수는 곧 끝까지 차오른 물에 기암을 토하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잡념이 부른 참사였다. 결국 아까운 물을 조금 버린 경수 덕분에 카이의 발바닥이 조금 젖었다. 힘겹게 물뿌리개를 든 경수가 낑낑댔다. 조심스레 한 발자국을 떼며 앞으로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방이 넓어보이네…? 아까는 좁아 터졌는데. 훅훅대며 방문을 연 경수는 윈도우 밖에 보이는 느긋한 사장을 보고 또한번 기암을 토해야 했다. 찰박이며 경수를 따라오던 카이가 쿵 하고 떨어지는 물뿌리개에 흠칫했다. 경수가 손에 힘이 풀려 물뿌리개 손잡이를 미끄러트렸기 때문이다. 땀에 젖은 손을 주먹쥐던 경수는 곧 고개를 치켜들고 폐에 호흡을 모았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사장님!!"
"어, 경수. 좋은 아침이지."
경수를 발견한 예흥이 입에 있던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여유로운 자태에 또한번 속에서 천불이 난 경수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중국에서 살다온 탓에 약간 발음이 어눌한 예흥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예흥의 새하얀 손목에서 불가리 팔찌가 덜렁거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눈에 띄는것은 예흥의 반짝거리는 손톱이었다. 일부러 보여주려고 흔든게 틀림없어. 경수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간신히 웃어보였다.
"사장님, 네일…하셨네요?"
"모디 네일이랑 글리터 네일중에 고민했는데, 요새 모디네일이 그렇게 좋더라 해서. 몇 개 샀지. 예뻐?"
이젠 대놓고 손을 흔드는 예흥에 경수가 하하 웃었다.
"그나저나 사장님. 오늘도 지각 하셨어요."
"어, 미안 미안. 오늘 렌즈가 잘 안껴져서. 이해하지, 경수?"
개뿔도요. 이를 부득부득 갈아 없어질 것만 같다. 아마 가루가 되어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한 경수가 손을 허리에 얹었다. 역시 쓸데없는 근거로 지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예흥도 갈아 마셔버리고 싶었다. 후. 짧은 앞머리에 바람을 분 경수가 눈을 도륵 굴렸다.
괴짜 사장님은 조금 이상한 취미가 있다. 가령, 담배 세개를 한꺼번에 피는 묘기라던가, 여자 못지 않게 인조 속눈썹을 잘 붙이는 요령이라던가, 경수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명품 신상들을 싹쓸이 해오는 능력이라던가. 한마디로 농축하면 사치 부리기를 좋아했다. 또한 자신을 가꾸는건지, 변신하는건지 알 바 없는 신기도 있었다. 그 예로 지금과 같은 렌즈가 있다. 평소 녹색 써클렌즈를 자주 끼는 예흥이었다. 렌즈 자주끼면 눈에서 벌레 나오는데…. 경수가 꿍얼대어도 예흥은 들은 척 하지 않았다. 그런 예흥이 괴씸했지만 경수는 차마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첫째는 이미 해탈이요, 둘째는 인정하긴 싫었지만 아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검소가 생활의 모토였던 경수에게는 그런 예흥이 너무나도 신기했고 짜증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시금 차오르는 혈압에 카이가 경수의 눈치를 봤다. 복숭아뼈를 할짝이는 카이를 안아든 경수가, 턱 끝으로 물뿌리개를 가리켰다.
"벌이예요. 오늘 물주기 당번은 사장님."
"어제도 내가 했잖아."
"지각도 어제 했잖아요."
"불공평해, 경수."
"그럼 지각을 하지 마시던가."
신곡 노래 가사를 흥얼대며 카운터 의자에 앉은 경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 경수를 보며 예흥이 한숨쉬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자신의 입장때문이다. 결국 예흥은 소매를 걷어올렸다. 경수 자신은 낑낑대며 두 손으로 겨우 들어올렸던 그것을 예흥은 쉽게 들어올린다. 파란 핏줄이 보이는 그 손목에 어디서 그런 악력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카운터에 턱을 기대자 카이가 경수의 무릎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세를 정리해 카이를 쉽게 끌어안은 경수는 예흥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물도 갈아놓으시고."
"산세베리아에 몰아주지 말아요."
"괜히 발로 화분 차지 마세요. 그러다 깨진단 말이에요."
"이렇게 팍 팍! 뿌려주라고요!"
"경수가 해…."
결국 경수도 팔을 걷어올릴 수 밖에 없었다. 애꿎은 경수의 올바른 예가 된 팬지가 이슬을 머금었다. 그에 초롱초롱 꽃잎이 빛났다. 카이는 그 꽃잎의 자태를 보며 꿀꺽 입맛을 다셨다.
"먹는거 아니야."
"경수도 그러는거 아니야."
"사장님은 좀 가만히 계세요."
진짜.
경수는 저기 멀리 있는 찔레꽃부터 수선화까지 온 몸을 비틀어가며 물을 긁어주었다.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한계까지 까치발을 드느라 종아리가 아렸다. 허리를 툭툭 친 경수는 곧 물뿌리개를 텅그렁 내려놓았다.
"명색이 사장이면서 왜 꽃에 물주기는 못하시는데요."
"난 꽃은 좋은데, 귀찮은건 싫어."
"그러면서 퍽이나 쇼핑은 잘도 하시네요."
"쇼핑은 내 삶의 낙이니까 그렇지."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불가리 팔찌를 쓰다듬는 예흥이 볼 만 했다. 치미는 웃음과 혈압을 감당하지 못한 경수가 결국 예흥에게 일침을 놓았다.
"과도한 사치는 독이라구요."
"과도한 검소도 스트레스야, 경수."
예흥은 풀 죽은 목소리로 흙 묻은 셔츠를 털어냈다. 그 조금 몸을 움직인 것 가지고 피곤하다는 타령을 부린다. 설렁설렁 카운터에 앉아 담배를 꺼내든 예흥이 담배연기를 빙자한 한숨을 토해냈다. 예흥은 지독한 골초였다.
"담배도 꽃집에선 피지 마세요. 손님들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요."
"손님이라곤 그 고딩밖엔 없잖아, 우리."
"새학기 시즌이어요. 초딩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경수가 팔을 크게 벌리며 허우적댔다.
"그래봤자 초딩이야. 담배보고 눈 반짝 빛내는게 어린애들이지."
자못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인 예흥이다. 한두번 쉽게 볼 수 없는 예흥의 낯빛에 경수가 흠칫했다. 그러나 곧 예흥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밝은 낯만 있었다.
"그래도…."
아까 예흥의 다른 면을 목격한 경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사실 경수는 반박할 거리가 몇백가지나 있다.
"담배는 내 삶의 낙이야."
"쇼핑은 어쩌시구요."
"둘 다지 뭐…. 그나저나 그 고딩 안와? 땡땡이 치면서 잘 오더만, 여기."
로망스.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예흥에게 경수는 얼굴을 붉혀보였다. 실업계 고등학생인지 항상 오후 여섯시 쯤, 교복을 입고 꽃집에 들르는 청년이 있다. 이름은 변백현이라 했다. 언제나 경수에게 껄쩍거리며 짙은 농을 던져대는 백현에 경수는 있는 정 없는 정 다 든 상태였다. 물론 예흥도 마찬가지였다. 백현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카이 빼고는 말이다.
"지금 이시간엔 안와요, 걔."
"아니야, 너 저번에 서울에 도매하러 갔을때는 오전에도 왔었어."
"…관심 없어요."
"에이, 혹시 몰라. 지금 올지."
예흥이 팔꿈치로 경수의 허리를 퍽퍽 때렸다. 아프다. 유난히 큰 눈두덩이에 물기를 머금은 경수가 신음했다. 그 때였다.
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경수는 예흥을 밉지 않게 째려보다, 곧 가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현은 아니구나. 혹시 몰라서… 경수가 얼굴을 붉히다 몸을 일으켰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어서오세요, 로망스 입니다!"
눈을 초승달로 만들며 활기차게 인사를 한 경수의 표정이 조금 굳어있다. 그러고 보니 경수의 고개가 조금, 아니 많이 꺾여 있기도 하고…. 관심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경수의 배를 콕콕 찔렀다. 경수가 갑자기 일어선 탓에 넘어진 카이가 경수의 복사뼈를 긁어댔다.
"사장님, 저 손님좀 봐요…."
경수는 곧 예흥의 단단한 어깨를 흔들며 속삭였다. 뭐길래 그래. 예흥의 녹색 눈이 뒤를 향했다.
짝 짝, 그가 씹고 있던 껌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풍선 껌인듯 달콤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그 향기에 카이가 킁킁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카이의 머리도 위로 꺾여야 했다.
"니하오."
구불구불해서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은 노란색 머리카락, 거의 185는 가뿐히 넘어보이는 장신에, 꽃무늬 셔츠. 자랑스럽게 빛나는 용무늬 셔츠까지.
중국 짱깨?
예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서 경수와 카이의 고개가 그렇게 치켜들어졌구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어서면 모르겠지만, 역시 큰 것은 마찬가지였다. 평소 키에 대해 열등감이 없지 않아 있던 예흥이 입매를 우그러트렸다.
그는 경박스럽게 껌을 짝짝 씹었다. 다리를 떨며 가게 안을 살피다, 카운터에 못박힌 듯 서있는 경수를 발견했다. 픽, 그가 잘생긴 입꼬리를 올렸다.
"손님, 뭐, 뭐 필요하신거라도…?"
말을 더듬은 것에 얼굴이 빨개지며 경수가 입을 막았다. 그는 경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예흥은 쿵쿵 울리는 그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브랜드가 어디 것인지도 모르는 싸구려 구두. 앞 코가 벌써 까져있었다. 예흥이 고개를 올려 남자그의 바지, 벨트, 옷 매무새를 점검했다. 나오는 결론은 모두 싸구려에, 센스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촌티냄새! 예흥이 팍 인상을 썼다.
그리고 아마 아르마니의 '아'자도 모를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올렸다. 그는 어느새 카운터 앞에 앉아있는 예흥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예흥의 인기척을 느낀듯 문득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의 봄 볕에 찌든 검은색 눈과, 예흥의 인조적인 녹색 눈이. 예흥은 잘생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잘생기긴 했지만, 내 취향이 아니야.
예흥이 그릉대고 있는 카이를 바라보다, 곧 자신을 찌를 듯 한 시선을 느꼈다. 뭐지? 예흥은 눈을 굴렸다. 경수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카이? 아니다. 방금 눈이 마주친 그의 눈빛일 것이다. 왜 자꾸 쳐다보는거지? 내 루이비통 자켓이 그렇게 맘에 드나?
알 수 없는 호기심과 자만심이 예흥의 고개를 들게 했다. 예흥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예흥은 아주 조금 벙 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이 아주 황홀하게 빛나며 예흥을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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