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W. 원이씨
침대 아래에 남몰래 숨겨둔 상자가 하나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소중한 물건들을 담아놓은 상자. 그 상자를 열면,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이미 시들어버린
꽃 한 송이가 나온다. 꽃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고, 사진은 너무 빛이 바래 누가 누군지 구분되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쓰레기 같은 이 물건들이,
나에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라 이 상자에 두고 침대 밑에 뒀었다. 책상에 두면 엄마가 이게 무슨 쓰레기냐고 버릴 것 같았고, 들고 다니자니 이리저리 흔들려서
상자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보물이 뭐냐면 자신 있게 이 상자에 있는 물건들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그 정도로 나에겐 소중한 물건들이었는데. 그랬는데.
"나 결혼해. 와줄 거지?"
이제는 내가 간직해서는 안 될 물건들이 되어버렸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늘은, 내 절 친의 결혼식 날이다.
오늘 결혼하는 친구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옆집에 살아서 자연스레 친해진 친구였다. 이름은 전정국이고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다. 정국이와는 초중고도 같이 나왔고,
서로 하고 싶은 일도 같아서 대학도 같은 과에 같이 갔었다. 그래서 항상 내 옆자리에는 정국이가 있었다. 너네 이쯤 되면 남매 아니야?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정국이와 친했다. 서로 비밀이 생기면 제일 먼저 공유했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제일 먼저 말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해주는 그런 평범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 내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다른 친구가 결혼을 한다면, 아 그래 하는구나 싶을 텐데. 이 녀석은 어릴 때부터 함께해서 그런가, 사실 좀
믿기지 않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 조별과제 너무 싫어."
결혼할 상대는 알고 있었다. 우리랑 같은 과를 전공한 1살 어린 후배였다. 언제였지. 21살 때였나, 그때 전정국은 조별과제 때문에 꽤나 골치아파했다. 조원들이 전부다
바쁘다며 톡을 씹는다고. 너랑 같이 조별과제 했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매일같이 찡얼찡얼 거렸다. 그럼 난 매일 그 아이를 다독여줬다. 넌 잘할 수 있다고. 뭐가 문제냐고,
전정국이 조장인데 왜 못하냐고. 그렇게 하루하루 과제 때문에 힘들어하던 전정국이, 갑자기 전에 없던 미소를 지어보이며 살짝 들뜬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저렇게 지나치게 들뜬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무슨 좋은 일 있나 싶었다. 과제를 잘 마쳤나보다 싶었는데.
"여주야 여주야, 나 좋아하는 애 생겼어."
두 볼을 붉히며 건넨 말은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전정국이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초중고 다니면서 1년씩 좋아하는 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전부다 짝사랑으로 끝났지만. 암튼 그래서 이번에도 짝사랑으로 끝내겠구나, 싶었다. 매사 열심이고, 모든 일에 앞장서서 일하는 아이였지만 정작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 아이가 그렇게도 좋았던 건지 전정국은 1학년 과대를 통해 그 아이의 번호를 알아냈고 조심스럽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나한테 어떻게 첫 문자 보내야 하냐고
물어왔기 때문에 문자 내용도 대충 기억하고 있다.
[안녕, 같은 과 선배 전정국이야. 갑자기 문자 보내서 당황했지? 아, 내가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대학생활 하는데 어려움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서!
아 불편했다면 미안.]
그때 난 짧게 보내라 했다. 주절주절 말하면 없어 보인다고. 근데 전정국은 그래도 상황 설명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갑자기 당황할 수 있으니까 사과의 말도
덧붙여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보낸 문자가 저거였다. 나눠서 보내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툭 보내버린 문자. 만약 내가 저 문자를 받았더라면, 뭐야. 하고 그냥 삭제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가 갑자기 내 번호를 알아내 연락하더니 도와주고 싶다고? 적어도 그런 말은 친해진 후에 해야 한다 생각했다.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님.]
근데 그 아이는 착한건지, 아니면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국을 향해 꽤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항상 내 옆자리에 붙어있던 전정국이,
내 옆자리를 비우기 시작한 게. 그리고 우리 얘기가 아닌 그 아이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 게. 전정국은 나를 만날 때마다 그 아이 얘기를 했다.
"진짜 너무 예쁘고 착해. 볼 때마다 너무 행복하다니까. 여주야, 너도 이런 감정 느껴봤음 좋겠다. 나 너무 좋아."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태껏 내가 봤던 전정국의 가장 행복한 표정은,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였다. 그때 서로 손 잡고 엄청 얼싸 안았는데. 우리 이제
대학생이라고 그니까 술 마실 수도 있다고 처음으로 술도 같이 마셨는데. 이제 전부다 과거형이다. 나와 함께했던 그 일들을, 전정국은 그 아이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과에서 단합으로 다 같이 술 마실 때 내 옆자리에 있던 녀석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달이 흘렀을까. 점점 멀어져가는 전정국을 느끼며 알게 모르고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그때. 전정국은 늦은 밤 대뜸 나를 불러냈다. 우리가 자주 갔던 카페로 말이다.
"나 드디어 연애한다 여주야.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나를 불러내던 목소리가 꽤나 취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디서 술 한 잔 걸치고 정신 못 차려서 집에 못 오는 건가 싶었는데. 전정국은 좋아서인지, 술 취해서인지 모를
잔뜩 새빨갛게 오른 얼굴로 말했다. 연애한다고. 그리고 그 상대는 너도 아는 그 애라고. 전정국이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던 여자아이.
전정국이 연애라, 얘도 드디어 연애라는 걸 하는구나 싶었다. 항상 나한테 외롭다, 난 언제 연애란 걸 해볼까. 하고 술에 취하면 넋두리하듯 말했었기 때문이다. 축하해줬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이제 내가 얘 술 취할 때마다 나오지 않아도 되고, 과제할 때마다 힘들다며 찡찡거리는 거 안 들어줘도 되고, 학교에서 볼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아도 되고, 같이 밥먹어주지 않아도 되고, 힘들 때 같이 술마셔주지 않아도 되고. 이제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잘 지내지? 옆집 사는데도 방학 되고나선 처음 보는 것 같네."
나만의 시간이라.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뭘 하든 전정국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 아이가 없는 내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방학 땐 알바 하는 날 빼고는
거의 집에만 있었다. 나는 나만의 시간이 생겼고, 전정국은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여자 친구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날도 뭘 할지 몰라 집에만 있다 밖에 나가서 영화 한편이라도 보자, 싶어서 나갔다. 근데 마침 타이밍 좋게 옆집도 문이 열렸고 그 집에서 전정국이 나왔다. 여자 친구의
손을 붙잡은 채 말이다. 나를 마주하자마자 살짝 흠칫 해보였던 전정국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잘 지내냐고. 어디 나가는 거냐고. 우리는 지금 영화 보러
간다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에 할 말을 잃었던 나는. 이내 아니라고, 그냥 마트에 간다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당황했을까 나는. 왜 거짓말 했을까 나는. 결국, 그날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 군대 간다 여주야.]
그리고 또 몇 달이 흘렀을까. 나도 이제 전정국이 없는 시간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글도 쓰고, 편집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몇 달 안에 몇 번 더 전정국을
만나긴 했다. 그래봤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만나더라도 집 앞에서 잠깐 스치듯이 본 게 전부였다.
얼핏 내다본 창밖으로 머리를 깎고 돌아온 전정국을 본적이 있다. 군대 가는구나 싶었다. 그럼 잠깐 얼굴 봐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 녀석은 나에게 저 문자 한통을
남기곤 입대를 해버렸다. 음, 조금 아니. 많이 서운했다. 그래도 친구인데.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얼굴 한번 보고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건가.
스무 살 때, 전정국이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나 입대하게 되면, 전날 나 만나서 같이 술 마셔달라고. 위로해달라고. 그리고 나 면회 와달라고.
거짓말쟁이네 전정국. 그 아이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난 그에게 흔한 편지 한통 쓰지 않았고 그 아이도 나에게 편지 한통 없었다. 그리고 내가 면회 갈 일도 없었다.
"나 제대했다."
그 아이가 군대 가있는 동안, 나는 졸업준비로 한참이었다. 생각보다 준비해야할 게 많아서 학교에서 과제하다 늦은 밤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그 날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데, 우리 집 앞에 커다란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전정국이었다. 이제 어엿한 남자의 티가 나는
그는 제대를 했다고 했다. 휴가 나왔을 때조차 한 번도 못 본 얼굴이어서 조금 남성다워진 그 아이가 낯설었다. 전정국이 낯설다니. 살다 살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구나
싶었다.
긴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나는 피곤한 상태였고, 그 아이도 날 기다리느라 지친 상태였다. 그냥 다음에 만나서 술 한잔하자고, 그렇게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조만간 좋은 일 있을 것 같아. 연락할게.]
그 후로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난 취직을 했고 전정국도 졸업을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 너무 많이 바빴기 때문에
그 쉬운 연락도 못하고 멀어져 갈 때쯤, 대뜸 문자 한통이 왔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그 좋은 일이 뭔지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 결혼해. 와줄 거지?"
.
.
.
그리고 지금. 내가 오랜만에 옷장에서 원피스를 꺼내 입고, 스타킹도 신고, 불편하다며 구석에 두었던 구두까지 꺼내 신는 오늘은. 그 녀석의 결혼식 날이다.
아까 아침에 잠깐 봤던 전정국의 얼굴이 생각난다. 너무 설렌다고. 나 식 올리다 울면 어떻게 하냐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난 사내자식이 뭐 그런 걸로 쪼냐고,
웃으라고 말했고 내 말에 전정국은 알겠다고 했다. 나 눈물 날 것 같으면 너 볼 테니까 나보고 울지 말라고 욕 좀 해달라고 까지 했다.
글쎄, 내가 너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을까 싶다.
"여주야, 안 나오고 뭐해."
"잠시 만요!"
머리도 매만지고, 화장까지 마치고 나가기 전. 문뜩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 하나에, 침대 밑에 밀어 넣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 상자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 전정국이 나에게 생일 선물이라며 처음으로 주었던 꽃 한 송이와,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처음으로 같이 찍었던 사진 한 장이다. 꽃은 시들어 버린 지 오래고, 사진도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제 쓰레기라 봐도 무방한 그것들을, 내가 여태까지 간직한 이유는.
"여주야! 이제 가야해!"
"나가요!"
내 첫사랑인 전정국과 처음으로 함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거 선물!'
'엥? 이게 무슨 선물이야! 나 나 토끼인형 준다고 했잖아!'
'몰라! 이거 선물이야! 받아!'
'으앙 전정국 거짓말쟁이!! 이게 무슨 선물이야!!'
'사진 찍을 땐 브이 해야 해 요렇게 알지?'
'치 나 바보 아니거든! 브이할 줄 알거든!'
언제부터 좋아한 건지 모른다. 스케치북위에 살짝 떨어뜨린 물감이 커다랗게 번지듯이, 그렇게 시작한 짝사랑이었다.
전정국과 나는 많이 닮아있다. 매사 당당하고, 나서기 좋아하지만 막상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걸로 만족한다고, 그렇게 스스로 되뇐다.
"안 나오고 뭐해 여주야."
"지금 막 나가려고 했어요 엄마."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이번엔, 침대 밑이 아니라 침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젠 정말 너를 보내줄 때가 온 것 같아. 그 동안, 그 많은 시간동안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네가 생일선물이라며 준 꽃,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 그리고 너. 난 정말 행복했어 정국아.
.
.
.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늘은, 내 첫사랑의 결혼식 날이다.
좋은 날
W. 원이씨
글잡에 글 처음 써보는데 긴장되네요ㅠ.ㅠ
좋은 날은 2편으로 구성된 단편입니다! 다음 편은 정국의 입장에서 쓴 B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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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이모 논란은 약물 자체는 상관없는데 그걸 병원 아닌 집에서 맞은게 불법인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