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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종례 끝나고 3학년 8반으로 와라. 늦으면 디짐.'
그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 선배때문에. 난 귀신에 홀린듯 한동안 그
렇게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결전의 시간. 난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3학
년 교실이 모여있는 5층으로 향했다. 사실 오늘은 도서관을 가려고 생각했었다.
어찌보면 사람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내게 도서관은 옥상 다음으로 자주가는 장
소였다. 그 꿀같은 휴식시간을 이렇게 잃다니. 하아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힘없
이 계단을 올랐다. 심부름을 할때 빼고는 잘 올라와 보지 않는 곳이라 누가 뭐
라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기가 죽었다. 3학년은 13반까지 있어 8반은 거의 끝자
락에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터벅터벅 8반 교실 앞까지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죄송합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내 자신에 살짝 놀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
는데 아까 그 사람이 내 어깨를 덥썩 잡는다. '아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
나왔다. 어깨가 으스러질듯이 꽉 잡은 그 사람은 날 빙글 돌려 세웠다. 잔뜩 찌
푸린 얼굴로 마주한 그 곳에. 내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그 새끼가 서 있다. 무표
정한 얼굴로 말없이 날 쳐다보던 남우현이 입을 연다.
"여기서 뭐하냐?"
"…."
평소와는 달리 장난끼가 싹 가신 표정이다. 난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남우현을
바라보았다. 남우현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여기서 뭐하냐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따라와."
늘 이런식이다. 다짜고짜 끌고가서 죽도록 패거나 욕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5년째 늘 똑같은 패턴. 이제 나도 지겹다. 늘 힘없이 끌려가 맞거나 욕을 먹거
나 술,담배 심부름까지 했다. 반항할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 어차피 또 반복일
테니까. 힘을 줘서 손목을 빼내어 보려고 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다. 결국 또
힘없이 따라가며 문득 바라본 남우현의 뒷통수가 오늘따라 슬퍼 보이는 건 분명
내 착각일 것이다. 결국 남우현은 날 끌고 학교 뒷뜰에 도착했다. 내 손목을 거
칠게 팽개친 남우현은 무서운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난 반쯤 체념한 얼굴로 남
우현과 눈을 마주쳤다.
"때릴려면 때려."
남우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린다. 내가 맨날 아무말도 안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당황한 것일 것이다. 남우현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난 반사적으로 눈
을 꽉 감았다. 그리고 역시나…. 남우현의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 난 힘없이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남우현이 다시 내게 걸어와 자세를 낮춰앉아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또다시 주먹으로 내리쳤다.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다.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나가떨어진 날 일으킨 남우현이 주먹
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난 다시 눈을 꽉 감았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아
무 반응이 없다. 천천히 눈을 떠서 바라본 남우현은...울고 있었다. 치켜든 주
먹은 공중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내 멱살을 잡은 손 또한 힘없이 떨리고 있
었다. 처음보는 낯선 남우현의 모습에 난 할말을 잃었다. 남우현은 내 멱살을
잡고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서서 눈물을 슥-닦았다. 난 멍하니 그
런 남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서 한동안 말이없던 남우현은 비틀
거리며 이 곳을 떠났다. 난 한동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까부터 이상했던 행
동, 표정까지 모든 게 평소의 남우현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무슨 일이 있는걸
까. 잠깐 정지상태인 내 머릿속에 문득 아까 그 선배의 말이 휙하고 지나갔다.
'오늘 종례 끝나고 3학년 8반으로 와라. 늦으면 디짐.'
난 서둘러 몸을 털고 일어나 3학년 8반 교실로 뛰어갔다. 얼굴에 상처가 생각보
다 심각했는지 복도에서 날 본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이 들렸다. 정신없이 도착
한 8반 교실 앞에서 난 잠시 망설였다. 혹시 먼저 가버린 건 아닌가. 그러면 큰
일인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자. 는 마음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고 들여다본 교실 한가운데에 그 선배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교실 한가운
데에 놓여있는 두개의 책상 위에 누워있었다.
"더럽게 빨리도 오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 선배는 책상에서 내려와 내게 걸어왔다. 아, 때리려나
하고 눈을 질끈 감는데 무언가 툭 하고 내 가슴팍에 부딪힌다.
"들어."
난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안아들었다. 내게 가방을 안겨주고 그 선배는 앞서서
걸어갔다. 내 얼굴을 봤을텐데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난 조용히 선배의 뒤를
따랐다. 가방은 내가 비싸서 엄두도 못낼 메이커였다. 그러나 가방의 값어치와
는 달리 책따위는 들어있지 않은듯 가벼웠다. 도대체 어디로 갈 생각인지 선배
는 학교를 벗어나 어디론가 계속 걸어갔다. 아까 남우현한테 맞아 터진 데가 욱
씬거려왔다. 그나저나 남우현은 괜찮을라나?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의 주택가였다. 부자들만 산다고 해서 부자
동네라고 불리는 그 곳은 발만 들여놔도 기를 죽이는 이상한 곳이었다. 텔레비
전에서 나올듯한 으리으리한 주택들을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선배가 어느 집 앞
에서 멈춰선다. 난 말없이 선배의 옆에 가서 섰다. 선배는 날 투명인간 취급하
듯 초인종을 누르고는 문이 열리자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휙 들어갔다. 뭐, 어
떡해야 하는거지? 원채 소심한 성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게 서있
는데 선배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저...저기."
"다녀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어느새 그 부잣집 안에 들어와있었다. 부엌에서 예쁘게 생
긴 아주머니가 쟁반을 들고 걸어온다. '아,안녕하세요' 하고 얼떨결에 인사를
하니 아주머니가 싱긋 웃어주신다.
"그래, 명수 친구구나?"
"명수?"
고개를 훽 돌려 선배를 바라보는데 선배는 아주머니가 들고온 쟁반 위에 컵을
들어 무언가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다.
"아, 존나 써."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그것을 쟁반 위에 다시 올려놓은 선배는 그렇게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난 덩그러니 거실 한 가운데에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