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왜 내 알람은 일을 안 해!"
이놈의 알람 앱을 지워버리든가 해야지. 황금 같은 일요일 아침, 김태형과의 약속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양치질을 벅벅 해대는 중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맞춰둔 시각에서 족히 20분은 오버해 기상하고야 말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서 확인한 내 얼굴은 예상대로 잔뜩 피곤에 쩔어 오만상이었다. 이 새끼는 기껏 제대해서 만날 사람이 나밖에 없나. 한없이 넓게만 보이던 김태형의 마당발 인맥에 의심이 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한참은 빠듯할 것 같은 쎄한 느낌에 황급히 핸드폰을 보자 액정엔 선명히도 'AM 10:16'이 찍혀 있었다. 망할, 역시는 역시랬다. 축지법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11시까지 압구정에 도착하냐는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홍길동이 아니기에 축지법 따위 사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양심을 사뿐히 즈려밟고 쓸데없이 약속 시간을 이르게 잡은 김태형을 탓하는 수밖에. 아, 몰라. 살짝 늦지 뭐.
딩-동, 언제 화장을 하고 언제 옷까지 걸치냐며 온갖 짜증과 함께 신명나게 김태형을 씹어대던 중 설상가상으로 인터폰까지 울려댄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구지. 물기 젖은 발로 뛰쳐나가자 인터폰 너머로 힐끗 보이는 말간 얼굴이 낯설었다. 주문한 택배가 있었던가, 지난 날을 회고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정신 없는데 환장하겠네. 물고 있던 거품을 뱉은 후 대충 칫솔을 입 안에 욱여넣고 고개를 갸웃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
열린 문 사이로 마주한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의 벙찐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멍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통 용건을 말하지 않는다. 주말 아침부터 느닷없이 찾아와놓고 용건은 말하지 않는다라.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앞의 남자에 심히 당혹스러웠다. 왜 말을 안 해? 내가 얼굴을 너무 내밀었나? 지금 내 몰골이 그렇게 충격적인가? 나 그래도 세수는 했는데? 어째서인지 미동도 없는 남자에 의문을 품고 저기요, 를 꺼내려는 순간 간발의 차로 남자의 입이 한 박자 먼저 열린다.
"...어제 옆집에 이사 왔어요."
"아... 그러세요."
어제 집을 나설 때 밖에서 이삿짐 차가 시끄럽게 굴던 것도 이 남자 때문이었나. 머릿속으로 어제의 상황을 그려내던 중 저 남자와 나의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가 우짖으며 지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내 그의 원인이 조금 전 나의 대답과 그를 따르는 무미건조한 말투라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어 칫솔을 문 채 입꼬리에 경련이 올 만큼 사람 좋은 척 활짝 웃어 보이며 45도의 칼각을 맞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 남자, 내 인사를 보더니 되려 저쪽에서 크게 눈을 뜨며 당황한 기색을 보이곤 90, 아니, 정확히 117도의 인사로 대응해온다. 뭐야? 순간 초딩 때 쓰던 롤리팝폰이 뇌리를 스쳤다. 하마터면 예의는 밥 말아 먹은 채 물을 뻔했다. 그쪽 혹시 폴더폰이세요?
"아아, 이사 오셨구나.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저... 이거."
두 눈을 꿈뻑이며 눈 앞의 남자를 멀뚱멀뚱 바라보자 두 손으로 불쑥, 무언가를 내민다. 얼떨떨하게 받아들어 이 물체의 정체가 무엇인가 보아하니, 다름아닌 떡이었다. 백설기잖아? 저 백설기 개좋아해요. 어떻게 아셨죠. 자취를 시작한 후로 떡을 입 근처에 대본 것은 손에 꼽아볼 만큼 적었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나의 철학에 따라 여전히 물고 있는 칫솔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마운 마음에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감동에 찬 눈빛을 힘껏 발사하고 싶었으나, 잠깐 사이에 파악한 저 남자의 성격상 나의 뜨거운 시선은 심히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판단해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것에 그쳤다.
"떡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조금 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와 달리 폴더 인사 대신 빠르게 고개만 까딱하곤 자리를 뜬다. 곧 쿵, 옆집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번엔 내가 벙쪘다. 방금 뭐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영문 모를 떡을 획득했을 뿐이고. 요즘도 이사 오면 떡을 돌리나.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친구렷다. 아직 뚜렷이 잔상에 남아 인상 깊다면 인상 깊었던 동그란 뒷통수와 내 손에 들린 백설기를 번갈아 저울질하다 생각했다. 특이한 사람이네.
-
"참 빨리도 온다."
"진짜 미안하다니까..."
"야. 너 어제 라면 먹고 잤지."
"와씨, 개소름.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얼굴 다 부었구만. 화들짝 놀라는 나를 유심히 뜯어보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이윽고 빵 터진다. 아, 존나 얄밉다. 눈을 감기 전 신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들어 준다 하면 반드시 김태형을 딱 죽기 직전까지 패게 해달라 빌 것이다. 당장이라도 저 자식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어버린 나였기에 김태형의 갈굼을 얌전히 받아낼 뿐이었다.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곤 지금이 몇 시냐, 싸늘하게 묻는 김태형에게 쫄아 두 눈 딱 감고 "아잉, 김 병장님!" 하고 애교를 부린 몇 분 전 나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다. 그런 나를 벌레 보듯 경멸의 시선을 보낸 김태형 몰래 욕을 읊조린 건 비밀이다. 시발. 토 쏠려. 내가 진짜 오늘만 참는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어 젖히던 김태형이 분노로 떨리는 나의 손을 보고는 움찔해 얍삽하게 화제를 돌린다.
"나 만나는데 뭐 하러 머리까지 꼬고 왔어."
"미친 놈아, 너 만나려고 꾸민 거 아니거든?"
"그럼 누구 보여 주려고."
"...이따 저녁에 선배 만나기로 했는데..."
결국 지인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며 김태형을 만나러 달려오던 중 도착한 선배의 미안하다는 카톡이 떠올라버렸다. 결혼식이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요즘따라 왠지 멀어져버린 것만 같은 석진 선배에 조금은 서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나의 한숨 소리에 바닥을 보며 뒷목을 긁적이다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 보고 묻는다.
"아직도 그 형이랑 썸?"
아니면 짝? 그 뒤를 잇는 김태형의 마지막 말에 그만 기분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해버린다. 그러게, 이게 대체 썸이냐 짝이냐. 선배에게 보여 주고 싶어 고데기로 예쁘게 다듬고 온 머리카락도,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와 치마도, 아껴 신으려 산 제법 비싼 구두도 그저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후잔가 봐. 우물쭈물대며 쉬이 대답하지 못하다 밀려온 우울에 그늘이 진 내 얼굴을 잠시 말 없이 내려다보더니 쩝, 소리를 내곤 "가자." 라며 그대로 내 등을 쭉 민다.
"아, 밀지 마!"
"왜. 발 아파?"
"알면 좀 놓지?"
"그러게 평소에 잘 신지도 않는 구두를 왜 신어선."
"신경 꺼."
"너 늦어서 팝콘 쏘라고 하려다 오늘은 그냥 오빠가 쏜다."
"지랄. 오빠 같은 소리 하네."
"콜라, 사이다."
"......사이다."
핀잔을 주면서도 대답은 야무지게 해내는 내가 웃긴지 피식, 웃는다. 뭐 인마. 꼽냐. 직원이 건넨 사이다 두 잔과 카라멜 팝콘을 안아들곤 턱 끝으로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키며 시간이 다 되었다는 김태형의 말에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김태형에게서 뺏어 든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생각했다. 오늘은 사이다가 필요한 날이라고. 그래, 문득 선배 생각으로 가득차 답답해진 가슴이었기에 오늘은 역시 사이다가 필요했다.
.
.
.
나름대로 재밌었던 영화를 보고 나와 주변의 아무 카페나 들어가자는 합의 끝에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가 김태형 아니랄까 봐 심기에 거슬리도록 짖어댈 준비를 한다. 잊지 않고 팜플렛을 챙기는 내 옆에 달라붙어 다짜고짜 "너 연기 잘하더라." 라는 뜬금포를 쏴 죽일 듯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김태형을 돌아보았다. 무슨 사유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냐 물으신다면, 오늘 본 영화는 SF 몬스터물이었기 때문이다. 괴물들만 쏟아져 나오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아까 영화에서 보스 너 닮아서 깜짝 놀랐잖냐. 언제 영화까지 찍었나 하고. 우리 ㅇㅇㅇ는 아주 못 하는 게 없어."
"뒤질래? 어? 진짜 뒤지고 싶어?"
"어쩌냐. 난 일찍 갈 생각이 없어서."
"...그래. 하긴 너 보면 열 뻗쳐서 내가 홧병으로 너보다 먼저 갈 듯."
이참에 할리우드로 진출하자는 김태형을 가볍게 무시해 이끌고, 대충 눈에 띄는 스타벅스로 들어가 주문 후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화에 나온 보스 몬스터 이야기로 멈출 줄 모르는 김태형의 입에 불을 뿜으며 쩌렁쩌렁 괴성을 지르던 스크린 속 괴물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마 인간과 사슴벌레가 반씩 섞인 비주얼이었지. 그 끔찍한 혼종이 나를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반박하려 했으나 결국 눈을 감고 체념했다. 말을 말자. 저놈은 늘 조금이라도 못나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오면 "어, 너 닮았다!" 하며 손가락질 하기 일쑤였다. 누가 보면 내가 천의 얼굴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대체 이 새끼의 정신 연령은 몇 살이란 말인가. 자포자기한 내 모습에 낄낄대다 그런데-, 하고 느닷없이 턱을 괴며 목소리를 까는 김태형에 절로 귀가 쫑긋 서 눈을 치켜떴다.
"넌 대체 진전도 없이 몇 달 째냐 이게."
"응... 그러게..."
"아니, 우울해하라고 물어본 건 아니었는ㄷ..."
"……."
"......데."
아까보다 더욱 시무룩해진 내 얼굴을 보곤 그만 답답하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김태형이었다. 너 같으면 그 소리를 듣고 안 우울하겠냐. 하긴 진전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고민을 토로할 때면 '썸남'이 아닌 '짝남'으로 선배를 지칭하는 나였으니까. 차라리 멈춰 있었으면 다행이게. 진전은 무슨, 석진 선배와 나의 관계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었다. 딱히 선배가 나를 멀리하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그저 내가 느끼는 미묘하게 변한 선배의 태도가 말해 주고 있었다. 선배와 나의 사이에 벽이 생겼음을.
"어디 한 번 카톡이나 좀 보자."
"뭐? 그걸 네가 왜 봐?"
"나한테 숨길 게 뭐가 있냐. 너네 집 냉장고 속에 있는 오렌지 주스 유통기한도 알아 내가."
"맞혀봐. 언젠데?"
"2018년 7월 22일."
......잠깐만. 맞는 것 같아. 냉장고 속 미닛메이드 오렌지의 뚜껑에 찍힌 숫자들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나열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 김태형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한 발짝 의자를 내뺐다. 쫄지 마, 찍은 거야. 경계의 의미로 밀어 뻗은 손바닥을 확 잡아 내리며 그걸 믿냐는 듯 한심하게 바라본다. 결국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제일 잘 안다며 석진 선배의 카톡으로 선배의 속마음을 파악해 주겠다는 구실로 내 핸드폰을 거두어가는 김태형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있는 힘껏 쏘아봐 주었다.
호이호이♡
ㅇㅇ야 미안.. 아무래도 결혼식이라 뺄 수가 없을 것 같네ㅠㅠ 오전 11:8
다음에 꼭 더 맛있는거 사줄게 오전 11:9
선배의 사과에 괜찮다는 말과 함께 보낸 나의 사근사근한 답장을 보고 눈쌀을 찌푸리더니 오그라든 손을 쥐고 ㅇㅇㅇ 말투 좀 보라며, 속이 안 좋아졌다며 난리를 치는 모습에 또 다시 주먹이 울었다. 석진 선배가 보낸 카톡을 그대로 읽어내리던 김태형이 "야, 근데 호이호이는 뭐냐?" 라며 내가 저장한 선배의 이름을 가리켜 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버무리자 대답을 재촉한다. 결국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호이호이'로 저장하면 선톡이 온다는 미신을 들었다 고백하자 습관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그래서 효과는 있었냐는 김태형의 물음은 조용히 씹었다. 뭐,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난 그깟 미신을 속는 셈 치고 믿을 만큼 선배가 간절했다-, 이 말이다. 그래, 김태형 개자식아. 웃어라 웃어.
"됐고 선배 마음은 어떤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에."
"글쎄. 모르겠는데?"
"허, 볼 거 다 봐놓고 밑장빼기냐?"
"진짜 모르겠는데 뭘 어떡해. 그래도 이번엔 일 생겨서 이러는 거지, 너 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정말?"
"봐봐, 다음에라잖냐. 진짜 다음에 만나자는 거지. 형이 지키지도 않을 말 괜히 하는 사람도 아니고."
휴우, 나를 피하는 것 같진 않다는 김태형의 말에 마음의 짐을 덜고 그제서야 편한 숨을 내쉬었다. 허나 여전히 꿰뚫어 볼 수 없는 석진 선배의 속마음에 물음표를 띄우게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저 나름 썸 타고 있는 거라 생각해왔던 것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동안 나를 스쳐 지나온 몇 없는 남자들의 마지막 말은 늘 '더 이상 너를 봐도 설레지 않아' 였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를 봐도 더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사람을 붙잡을 수도 없었기에 저 끝은 참으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자존감이 꺾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선배도 나에게서 관심을 접은 걸까. 요즘엔 어째서인지 수업이 겹칠 때가 아니면 전처럼 자주 마주치지도 못했다. 근 몇 개월간 선배만 바라보며 가슴을 졸인 스스로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태형아..."
"엉."
"내 인생에 봄은 안 오나 봐..."
"뭐, 그런가 보지."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죽어도 위로는 안 해 주지. 정녕 다음 생이 답이란 말인가. 저의 이번 생은 틀렸나요. 이대로 확 수녀나 돼버릴까. 누구는 절절하게 가슴 앓이를 하고 있는데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만 쪽쪽 빨아대는 모양새가 퍽 얄미워 말 없이 노려보자 그제서야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 하더니 한 소리 거든다.
"올 거야. 설마 눈만 죽어라 내리고 꽃은 안 피겠냐."
"……."
"누가 응원하는데. 암, 그렇고 말고."
"...말은 잘해요."
"얼굴도 잘해."
"야, 그러고 보니까 너 머리 다 길렀네?"
"당연하지. 전역한 지 세 달이나 됐는데."
그 머리색 안 질리냐? 어, 안 질려. 인정하기 싫었지만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씨익, 웃는 김태형은 더럽게도 잘생겼다. 2년 전 이맘때였나. 김태형이 나라의 부름에 응답해 머리를 밀러 간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의 난 실컷 놀릴 심산으로 따라갔던 미용실에서 놈을 놀리긴 커녕, 한 치의 굴욕 없이 미용실을 나서는 김태형에 어쩐지 패배한 기분으로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염병, 어쩜 그리 이기적이야. 질리지도 않냐 물었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태형의 옅은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매만지다 흐트러뜨렸다. 뭐가 재밌는 건지 자꾸만 얼굴을 가까이 하며 장난을 걸고 실실 웃는 김태형에 결국 똑같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오늘도 김태형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에 졌다. 늘 그랬듯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는 잘난 김태형에게 말려들어 한 마디 반박도 못 하는 내가 싫어질 뿐이었다.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저 뻔뻔함에 실없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그래도 세상에 둘도 없는 내 편이 저 자식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티는 내지 않지만 나름의 제 방식대로 엉망이 되어 번져버린 내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는 김태형이, 새삼스럽게도 참 많이 고마웠다.
-
월요일 아침. 아, 개 같은 1교시. 개 같은 9시 수업. 대체 나는 고딩 때 어떻게 6시 30분에 일어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머리를 감고 스타킹과 교복을 주워 입었단 말인가. 오늘도 2학기 수강 신청은 절대 망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빨리 방학이나 하면 좋겠다. 나도 김태형 따라서 오버워치 하면 똥손 좀 벗어날 수 있으려나. 이따 저녁에 피씨방 좀 데려가 달라고 말이나 해볼까. 아오, 그 새끼한테 게임 배우면 답답하다고 욕 겁나게 먹을 것 같은데. 안 봐도 비디오다. 이것도 못하냐며 그 구린 에임은 실화냐며 가슴을 텅텅 쳐댈 김태형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자 벌써부터 귀가 따가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관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옆집의 현관문도 그와 동시에 열리는 것이었다.
"……."
......교복? 고등학생이었어? 당연히 나보다 어릴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어제는 교복을 입지 않아서 그랬을까, 대학생이나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제 얼굴을 반쯤 가린 까만 마스크, 흰 와이셔츠와 남색 니트 조끼에 교복 마이까지 갖춰 입은 모습을 보아하니 누가 봐도 고딩이긴 했다. 교복 입은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조금 앳되다면 앳된 얼굴임을 깨달았다. 어쩌다 고딩이 여기서 자취를 하게 됐지. 흥미롭단 얼굴로 눈인사를 보내자 나에게로 향해 있던 멍한 눈길을 급히 떼며 고개를 숙인다. 아니... 이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는데. 이러지 마. 내가 한참 늙은이 같잖아. 마음 속으로 쓴 눈물 한 방울을 삼키고 애써 웃으며 밝은 목소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고등학생이었어요?"
"...네."
"고3?"
끄덕.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러나 이 뒤를 잇는 소통이 없어 멋쩍은 정적이 덮쳐온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름 새 이웃이고, 무려 옆집이다. 안 그래도 앞으로 자주 볼 사이에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다음에 만날 때도 여전히 어색할 것이리라. 세상에서 제일 싫은 두 가지 중 첫째가 억울함이요, 둘째가 어색함인 나로선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제발 할 말을 찾자, 제발.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 있는 대화거리를.
"요즘 고등학생들은 학교 몇 시에 가요? 8시 넘었는데 지각 아니에요?"
"몸살이어서 병원 좀 들렀다 가려고요."
"그, 그렇구나. 문과예요, 이과예요?"
"이과요."
"오, 수학 잘해요? 똑똑한가 보다!"
"...그런 건 아닌데."
......제발. 안쓰럽다, 안쓰러워. 도대체 저 애가 문과든 이과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참으로 센스없는 나의 입담에 현빈이 내 귓가에 대고 이게 최선이냐며 꾸짖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이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와의 대화를 어색해한다는 것이 뻔히 티가 났다. 이 어색함을 깨고 싶어 한 마디라도 더 억지로 말을 붙이는 내 심정도 몰라 주는지 무심히 돌아오는 저 짧은 대꾸에 결국 나마저도 참을 수 없는 고요함이 또 다시 찾아왔다. 더 이상의 대화는 포기하고, "몸살 얼른 나아요, 학교 잘 다녀와요!" 라는 약간의 오지랖 섞인 인사를 끝으로 후다닥 먼저 계단을 내려가 대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도망치듯 뛰쳐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지금 왜 고삐리 하나에 쩔쩔 매고 있냐. 이웃 사촌이란 말도 옛말 아닌가, 그냥 신경 끄고 지낼까. 아무리 할 말이 없었다 해도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문과냐, 이과냐는 역시 무리수였다. 날 바라보던 묘한 표정이 눈에 밟혔으나 잊혀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러다 립스틱을 고쳐 바르기 위해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 오늘 아침을 때우려 챙겨온 백설기가 스쳤다. 별 생각 없이 비닐랩에 꽁꽁 싸인 백설기를 꺼내 들어 빤히 내려다보던 중 문득 웃음이 나온다. 순수한 애구나, 싶기도 했다. 손에 들린 것과 겹쳐 아른거리는 하얀 얼굴에 어쩌면 저 애가 이 하얀 백설기와 조금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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