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어서 쓰는 1
: 쇼트트랙 국대 배진영 +
14. 여주는 고민을 했다. 연락을 해, 말아. 해. 말아. 사춘기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 여보세요?
"......"
- 누구세요? 혹시 여주 누나에요? 아니면 끊습니다.
"...어, 그러니까."
- 누나?
"잘 지내고 있나 해서요."
- 미쳤다. 진짜 누나에요? 이거 꿈 아니죠? 정말 하여주 맞아요?
"하여주는 반말 같아요."
- 아 죄송해요. 너무 신나서. 와, 진짜 어제 꿈자리가 좋더라니.
"그랬어요?"
- ......!
"?"
- 아 누나.
"네?"
- 진짜 좋아해요. 나 지금 너무 설레서 심장 터질 것 같아요.
15. 결국 한 번의 전화는,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열댓 번이 되었다.
- 누나누나!
"...네..."
- 헙. 혹시 자고 있었어요? 내가 깨운 거예요? 어떡해! 미안해요!
"아니 그렇게 까진, 그보다 왜요."
- 아니 저 오늘 훈련에서 신기록 세웠어요! 그거 얘기하려고!
"아..."
- 아?
"얘기 했으니까 이제 된 거죠? 그만 끊을까요?"
- 잠깐만 여주 누나! 잠깐만요!
"왜요, 왜. 자꾸 왜 불러요."
- 사실 신기록은 핑계고 누나 목소리 듣고 싶었어요.
"네?"
- 누나 자꾸 까먹는 거 같아요.
"...제가 뭘 까먹었죠?"
- 제가 누나한테 고백했다는 거요.
16. 어째서 직접 찾아오는 거보다 전화로 대하는 게 더 적극적인지, 여주는 신기했다.
"저 지금 오픈 준비해야 해서 바빠요."
- 진짜요? 그럼 얼른 준비해요! 끊을게요!
"네."
- 근데 누나!
"왜요? 안 끊어요?"
- 오늘도 좋아해요!
"...?"
- 아이시떼루! 알러뷰! 워아이니!
"...!"
- 하여주 사랑해!
17. 요즘 성우는 여주 괴롭히는 맛에 산다. 하여주가 저렇게 반응하는 게 처음이라.
"크으. 좋을 때다, 좋을 때지."
"뭐야? 옹청이 너 언제부터 들었어?"
"근데 누나!"
"아..."
"오늘도 좋아해요! 아이시떼루! 알러뷰! 워아이니! 꺄악!"
"너 너무 싫다 진짜..."
"하여주 사랑해! 하! 여! 주! 사! 랑! 해!"
"......"
"사! 랑! 어? 야, 야야. 그거 아니야! 그거 칼이야!"
"칼이라서 손에 쥔 거야. 너 죽고 나 죽자."
"아악! 하여주 돌았냐고! 진짜 휘두르면 어쩌냐고!"
18. 요 며칠 카페가 너무 바빴다. 가뜩이나 하성운도 자리를 비웠는데, 왜 이렇게 손님이 많은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쯤 되면 사장님 우리한테 보너스 주셔야 한다."
"내 말이."
"그런 의미로 전화 좀 해봐. 언제 오시냐고."
"나 오픈하고 나서 휴대폰 꺼놨어."
"왜?"
"한 시간에 한 통씩 전화가 오잖아... 손님도 많은데..."
"헐. 삐약이 삐지는 거 아니야?"
"...그런가?"
"당연하지! 나 같아도 화난다 이 연애 고자야! 빨리 휴대폰부터 켜!"
"키고 있잖아! 소리 지르지 마!"
"하이고 내가 진짜... 우리 삐약이도 알고 보면 진짜 보살이야, 아주."
"야."
"뭐."
"...부재중 34통인데...?"
19. 삐지지는 않았지만, 삐약이는 여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로만 알았다.
"야 큰일 났어."
"내 기록이 안 나오는 것만큼 큰일이냐."
"어. 진짜 완전 큰일."
"뭔데?"
"누나 전화기가 계속 꺼져있어."
"? 지금 그런 하찮은 이유로 내 연습을 방해한 거야?"
"하찮지 않아. 들어봐. 아침 8시에 전화 했을 때는 분명 받았는데, 10시부터 계속 연락이 안 돼! 어쩌지?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괜찮겠지?"
"고작 6시간 연락이 안 되는 건데 상상력 왜 그래?"
"고작이 아니지. 벌써 6시간이나 연락이 안 되는 건데!"
"...와, 나 지금 쟤 진심으로 재수 없다."
"나도."
20. 드디어 여주가 삐약이의 전화를 받았다.
- 누나 괜찮아요?
"? 물론이죠."
- 어디 다치거나 누가 괴롭힌 거 아니죠?
"? 제가 그렇게 나약해 보여요?"
-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네? 뭐, 네. 그래요. 고마워요."
- 근데 누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뭐가요?"
- 잠깐만 집 앞으로 나와 봐요.
21. 삐약이가 탈주 닌자가 되고 싶은가 보다. 여주는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왔다.
"이렇게 막 나와도 돼요? 여긴 왜 왔어요? 아니,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하나씩 물어봐요, 우리 누나 숨 넘어 갈라."
"좋아요. 하나씩 대답해요. 왜 왔어요?"
"누나 보고 싶어서 왔죠!"
"...아. 그럼 여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매형이 알려주셨어요!"
"? 매형이요?"
"네! 구름이 형아요!"
"언제부터 그 쪽 매형이... 하구름이 되었죠...?"
"에이. 그 쪽이라니. 진영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요?"
"그래 진영아. 우리 오빠랑은 어떻게 알아요?"
"......!"
"자꾸 설레는 표정 짓지 말고요. 대답부터 해요 좀."
22. 하구름은 배진영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매형! 이거 드세요!"
"매형! 오늘은 아이스크림 드릴게요!"
"매형! 매형!"
"...안 지치니? 매번 여기 오는 거?"
"원래 용기 있고 끊기 있는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고 그랬어요."
"여주가 그렇게 좋아?"
"그렇게 당연한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어디가 좋아? 왜 좋아, 내 동생이?"
"좋은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지."
"...합격."
"네?"
"너 합격이라고. 잘해봐, 배서방."
23. 배서방이라니, 얘기를 다 들은 여주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미쳤어 하구름.
"누나 왜 자꾸 고개 숙여요? 나는 누나 얼굴 보러 온 건데-"
"아니, 그냥 좀 더워서요."
"더워요? 왜? 왜 더울까? 뭐 때문에 우리 누나 얼굴이 빨개졌을까요?"
"...장난치지 말죠."
"아. 아 진짜 귀여워."
"적당히 해요. 민망하니까."
"귀여운 걸 어떻게 참아요. 누나는 뭘 먹고 그렇게 귀여워요?"
"...말을 말죠."
"어흑. 토라지는 것도 귀여워. 큰일났다 큰일났어."
"? 또 무슨 소리 하려고."
"들어가기 싫어졌어요. 삼십분이 아니라 삼십 시간 같이 있어도 모자란데?"
24. 여주는 여차저차 삐약이를 달래서 돌려보내기로 했다. 시간이 꽤 늦었다.
"이제 진짜 가요. 나도 잘 겁니다."
"아쉬운데. 누나, 가는 길에 전화해도 돼요?"
"하지말래도 할 거잖아요."
"어. 들켰네."
"얼른 가요."
"누나 잘 자요! 내 꿈 꿔요! 사랑해요!"
"네.
- 안녕!
"? 아직 얼굴 보고 있는데 전화로 말하는 이유가 뭐죠...?"
- 끊기는 게 싫어서요. 마음 같아서는 누나랑 계속 있고 싶거든요.
25. 여주는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다.
"이게 썸일까?"
"......"
"아닐까?"
"......"
"썸인가?"
"......"
"나도 좋아하는 걸까?"
"......"
"아닌가?"
"...여주야,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오랜만에 연락한 사촌한테 밤새 그 소리만 할 건 아니지?"
"가만 있어봐. 황제."
"그럼 나 전화 끊어도 돼?"
"안 돼. 결론이 날 때까지 못 끊어."
"여주야아. 나 내일도 연습 있다니까."
"그래? 그럼 하나만 더 들어봐."
"...하. 뭔데?"
"이게 썸일까?"
26. 밤새 토론했더니 어쨌든 답은 나왔다. 대신 안색을 잃은 여주였다.
"솔직히 이건 안구 테러급."
"그러게. 아니 성우야. 안구 테러라니?"
"판사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의 자아가 한 게 아닙니다. 옹청이가 했습니다."
"...무슨 옹청한 소리야. 아무튼 여주야, 어제 민현이랑 통화하는 거 같더니. 늦게 잔거야?"
"어어. 그래도 값진 결과를 얻었어. 조금 피곤하지만 괜찮아."
"? 어디가 괜찮은 걸까?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자꾸 내 동생 팩폭하지 말자, 옹청아."
"네. 사장님. 저는 그럼 밀대를 한 번 밀어보겠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
"어차피 지금은 손님도 없고, 저기. 안에 가서 한 숨 자."
"아니 괜찮다니까?"
"우리가 안 괜찮아. 앞치마 이리 주고, 얼른 가."
"...나 두 번 거절은 안 하는 성격인 거 알지?"
"알아. 한 시간 뒤에 깨울 테니까 그 때까지 자. 알겠지?"
27. 그리고 1시간 뒤, 누군가의 손짓이 단잠에 빠진 여주를 조심스럽게 건드릴 때.
"누나, 일어나요."
"......"
"누나. 여주 누나."
"으으, 더 잘래..."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매형이 안 된대. 얼른 일어나요, 응?"
"...싫은데에."
"빨리 일어나요. 나 잡고, 얼른."
"......"
"자꾸 눈 감지 말고 누나."
"...안 감았어... 그리고 이거 다... 삐약이 때무이야..."
"저 때문이요? 왜?"
"왜긴 왜야..."
"말해야 알지. 말 안 해주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해..."
"? 다시 한 번 말해줄래요?"
"좋아한다고... 아, 나 진짜 조금만 더 잘래..."
"......"
"...와."
"......"
"와, 나 진짜 큰일났다."
28. 한편, 이 상황을 모르는 카페 사람들은.
"? 뭐야, 쟤?"
"뭐가요?"
"배서방 얼굴 터질 것 같은데?"
"어. 그러네요. 이봐, 삐약이 친구!"
"네? 네, 아. 저 오늘은 그만 가볼게요."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얼굴이 이상한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 아아. 저 코치님 호출 와서 진짜 가요. 나중에 뵈어요!"
"...뭐지."
"약간 도망가는 거 같지 않아요? 수상한데."
"아니 근데."
"? 또 왜요?"
"혹시 배서방 지금 ㅇㅇ이 깨우기 싫어서 튄 건가?"
"헐. 진짜 그건가 봐요. 그러니까 그렇게 빨리 뛰어가지."
"...이 시대의 참사랑 꾼이 따로 없구만. 쯧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