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타겟
; 서브의 발악
03
여자랑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밥을 먹어본 게 언제더라? 중학교 때 멋모르고 사겼던 여자 친구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어색함에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정국과 달리 작은 입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며 간간이 눈웃음까지 짓는 저 여유. 덕분에 정국은 마음이 편해지기는 커녕 목구멍으로 삼켜지는 돈가스 조각이 가시바늘처럼 따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먼저 밥을 먹자고 만남을 청한 건. 뭐랄까,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느낌?
"그림 그리는게 취미라구?"
눈을 반짝이며 묻는 여주에 정국은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원래 미술 전공으로 입시를 계획하다 여차저차해서 엎어졌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가게에 들어와서 정국이 가장 말을 오래 한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적절한 리액션과 집중하는 눈빛으로 그의 말을 듣던 여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와, 나도 그림 배워보고 싶었었는데.
"그림 그리는 사람들, 뭔가 멋있잖아."
"…그래요?"
"응. 자기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고."
그랬던가. 정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나도 좀 가르쳐줘. 물 한 잔 마시는데도 쓸데없이 우아하기만 한 여주의 말에 그만 목에 걸릴 뻔 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탁에 섣불리 그러겠다고 하질 못했다. 아, 수업료 지불해야하나? 머쓱하게 웃는 여주에 정국은 곧바로 포크를 내려놓으며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아니요, 선배가 원하신다면 그냥…."
"정말?"
기대하겠다며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거기에다 대고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말려들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순 없었지만 선배 앞에서 힘없는 후배는 어색하게 웃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부터 자화상을 꼭 그려보고 싶었다며 두 손을 맞잡고 방글거리는 여주를 쳐다보다가 그녀의 왼쪽 팔꿈치 밑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그 쪽으로 시선이 갔다. 선배, 전화…. 무슨 말을 하든 이 여자 앞에선 자꾸 끝을 흐리게 된다. 아무렴, 뜻만 전하면 됐지 뭐. 엎어져있던 핸드폰을 뒤집어보던 여주가 도로 엎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요란해지는 테이블. 아씨. 작게 인상쓰더니 아예 가방 안으로 집어넣어버린다. 정국에게 숨기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국은 봤다. 딱 봐도 남자로 추정 가능한 발신자 이름. 정국은 지긋지긋해 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왜 또."
― 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정국의 눈을 피해 식당 화장실로 들어온 여주는 전화부터 걸었다. 표정에는 귀찮아하는 티가 팍팍.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와는 다르게 첫마디부터 쩌렁쩌렁 핸드폰을 뚫고 나오는 성량에 여주는 핸드폰을 귀에서 잠깐 멀리했다가 다시 붙였다. 아, 짜증나.
― 너 요새 왜 전화 안 받아? 왜 나 피해?
"고작 그거 물어보자고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거야?"
―고작이라니!
"…피곤하다. 끊자."
그리고, 한 번만 더 전화하면 네 여자친구한테 너랑 내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 다 폭로해 버린다. 무시무시한 폭탄발언에 반대편에서 시끄럽게 굴던 소음이 한 순간 사그라진다. 그러다 잠깐, 여주야!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렸다. 미친놈. 누굴 바보로 아나.
***
"따로 찾으시는 제품 있으십니까?"
"성인 남자가 쓸 향수 좀 보고 싶은데요."
여주는 이 쪽으로 오라며 친절히 안내해주는 직원을 따라갔다. 정국아, 이리 와 봐! 이런 전문적인 향수 가게는 처음이라 두리번거리기 바쁜 정국이 저만치에서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여주를 돌아보았다. '밥 먹고 스케줄 어떻게 돼? 바쁜가?' 빨대를 쪽쪽 빨며 새침하게 물어오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아니라고 바로 답해버렸다. 잘 됐다며 그럼 자기랑 어디 좀 가자고 끌고 온 곳이 여기였다. 뭐, 진짜 한가했던 건 사실이니까 대충 시간 떼우기 쯤이라고 쳐두자.
샘플 여러가지를 두고 꼼꼼히 살펴보던 여주가 정국이 제 앞에 멈춰서자마자 향수 하나를 집어들어 칙칙 뿌려댔다. 갑자기 훅 밀고 들어오는 강한 향에 정국의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전, 어떤 것 같아? 하며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국의 몸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조금 더 몸을 밀착시킨다. 이건 비누향인가? 제 목 언저리에 얼굴을 거의 박다시피 하고 웅얼거리는 여주를 정국이 경직된 상태로 내려다보았다. 그게 요즘 가장 인기있는 제품이에요. 발랄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여직원덕에 어떻게 잘 상황이 무마됐지만 이미 열이 오른 정국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 했다.
"선물할거니까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괜히 따라왔나. 통유리 너머로 카드를 내미는 여주의 옆모습이 보였다. 물론 남자 향수를 구매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 수신인이 여자는 아닐테지만 그게 민윤기라는 말은 안 했잖아. 직원이 제품을 꺼내는 동안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이틀 뒤면 윤기의 생일임을 알리는 여주가 왜 그리 얄미워 보이던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선배 생일 선물이나 고르자고 이 시간을 허비한거야? 아니, 왜? 왜 굳이 나를 데리고 온 거야? 어이없다가도 짜증나다가도 허무하다가도 또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고 따라온 건 난데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하는데 가게문이 열리고 여주가 나왔다. 자그마한 쇼핑백 두 개를 손가락에 걸고서.
"자, 받아."
그 중 하나는 정국의 몫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정국이 팔을 쭉 뻗고 있는 여주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주고선 샐쭉 웃는다. 내 돈으로 선물 사주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영광인 줄 알라며 단단한 팔뚝을 한 번 때린다. 윤기 것과 같은 제품이니 절대 그의 생일 전에 먼저 쓰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함께 덧붙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
"네가 괜찮아하는 것 같아서 샀는데, 마음에 안들어?"
멍하게 있다가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여주를 보더니 아니라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여주는 평소대로 웃으며 앞장선다.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느리게 움직이며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
진짜 감사해? 정말? 그깟 향수, 그게 뭐라고 정국은 혼자 심오해져있었다. 여자한테 정식으로 선물을 받는 게 처음이라서, 그게 하필이면 제가 평소에도 선호하는 비누향 향수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이랑 같은 선물을 나한테 하냐고.
과방이나 도서관에서 정국은 윤기를 마주칠 때마다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윤기가 있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옆자리를 차지하고 헤픈 웃음을 파는 여주를 보면 더. 여주가 남자 옆에서 웃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정국과 함께 있을 때도 매번 그랬으니까. 그런데, 뭔가 다르다. 윤기는 여주의 곁을 멤도는 그 많고 많은 남자들과는 달랐다. 딱히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평범한 건 절대 아닌 것 같아. 그걸 아주 짧은 시간안에 캐치해냈다. 민윤기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
'그 선배 양다리도 막 걸쳐. 세다리, 네다리. 피곤하지도 않나봐."
…저 향수가 그런 의미라면 좀 많이 불쾌한데. 눈을 게슴츠레 뜨고 향수가 담신 쇼핑백을 노려보았다.
"오, 이건 뭐냐? 선물받았어?"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욕실에서 나오던 지민이 방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쇼핑백을 보고 말한다. 뭔가에 집중 할 때 나오는 오리입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던 지민이 와, 이거 비싼건데? 하고 놀란 눈으로 정국을 쳐다본다. 그래봤자 맞장구 쳐줄 전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다른 의미로 입이 아주 댓 발 나와있으니 말이다. 요즘 왜 이렇게 애가 사색에 잠겨있냐며 안 어울린다고 한소리 하는 지민은 무참히 씹혔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선 정국이 아직 다 풀지 못 한 짐 박스를 향해 걸어갔다. 뒤적거리더니 꺼낸 물건을 바닥에 툭 던지듯 내려놓는다.
"…너 그림 그리게?"
또 한참 뒤적거리다 끝이 뭉툭한 4B연필을 손에 쥐고 뒤돌아보는 정국을 보자 지민은 그가 선물받은 비싼 브랜드 향수를 봤을 때 보다 더 놀랐다. 전정국이 다시 스케치북을 펼쳐든다. 그리고 옛날에 그랬던 것 처럼 그림을 구상하듯 사르륵 눈을 감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정국이 미술에 손을 떼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예술쪽 진로는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 탓에 별 수 없이 이 쪽으로 방향을 튼 것 뿐이다. 단식투쟁부터, 곧바로 잡혀들어오긴 했지만 가출까지.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하려 몸부림쳤었다. 그만큼 그림의 존재는 정국에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갖 미술 도구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이젤부터 붓, 팔레트, 심지어 정국의 손떼가 묻어있는 작품들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몇 일 시름시름 앓다가 우연히 잡동사니 창고에 들어갔을 때에야 그것들을 발견했다.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붓들 옆으로 검게 타들어간 흔적들이 남아있는 하얀 스케치북 종이들과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제 작품들. 그것들을 보자마자 이미 마음속에선 깨닫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전정국에게 엄청난 심리적 변화가 오고 있는거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그 날 이후로 정국은 두 번 다시 스케치북을 펼치지 않았다. 미술관에 관람을 가는 일도, 자습시간마다 진로상담을 목적으로 미술 선생님을 찾아가는 일도 더는 없었다. 그런 전정국이 다시 그림을 그린다. …왜?
제 앞에서 생긋생긋 웃는 여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 또렷이 보인다. 딱 1분. 전체적인 밑그림을 구상하는 데에 1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지민 덕에 방에선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뜬 정국이 4B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림을 그리려는 게 아니라 연필을 부러트리려는 듯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는 정국을 지민이 심각하게 바라봤다. 저 새끼 미쳤네, 미쳤어. 과가 적성에 많이 안 맞나? 그래서 스트레스 받는건가? 말을 붙이는 것도 무서울만큼 진지한 정국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뭘 조심하래. 눈에 뻔히 다 보이는 노림수에 설마 넘어가겠냐?'
'눈에 뻔히 다 보이지. 근데도 넘어간다잖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홀랑… 무섭지 않냐? 그냥 난 사람인가 봐.'
말도 안 돼. 알고 지낸지 겨우 몇 일 지났다고. 피식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정국을 지민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정국은 손에 줬던 힘을 풀고 4B연필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망설임없이 일어나 욕실로 향하더니 중간에 제 발에 채이는 쇼핑백을 내려다본다. 무표정한 얼굴로 꽤 오래 그러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미련없이 그것을 가볍게 한 번 밀어찼다. 곧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짜릿한 물줄기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퍼졌다.
최대한 연재를 빨리하려고 노력할게요. 3월달부터는 바빠질 것 같으니...ㅠㅠ 진짜 댓글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게 보고 있어요.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하트). 3화부터 약간 막히는 것 같아요.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미 다 잡아놨긴한데 그거 풀어나가는게... 정말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진짜. 그리고 생각보다 써야할 이야기거리가 많을 것 같으니 진도를 좀 팍팍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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