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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말했었다.

'신은 그사람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신대.'


아니, 절대 그럴일없어. 그건 거짓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이 거지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테니까.


추워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그 낯색만큼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간위에 위태롭게 올라서있는 저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는듯한 서울의 야경에 괜스레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아..

 

 

한숨을 쉬자 온도라도 말해주는듯이 하얀입김이 공기중으로 분산되었고, 점점 시려오는 손과발은 마치 저의 죽음을 막으려는
마지막 발버둥 같은 느낌에 언뜻 두려움이 서려왔다.


하지만 잊을수 없는 그 한마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 한마디.


'죽어.'


낮게 읊조리는, 그의 진심이 묻어난 그한마디가 저를 이 위태로운 절벽앞에 세웠다.

그래, 내가 죽어줄게. 난 항상 너에게 약점 잡혀 살아왔으니까.

이젠 내가 너의 약점이 되어줄게.

 

 

네가 만족하길 바랄게. 찬열아.

 

 


흘려내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서울의 야경속에 몸을 날렸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즐거웠던 기억들도 이제는 부질없는 옛이야기였다.


그렇게 종인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신은 없다.

W. EPIK


"안녕?"

새하얀 공간, 새하얀 사람이 내게 물었다.


"저, 저요?"

인간인지 신인지 천사인지 도무지 가늠할수 없는 그의 생김새에 움찔한 저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가 크게 웃었다.


"너 되게 재미있는 애구나? 내 이름은 오세훈. 넌.."

"김.."

"김종인이고. 19세. 오~ 고3에 죽었네? 뭐, 성적 같아보이지는 않고, 부모님 일찍 돌아가시고, 나이차이 많이 나는 큰형이랑
같이 살고, 친구도 몇몇 있네."

그는 나에 대해서 많은걸 아는걸 보니 신인가보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단정지었다.

생각보다 더 사람처럼 생긴 그의 생김새가 놀라웠지만, 그보다도 정신병원에 온것만 같은 이 눈부신 새하얀 풍경이
눈에 거슬려 괜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않는 눈을 찌르는 풍경은 사라지고, 어쩐지 익숙해보이는 길목을 따라,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 내 소개가 늦었구나. 내 이름은 오세훈. 뭐, 아까 말했고, 난 저승사자야. 대장은 아니고.. 한 3등쯤 되."

 

"몇분 계신대요?"

 

"세..세명. 크흠!!. 그런건 별로 안중요하고, 어쨋든 이번에 너의 죽음을 맡게 되었어.
보통 사람들은 나같은 3대 저승사자를 만나지 않고 그냥 죽지만 말이야..
그런데, 당한것도 많고 억울한것도 많고.. 한이 많다는거지. 또, 특히 내 담당은 자살.. 그거니까.
한마디로 네가 영혼까지 사라지기전, 딱 일주일 동안 네가 하고싶은일들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거지."


"어떻게요?"

 

"보통은 내가 인간세상에 인간으로 변장해서 너 대신 하고싶은 일을 이뤄주는게 다반사지."


아..
만화에서만 봤을법한 일이 저에게도 일어나는것 같아 옅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랜만에 입꼬리가 올라가자 몸이 적응되지 않은듯 어색했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던게..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거에요?"

 

"음.. 네 이야기를 하러가지."

 

"누구한테요?"

 

"내 보스한테. 널 도와줄지 말지 너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거든. 보스는 별로 안쎄고 그옆의 귀여운 형님이 실세니까 알아서
그 분 기분 맞춰. 나도 왠지 널 도와주고 싶으니까."

 


그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건지 세훈은 저혼자 목을 가다듬으며 앞장서 걸었다.

 

 

생각보다 죽음은 별로 무섭지도 않은거구나.
그리고 내가 살았던 세상보다 훨씬 공평하구나.

죽기전의 기분이 뛰어내릴때의 기분과 달라서 다행이야.
마지막 순간에 웃을수 있어 다행이야.

 


종인은 아까보다 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세훈을 얼른 뒤쫓아 갔다.

"가 같이가요!! 신님!!"

 

 

 


*

 


그의 말 그대로였다.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은 순하디 순한 사슴같이 생겨 생글생글한 웃음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그옆의 귀여운 외모와는 다른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아까 세훈이 말한 그대로였다.

괜히 긴장이 되었지만, 복수를 해도 안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계속되는 적막에 답답한 종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야기.. 시작할까요?"

"네. 시작해주세요."


그제서야 그들이 나의 마음이 준비가 될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히, 제 인생이 별거 있는건 아닌데요. 그냥 박찬열이라는 애를 좋아했어요. 좀 많이.
그래서 막 괴롭힘 당하다가 .. 그 새.. 아니 , 그애가 협박해서 그냥 그것때문에 뛰어내린거에요. 그.. 음.. 빌딩 옥상에서"


"하..그게 끝?"

어이없다는 듯한 세훈의 표정에 더 말을 붙이려고 애를 써봐도 입에서만 맴돌뿐,
저의 이야기는 이게 정말 다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게 끝이었다.

 

 


"죽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두렵죠?"

 

차가운 목소리가 종인의 눈길을 돌렸다.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냉기가 품어져나오는 민석의 질문이 종인은 정곡을 찔렀다.

 

 


"다시 기회를 드릴게요."

 

아까보다는 냉기가 덜한 그의 한마디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내가 왜 저승까지 와서 나를 변명해야하는걸까.

왜 나의 죽음에 대해 변명해야하는 걸까.

 

 


"흐.. 그.. 그새끼가 제가 좋아하는걸 흡..으.. 이용해서 괴롭혔어요. 막.. 흐.. 그냥 수치스러운 짓들도 많이.. 많이..윽.. 당하고
그냥 그랬는데.. 그건 참을 수 있었는데.."


그래, 그깟 괴롭힘정도는 참을 수 있었어. 근데..


"협박을 .. 협박을 했어요. 저희형에게 말해버릴거라고. 저밖에 모르는 그런 형한테 그렇게 잔인... 흐.. 잔인하게
 말할그..거.. 거라고.. 흐.. "


그다음엔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기도 싫은 그 말이 뇌속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눈물을 흘리다 못한 분노가 숨을 쉬는것조차 방해하는 느낌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만해."

"아니, 계속하세요."

세훈에 말림에도 불구하고 민석은 끝까지 듣기 위한 눈빛을 종인에게 보냈다.


"어떻게 어어,..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무슨일을 하면 네가 말하지 않을거니.. 그렇게 부,, 하아,, 흐,. 부탁했더니.."

 

그애가 그렇게 말했어요.
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죽어."

 

 


종인이 마지막 한마디를 입밖으로 내자 결국 눈물을 참던 민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림에 따라 눈물범벅이 되었다.

역시,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종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말한마디에 신경을 세워 말을 했더니 순간 기력이 쇠한 느낌이 들었다.

죽었는데도 고통을 똑같구나.


마음의 고통도. 육체의 고통도.

그걸 피해 이곳으로 도망친건데..


쓰러지다시피한 종인을 세훈이 달려가 받들었다.


"우선 쉬자."

 


종인은 세훈의 품에 기대 그대로 스스르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도 온기에 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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