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후
천룡국(天龍國). 만 백성이 배불리 먹고 동란조차 일어나지 않는 지극히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였다. 적어도 은위제가 그리되기 전까지는
은위제. 천룡국의 12대 황제였다. 어렸을 적부터 본디 성품이 어질고 총명하여 학식(學識)이 풍부하였으며 무예까지 출중하였다. 허나 무엇이 그를 흩트려놓았는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위제는 주색에 빠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양 옆구리에 궁녀를 끼고 살았으며 정사(政事)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방탕하고 음란한 생활로 일관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깼으며 사람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해댔다. 색(色) 그다음은 폭(曝) 마지막으로 광(狂)이라 하였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색에 빠져있던 은위제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 탓에 궁은 왈칵 뒤집혀 은위제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은위제의 행방에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은위제를 찾게 되었는데 인근 산속에서 아사한 채 발견되었다. 그 후 궁에서는 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쉬쉬하였으며 은위제는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일국(一國)을 망국(亡國)에까지 이르게 했던 은위제에게는 어린 태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어린 태자가 고작 충년(沖年)의 나이에 제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준면(俊勉)
훗날 천왕제(天旺帝) 천룡국의 13대 황제이다.
홍화녹엽
紅花綠葉
아니되옵니다. 폐하! 그것은 당치도 않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아침부터 정전(正殿)에 모인 신하들이 줄지어 목청 높여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감싸 쥐는 이가 있었으니 천왕제 준면이다. 은위제가 그리 세상을 떠난 후 충년의 어린 나이에 준면은 황제가 되었고 왕위라는 피바람 부는 곳에 덩그러니 놓였다. 아직 정사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준면을 가운데 두고 신하들은 줄곧 논쟁(論爭)해왔으며 때론 준면을 이용하고 악용해왔다. 악용당할 때마다 준면은 능구렁이가 천마리쯤 들어 앉아있는 신하들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루라도 머리를 굴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자연스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는 법을 익혀갔다.
준면은 부친(父親) 은위제를 쏙 빼닮아 머리는 비상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무예는 무인(武人)보다도 월등했다. 또한, 짙은 흑색 머리와 대조되게 용안(容顔)은 여인보다 더 곱고 하얘 더욱 빛이 났으며 얼굴의 중앙에 자리 잡은 오뚝한 콧날로부터 수려하게 떨어져 내리는 모든 선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을 준면은 철저하게 감추고 숨겼다. 시종일관 자신을 숨긴 채로 모든 이를 대면 하였다. 그리고 그 얼굴 위에 가면을 썼다. 황제라는 가면을.
"내 말을 무엇으로 들은 건가. 난 내 뜻을 바꿀 생각이 없다."
"하오나 폐하 폐하께옵서 약관(弱冠)을 넘으신 지 2년이 지나셨고 황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후사(後嗣)가 필요하옵니다. 폐하"
신하의 말에 천왕제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물러가라 명(命)하였다. 이제 막 흔들리던 나라의 기반을 다시 세우고 빼앗겼던 영토를 차근차근 되돌리고 있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픈데 후사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동안 여러 문제가 많았으니까 이제야 조금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용상(龍床)에 앉아 습관처럼 검지로 손잡이 부분을 일정 간격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천왕제 옆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내관이 수국차를 내밀었다.
내관 도경수(都暻秀) 12대 황제였던 은위제의 신임을 받았던 도영(都瑩)의 독남으로서 어릴 때 입궁하여 준면과 허물없이 지낸 인물이다. 은위제 때부터 황제의 최측근으로 입지를 굳혀갔고 현재 천왕제의 곁을 보필하고 있다. 천룡국의 내관은 다른 나라처럼 거세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왕을 거역하거나 권력을 지니려 하는 내관은 없었으며 왕의 물건에 손을 대는 내관들은 곧바로 색출(索出)되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였다.
"폐하 수국차 이옵니다. 심경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실 것이옵니다."
경수의 말에 준면은 경수를 흘끗 쳐다보았다. 경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신하들에게 대하던 것과는 무척이나 상반된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다른 이들에게 대하는 것하고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다 들어 내놓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경수는 대답 대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옵서 고민하시는 그것 알고 있사옵니다. 하고 대답해주는 것만 같았다.
경수는 준면을 잘 알았다. 상대방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경수였기에. 또한, 그 둘이 함께해온 세월이 절대 짧지 않았기에. 경수가 준면에 대해 잘 알듯 준면도 그를 매우 의지 해왔다. 기댈 곳 하나 없던, 어린 나이에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이 나라를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허나 황제라는 자리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압(威壓)이었을까. 그는 이제 준면이 아닌 황제로서 있을 뿐이었다.
수국차가 찻잔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온기(溫氣)가 사라진 것을 보자 경수는 찻물을 버리고 다시 찻잔에 따듯한 수국차를 따랐다. 한번 앉아 생각하기 시작하면 도통 일어날 줄 모르는 준면이었다. 그럴 때마다 경수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며 추리해 보곤 하였다. 지금은 분명 아침 조회 때 안건(案件) 되었던 건이겠지. 후사 문제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올 때마다 준면은 영토문제로 다른 자잘한 건은 묵살 했기 때문이다. 준면은 궁녀를 안기는 했어도 씨를 뿌리진 않았다. 또한, 황후자리에는 아무도 앉히지 않았다. 신하들은 못마땅해하였으나 황제의 뜻을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경수가 이런저런 추리를 해보고 있을 때 별안간 준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채비를 하여라."
"폐하 지금은 너무 늦사옵니다. 이제 곧 침소에 들 시각이옵니다."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저지하던 경수를 가벼이 제치고 준면은 정전을 빠져나왔다. 데리고 나갈 무사를 데리고 오겠다는 경수의 입을 틀어막은 준면이 경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너랑 나랑만. 경수가 틀어막힌 입으로 꽥꽥 무어라 말하자 준면은 막무가내로 경수의 손을 잡아채곤 끌고 갔다. 잠시, 잠시면 돼
밖으로 나온 경수는 도성(都城)을 돌아다니는 내내 준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무예를 닦은 경수라지만 만약 도적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폐하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준면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다. 경수도 온갖 신경을 준면에게 쏟았고 준면도 오랜만에 궁을 나와 바깥 공기를 마셔 들뜬 탓일까 어느새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 와있었다.
스릉- 경수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가 빛이란 빛은 한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경수가 꺼내 든 검이 달빛에 비쳐 서늘하게 빛나고 있을 뿐. 안개 때문인지 달빛도 어두워 길을 구분해 낼 수 없었고 그저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와 가까이에 있는 숲에서 날짐승들이 우는 소리밖에 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락-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폐하. 제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경계를 풀지 않고 소리가 난 곳을 응시하고 있던 경수가 검을 휘두르자 검과 검이 맞부딪쳐 굉음(轟音)이 났다.
"헤치지 않습니다."
"누구냐"
"지나가던 행인이옵니다만"
길을 헤매시는 것 같아서. 절 따라오십시오. 경수와 검을 맞대고 있던 이가 말했다. 어두워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건장한 사내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투는 느긋하고 차분하였다. 근본(根本)을 알 수 없는 이였지만 적의(敵意)가 느껴지지 않는듯하여 준면과 경수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도성에 가까워진 듯하였다. 준면이 그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준면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향이 준면의 코를 찔러왔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