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닫힌 창문은 제때 기름칠을 받지 못해 그대로 굳어버렸다. 안간힘을 써야 겨우 미약한 바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열릴 뿐이었다. 그래도 아예 열지 않는 것보단 나아, 여주는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창문부터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병실 안 살아 숨쉬는 것은 저 혼자 뿐이라는 착각이 들어서다.
일주일 전, 몇 달 전, 그것도 아닌 1년 전과 비교해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가에 내려 앉은 먼지, 침대 시트의 주름 개수, 하다 못해 거기에 누워있는 아이의 머리카락 흩어진 모양새마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삐-삐- 하고 간헐적으로 울리는 기계음만 빼고는 모두 멈춰버린 불쌍한 공간.
여주는 마지막으로 물병에서 시든 꽃을 꺼내 버린 뒤 품 안에 있던 싱싱한 꽃 한송이를 새로 꽂아넣었다. 식물이라도 하나 놓지 않으면 병실 전체가 죽어버린 느낌이 들어서, 몇 달 전부터 없는 돈 털어다가 꽃을 한 송이씩 사서 오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떤 날은 새빨간 장미, 또 어떤 날은 노란 개나리. 딱히 의미를 두진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집어오는 편이었다. 여주는 새하얀 꽃잎을 어루만지다 문득 꽃집 알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남자 친구분한테 잘못하신 게 있나 봐요. 여주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알바가 당황해서 말을 덧붙였다. 그 꽃 꽃말이 사과, 용서 뭐 이런거라 소중한 사람한테 사과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사가시거든요.
아. 그런가요. 여주는 탄식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물기 머금은 줄기를 매만지는데 누군가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꽃으로 사과가 된다면 백송이, 이백송이라도 가져다 바치며 용서를 구할텐데. 안타깝게도 여주와 아이의 악연은 고작 꽃 하나로 해결하기엔 너무 징그럽게 얽혀있었다.
그래도 그 후론 매번 그 꽃을 사서 창가에 놓아두는 이유는,
"너도 미워할 사람은 있어야지."
닿지 않을 사과라도 반복해야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에.
순환고리
w. 악어새
태형은 그 일 이후로 질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술, 담배에 손을 대며 친구들과 히히덕 거리는게 전부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이제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가 다 되었다. 여주는 태형이 어떻게 살든 제 알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태형이 분노하는 이유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여주의 오빠는, 태형과 그 여동생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유 없는 미움이라면 나서서 그 이유를 만들어 줄 의향도 충분히 있건만, 너무나도 의도가 명백한 괴롭힘이라 여주는 반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침마다 책상 서랍안에 널부러진 커터칼 심이나 곤충의 시체를 치우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다니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일진이 사나운 날에는 기 센 여자애들 몇 명이 대놓고 욕을 하거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교생 앞에서 우유세례를 맞는 건 처음 있는 일인데. 여주는 흥건히 젖은 제 블라우스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몇 초 뒤에 어깨 쪽이 아려왔다. 누군가가 여주에게 마시다 만 우유곽을 던진 것이었다. 여주가 두리번 거리자 우유를 던진 장본인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여주에게로 다가왔다.
"와, 미안. 장난으로 던진 건데 진짜 맞을 줄은 몰랐네. 괜찮아?"
급식실에서 우유를 뒤집어 쓴 찐따라. 객관적으로 봐도 재미난 구경이기는 했다. 여주는 제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씨발. 오빠라는 놈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법이 없어. 뒤지려면 혼자 곱게 뒤지지 왜 하필 김태형 같은 놈을 건드려서.
여주는 시비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급식도 다 먹어가던 참이니, 한시라도 빨리 급식실을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근데 그렇게 가게? 너 지금 속 다 비치는데."
"괜찮으니까 비켜줘."
"치마 얼룩은 빠지지도 않을 텐데 어떡해."
"괜찮으니까.."
"우리 여주, 고아라 교복 살 돈도 없을텐데 큰일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 말인데 우유 때문에 몸이 찝찝하니 여주는 순간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해버리고 말았다. 굳은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학생을 노려보니 주변에서 오오, 하고 환호성이 들렸다. 아예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여주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패거리도 있었다. 이름 모를 여학생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커녕 아예 팔짱을 끼고 여주 앞을 막아섰다. 여주는 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던데. 제발 오빠 꼴은 면하자.
"응? 여주야. 교복 살 돈은 있어?"
"......"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독하다. 이 지랄 떨어도 자퇴는 커녕 꾸역꾸역 학교 나오는 거 보면 너도 보통 독한년은 아니야."
"......"
"..애미애비 없는 것들은 이래서.."
결국 여주는 들고 있던 급식 판을 앞에 있던 학생에게 모조리 쏟아부었다. 급식실이 순간 싸하게 얼어붙었다. 잠시 뒤 어디선가 미친- 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을 기폭제로 급식실 안이 전에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야 봤어? 김여주가 OOO한테 급식판 쏟았어! 몇몇 일진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주에게 시비를 걸던 학생은 잠시간 벙쪄있다가 이내 상황파악을 한 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수치로 범벅이 된 표정이었다. 학생이 손을 들어올렸다. 뺨을 내려칠 모양이었다. 한대 쯤은 맞아줘도 이기는 장사같아서 여주는 저항 없이 후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화 못참고 뛰쳐나가서 그 사단을 낸 오빠나 별 같잖은 말에 핀트가 나가서 급식판를 쏟아부은 저나 똑같이 병신이네. 눈을 감고 묵묵히 다가올 아픔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제 고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여주가 눈을 뜬 순간 누군가 뒷쪽에서 여주를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본 여주는 저를 잡아챈 누군가를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이었기 때문이다.
보건선생님은 우유에 절여진 여주의 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덕분에 여주는 텅빈 보건실에서 느긋하게 찝찝한 몸을 씻고 젖은 교복 대신 지민의 체육복으로 갈아입을 수도 있었다.
"내 체육복이 어디갔나 했는데,"
"......"
"여기 있었구만?"
5교시 수업은 이미 글렀으니 남은 20분 동안 핸드폰이나 하다 가려던 여주의 계획은 갑작스러운 지민의 방문으로 허사가 되었다. 지민은 노크도 없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여주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무언가를 건냈다. 야, 마셔. 여주는 그것을 무심코 받아들었다가 내용물을 확인하고 질색을 했다. 아, 넌 내가 우유 때문에 그 지랄을 떨었는데 또 우유를 들고 오냐. 진짜 센스없다. 여주는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데워진 딸기 우유를 탁자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하나 뿐인 친구가 저 챙겨주는 정성이 갸륵해서.
"근데 너 내 체육복은 어디서 찾은거야? 김태형이 빌려가서 나도 어딨는지 몰랐는데."
"김태형이 줬는데?"
지민은 당당한 여주의 대답에 잠시 얼이 빠졌다.
"..걔가 그걸 직접 너한테 줬다고?"
"응. 왜?"
"걔 너 싫어하잖아."
"그냥 싫어하는 건 아니지."
존나게 싫어하지. 여주가 덧붙였다. 지민은 할 말을 아예 잃어버리고 침대시트만 어색하게 만지작 거렸다. 학폭 가해자가 피해자를 남몰래 챙겨준다는 훈훈한 미담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잘해줄 거였으면 처음부터 괴롭히질 않았겠지.
"야 있잖아 내가 전부터 생각한건데.."
"......"
"너네 존나 미련 남은 이혼 직전 부부 같아."
"미친."
박지민 비유 봐. 여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깔깔 웃어댔다. 혹시 괜한 오지랖일까 고심해서 말을 꺼낸 지민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아, 김여주. 쳐 웃지만 말고.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니네 대체 무슨 사이냐?
"니가 반쯤 제대로 짚긴 했다. 미련 남은 이혼 직전 부부. 딱 그거네."
사실 쌍방 미련은 아니고 한 쪽만 삽질하는 거지만. 마지막 말은 구태여 내뱉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여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심히 체육복을 건내주던 태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서 갈아입어. 감기 걸리지 말고.
어쩜 너는 그렇게 다정해서. 미안하지 않아도 미안하게, 미워도 미워할 수 없게.
-하나만 해.
학교 뒷뜰은 그날따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여주는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태형이 건네는 체육복만 물끄러미 쳐다보다 대뜸 그런 말을 건냈다.태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 쪽 눈썹을 올리고 여주를 바라볼 뿐이다. 잘해주든지 괴롭히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여주는 이 말을 덧붙히려다 말고 그냥 말랑한 입술만 송곳니로 짓이겼다.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뭘 하나만 하라는지, 모르겠는데.
싱그럽게 웃는 태형은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너네 싸우든 사귀든 하나만 확실히 해라. 중간에 낀 나만 살 떨리게."
고개를 숙이고 이불 끝자락만 만지작대는 여주를 보고 지민이 한소리 했다. 김태형, 너 우유 뒤집어쓴거 보고 손까지 달달 떨면서 빡쳐하던데. 정작 건내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지만. 괜히 애 마음만 심란해질 것 같아서 지민은 벙긋대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근데 그 새끼는 지가 주동자면서 막상 건들면 존나 싫어하네. 뭔 심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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