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히 잠든 태형은 죽일 듯 제 목을 조르던 사람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사고 휴유증입니다. 여주는 의사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하기만 한 병실을 괜히 둘러보았다. 익숙한 장소였다. 물병에 꽂힌 꽃을 갈러 오는 곳. 태형의 여동생이 잠든 병원. 왜 하필 여기야. 여주는 괜히 투덜거렸다. 저는 납골당에 한 발자국만 들이밀어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어 죽을 맛인데, 가뜩이나 감정조절도 잘 못하는 애가 일어나자마자 아까처럼 생난리를 치진 않을 지 걱정이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바로 찾아왔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태형은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척이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정말 조용하게 잠만 잘 뿐이었다. 여주는 가만히 코 밑에 손가락를 가져다 댔다. 옅은 바람이 오고갈 뿐 태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더 올려서 이번엔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를 살포시 걷어내었다. 태형은 눈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우리 둘이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 처음이다." 여주는 말을 마치고 괜히 어깨를 움찔했다. 제 말에 제가 놀란 것이었다. 근데 상대가 아무 반응이 없으니 괜한 용기가 생겼다. 여주는 마음을 조금 편하게 고쳐먹었다.
"그때 이후로 이 날마다 아팠겠네."
저를 괴롭히는 패거리는 모두 저와 태형의 지독한 악연을 먹이 삼아 덤벼드는 피래미들일 뿐, 사실 태형은 방관자에 가까웠다. 그저 모든 것을 뒤에서 무감각하게 관망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주칠 일은 별로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괴로워 하는 태형을 보며 여주는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무표정한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도 그 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은 저 뿐인 것 같아 억울해 미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몸소 확인 받는 것 같아서. 넌 이 날마다 다리 근육이 뒤틀려서 죽을 것 같이 아팠겠구나. 여주는 태형의 절뚝거리는 발걸음이 아른거리다가도, 태형이 아주아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병실을 벗어나고 싶다가도, 이 잔잔한 분위기를 조금만 더 즐기고 싶었다. 여주는 제 마음을 알다가도 몰랐다.
좋아해.
여주는 그 말을 내뱉어 볼까 하다가, 푸흐흐 바람빠지는 웃음만 지었다. 얘, 눈치는 빨라서 그런 제 마음을 차꾸 이용해 먹으려 한다. 당하는 사람만 잔인하고 황홀할 뿐이다. 여주는 괜한 먹잇감은 던져주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순수한 단어로 포장될만큼 깨끗한 마음도 아니었다.
"이제 갈게. 일어나서 너 지랄 떠는 거 보고 싶었는데,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네."
일어나면 어떻게 굴지 궁금하기는 했다. 또 목을 조르거나, 폭언을 퍼붓거나,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미안하다는 듯 목을 그 예쁜 손으로 쓰다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와 마지막은 진짜 끝내주는 희망고문이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서 하얀색 꽃 한송이를 꺼내 태형의 침대 머리맡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원래 너 주려고 산 건 아닌데. 오늘은 네가 가져."
"......"
"난 너한테 미안한 거 없지만, 넌 나 미워해도 돼."
그래야 나도 너 싫어하지.
순환고리
w. 악어새
전학생이 왔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어차피 고등학교 생활은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때마침 제 옆자리가 비어서 전학생이 그 곳에 앉게 되었다.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서로 신경 끄고 살면 되니까. 그치만 전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녕."
벌써 5번째다. 전학생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여주가 지치지도 않는지 그 허여멀건한 얼굴을 들이밀고 같은 말을 다섯번째 반복중이었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전학생이 여섯번째로 입을 때려하자 여주는 결국 포기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동그란 안경에 빛이 반사되어서 반짝 빛났다.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이제야 돌아보네."
쟨 뭐야. 아이들은 수업중이라 대놓고 쳐다보진 못하고 곁눈질로 뒷쪽을 힐끔거리며 수근댔다. 일부는 찐따가 찐따한테 작업을 건다며 비웃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전학생은 저를 두고 수근거리는 주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싶었다. 아니면 지 얘기 하는 줄도 모르거나. 여주는 한심한 표정으로 전학생을 쳐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마이웨이야?"
대뜸 그렇게 묻는 말에도 전학생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응. 전에 살던 데서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오히려 말을 걸어줘서 기쁜 눈치였다.
"근데 너 예쁘다."
아 근데 좀 잘못 걸린 것 같은데.
***
전학생은 비약이 심했다. 교과서를 아직 준비하지 못해 대충 책을 가운데로 밀었더니 자기한테 드디어 관심이 생겼냐며 좋아했고, 종이를 넘기다가 손가락을 베였길래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하나 꺼내줬더니 대뜸 신혼여행은 역시 모히또에서 몰디브란다. 얘 나한테 이러는 거 잘못 걸리면 진짜 처맞을텐데. 한 번은 정말 걱정이 되어서 나름 분위기를 잡고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밉보였는지와 저와 어울리면 네놈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진지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전학생은 늘 그렇듯 귓등으로라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이쯤되니 전학생이 어디서 맞고 다니든지 말든지 제 책임은 아닌 듯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옆에서 까불까불해대는 녀석 덕분에 사는 게 조금은 재밌어져서, 여주는 전학생 떨궈놓기를 반쯤 포기한 상태로 지내기로 했다. 애인 말고 친구 해줄게.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서."
저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를 상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전학생은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여주가 태형의 이야기를 할 때면 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여주는 못할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터져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만 해봤지 자기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잔뜩 든 물풍선을 전학생이 바늘로 콕, 찌른 것 같았다. 김태형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여주는 태형을 욕하면서 태형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저 좋아하는 거 알고 상처주려 하는 거. 전학생은 그런 여주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옆에서 이 쌍쌍바 나눠먹으면 저랑 사귀는 걸로 알겠다는 속 편한 소리나 짓껄인다. 지랄. 여주는 짧게 대답하고 전학생의 손에 들려있는 한쪽을 빼앗아왔다. 생긴거랑 다르게 취향이 올드하네. 속으로 생각하며.
"근데 어떻게 이 얼굴을 두고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소리가 나오지?"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 계속 녹아내렸다. 여주는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혀로 핥다가 별안간 제 쪽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전학생에 놀라서 아이스크림을 놓쳤다. 아이스크림은 운이 나쁘게 종아리 위로 떨어졌다. 찐득한 초콜릿 액체가 다리를 타고 흘렀다. 아 이 미친놈이. 여주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전학생에게 소리쳤다. 이거 어쩔꺼야! 여주의 목소리가 학교 건물 벽을 타고 울렸다. 몇몇 학생들이 여주네를 쳐다보았다. 여주는 순간 당황해서 전학생의 등 뒤로 얼굴을 묻었다. 셔츠에서 여름 바람 냄새가 났다.
내가 학교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
여주는 문득 깨달았다. 이런 사소한 일상에 이질감을 느낄 정도면, 난 얼마나 비정상적인 세상에 있던걸까.
"야 전학생."
전학생은 묵묵부답이었다. 여주가 제 등 뒤에 얼굴을 묻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여주가 고개를 들려하자 갑자기 전학생은 뒤를 돌아서 여주의 몸을 잡아챘다. 여주는 전학생의 손에 억지로 일으켜졌다. 야 뭐해? 전학생은 제 어깨로 여주의 시선을 은근히 가리며 뜬금 없는 말을 뱉었다. "여기 공기가 좀 안 좋은 것 같아. 다른 데 가자." 여주는 느닷없는 전학생의 공기타령에 잠시 의아해 하다가 그냥 픽 웃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전학생의 말도 안되는 화법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학생은 무작정 여주의 팔을 붙잡고 학교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힘은 무식하게 세네. 어디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다. 여주는 속으로 생각하며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전학생의 뒷통수에다 대고 장난 섞인 불평을 했다. 어디가는 거야, 너 학교 길도 잘 모르잖아. 전학생은 여전히 동문서답이었다.
"나 전학생 아니고 전정국이야."
***
아까부터 목이 간지럽더니. 정국은 멀리서 저를 노려보는 누군가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한 눈에 봐도 여주가 입에 닳도록 떠들어대던 그 '개새끼'임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나같은 얼굴을 두고 딴 남자 있다는 소리가 나오나 했는데, 진짜 존나 잘생겼네. 허공에서 두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혔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정국이 쓸데없는 호기가 발동해 눈에 힘을 주려는 찰나, 태형이 먼저 여주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여주는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다 말고 몸을 일으켜 피식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흘끗 보다가 다시 태형 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아싸 이겼다. 정국은 속으로 승리자의 미소를 짓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주가 분명 김태형은 자길 존나 싫어한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저게 존나게 싫어하는 사람 바라보는 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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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많이 불친절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데(=작가 능력 부족) 혹시 헷갈리시는 독자님들이 계실까봐 주인공 두 명 감정선 아주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여주와 태형이 모두 서로에게 서로에게 애증 그 자체인 관계입니다. 서로 좋다가도 싫고, 어쩌면 싫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을 수도 있겠네요.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만큼 본인들이 본인들 심리상태 파악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읽다가 헷갈리시는 묘사가 나오면 아 얘네 또 삽질하는 구나~ 하고 넘기시면 됨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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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빠 전학생 전정국
흰 토끼같은 얼굴에 귀여운 동그리 안경이 포인트.
(사실 그때 안 자고 있었던)입원한 김태형.
여주가 준 꽃 만지작 거리면서 손에서 절대 안 놓을 듯. ㅋㅋ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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