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식 호그와트가 보고 싶어서 만든 세계관 입니다. 해리포터와의 유사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프리스틴 카테고리가 없어 기타를 선택합니다. (ㅠㅠ)
* 짤이 조금 많습니다.
* 노래 있습니다.
음양학당(陰陽學黨) ; 불여우(2)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여 년 전, 음양 세계에서는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없는 역사가 하나 만들어졌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하필이면 '비극'으로 말이다. 그 역사를 겪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린다고 말했다.
비극의 역사는 '요괴 군대' 속칭, '마군(魔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평화롭기 그지 없던 세상에 난데없이 몇 십만 명의 '마군'들은 음양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주요 도시들을 하나하나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발생 원인 불문. 주도자 불문. 모든 게 불문 투성이인 마군은 힘도 어찌나 강력한지 손도 쓰지 못한 채 수십만명이 학살당해야 했다. 당시의 음양 정부는 혼란. 혼란 그 자체였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하는 국가가 혼란스러워 대응을 못하니 그 아까운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국가가 우왕좌왕할 동안 어느새 마군은 수도까지 점령하였다. 단, 이틀. 단,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나라 안은 '지옥'이었다. 삼일 째 되던 날부터 국가가 드디어 군대를 편성해 파견하였고 그것은 십 년 넘게 지속되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마군은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상관 없이 학살하였으며 노인은 물론 어린아이, 여자, 남자 상관없이 그냥 '인간'이라면 가차없이 죽였다. 군대에는 유능한 퇴마사들도 많이 지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군을 막지 못했다.
그렇지만 전쟁 중반기에 들어서자 열세였던 한국은 미국과 중국, 베트남 등등 여러 각지의 나라에서 병사를 지원 받았고 열세를 우세로 만들었다. 정확히 전쟁을 한 지 32년 째 되던 해에 마군의 병사도, 한국의 병사도 남아나지 않았다. 결국은 한국, 음양인 측에서 휴전을 제안했고 마군도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휴전은 십 년이 넘도록 유지해오고 있었다.
마군 전쟁은 마군에게도, 음양인들에게도 큰 피해만 남긴 전쟁이었다. 음양인들에게 그날은 큰 상처였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아내가 하늘로 올라갔고, 하나뿐인 남편의 피를 보았으며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 딸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간 날이었다. 휴전 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빠른 속도로 돌아왔지만 음양인들의 가슴 속에 있는 상처는 회복되지 못했다.
마군을 설명하기 앞서, 요괴를 먼저 설명하자면 요괴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음의 기운들이 양의 기운과 적절히 섞이지 못하고 결합되었을 때 탄생하는 요괴가 있고, 주인이 타락하여 '음'의 기운으로 인해 신수가 악한 존재로 변한 신수 요괴가 있다. (신수는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적절히 섞여서 탄생하는 영혼이다.) 마군은 후자에 신수 요괴들의 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증가하고 있고, 마군의 구성원 대부분이 그들이었다.
전쟁이 휴전을 맞이하고 정부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깔끔하게 감춘 마군을 어렵사리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마군은 처음에는 자신들을 변하게 만들어버린 주인에 대한 분노로 인해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락하는 음양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신수 요괴도 증가하였고 덕분에 마군의 세력도 점차 커져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전쟁 초기에 정부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신수 요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요괴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왜 이런 이야기와 불여우가 관련이 있느냐.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 모든 방송사가 도시가 침략 당하는 현장을 취재했다. 그리고 생방송 중, 군대 맨 앞에서 전투를 하고 있던 신수 요괴가 생방송 화면에 잡혔었다.-그 당시에는 신수 요괴라는 걸 몰랐다.- 맨 앞에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꼭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또한, 그 신수 요괴는 주위의 다른 어떤 신수 요괴보다 힘이 강력하고 방법은 무차별하고 잔인했으며 화면에 잠시 동안 잡힌 눈은 화면으로만 보고 있어도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음양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그 신수 요괴는 휴전 후, 정체가 공개가 되었다. 바로 속성이 '화(火)'인 여우였었다. 화면에 잡혔던 요괴화된 여우의 모습은 깨끗한 신수일 때와 전혀 달랐다. 여우 요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도 사람의 모습, 그것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행색이 기괴하여 누가봐도 '괴물'이었다.
음양 세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 속성, 화 계열의 여우 요괴를 불리는 말이 '불여우'였었다. 그러나 여우 신수 요괴의 정보가 공개된 이후로 '불여우'라는 호칭은 요괴 뿐만 아니라 신수에게도 붙여졌다.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살육을 했던 여우 신수 요괴의 파급력이었다. 요괴가 아니라 신수여도 '화' 속성의 '여우'이면 닥치는대로 '불여우'라고 불러제꼈다. 아무런 분별없이 다 '불여우', '불여우' 해대니 그냥 신수일뿐이어도 좋은 인식이 있을리가.
또한, 신수 요괴는 신수 주인이 타락하여 만들어진 요괴. 여우가 주인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타락의 길로 빠질 거라는 이상한 말도 생겨났고, 그 이상한 말을 사람들은 받아드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불여우'는 혐오스러운 존재고, 절대 옆에 두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거였다.
"웃기고 있네"
'불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보보씨의 잡다한 상점'에서의 쇼핑도 미뤄두고 '쩨알쩨알하며 우는 새'라는 찻집에서 승관과 성연의 얘기를 들은 여주였다. 꽤나 긴 이야기에 중간중간 졸 뻔했지만 이야기 도중 나온 쩨알쩨알 파르페를 먹으며-승관이 사줬다.- 꾹 참은 여주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심드렁해졌다. 물론 전쟁이 있었단 이야기는 놀라워했지만.
승관과 성연이 알려준 '마군전쟁'에 대한 결말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나 큰 전쟁을 겪어놓고선 그 끝은 불여우 차별? 뭐 같네. 여주는 코웃음을 쳤다. 그 반응에 당황스러운 건 성연과 승관이었다.
"네? 뭐가요?"
"아니, 너넨 그게 안 웃겨?"
여주는 정말 모르냐는 듯, 되물었지만 성연과 승관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떠한 대답도 못하고 동그랗고 큰 두 눈을 깜빡거리기만 하였다. 여주는 파르페를 떠먹던 숟가락을 쪽 소리나게 빨은 후, 테이블에 던지다싶이 내려놓았고 그 소리에 1학년 둘은 움찔했다. 여주는 삐딱하게 잡았던 자세를 고쳐 앉아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맨 앞에 전투를 하고 있어도 그 여우 요괴가 진짜 우두머리인지 어떻게 알아. 그때 티비에서도, 뉴스에서도 그딴 말 없었다며"
"그, 그렇죠"
여주의 날카로운 눈빛에 승관은 더듬으며 대답했다.
"겨우 방송화면에 잡힌거가지고 이 난리라고? 웃기지 않냐?"
"...."
"그럼 만약에 맨 뒤에 호랑이 신수 요괴가 있었으면 호랑이 신수를 가진 사람들도 이 꼴 났겠네?"
승관과 성연은 가만히 여주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 흔들림이 오기 시작했다. 이 둘도 당근, 사람이었기에 주위에서 들리는 말들로 인해 영향을 받았었던 지라 불여우에 대한 인식이 딱히 좋다고 말하기는 그랬다. 그런데 그 생각을 여주가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이면 장군은 전장의 맨 뒤에 있지, 누가 앞에 있냐"
"...."
"제일 먼저 죽을 수 있는 자리가 맨 앞인건데 퍽이나 우두머리가 그 앞에 있겠다."
"...."
"하여간 어떤 세계든 잘 모르면서 정확하지도 않은 걸로 혼자 추측하고, 그게 맞다는 둥 행동하고.... 그러는 건 똑같구먼"
여주는 혀를 쯧쯧찼다. 여주가 열심히 열변을 토하는 동안에 승관과 성연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못 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여주는 답답하다는 듯, 크게 점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쩨알스러운 딸기 케이크 하나요!"
"아, 일신님! 그거 비싼데...!"
여주는 가볍게 무시했다.
"여기 휴대폰. 어제 개통 다 했어"
"무영 세계랑 비슷하네"
"그런 기술 정도는 교류하는 편이라서"
다음 날, 아침 등교에도 민현이 찾아와 같이 등교했고 민현은 여주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음양 세계는 여주에겐 특별한 세계라 생각했기 때문에 평범하게 휴대폰에 쓴다는 사실에 좀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별 티는 내지 않았다. 음양 세계의 휴대폰은 무영 세계의 휴대폰과 겉보기도 조작법도 많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주는 손쉽게 다뤘다.
"1번 꾹 눌러봐"
민현의 말에 여주는 순순히 단축번호 1번을 눌렀고 얼마 안 가 화면에 '민현 오빠'라는 이름이 떴다. 보자마자 여주는 썩을 대로 썩은 표정을 지었다. 민현은 개의치 않고 싱긋 웃으며 그런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뭐냐. 여주는 짜게 식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에 민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오빠는 맞잖아?"
"회장 새끼라고 바꿀까...."
"원래 하트도 붙이려고 했는데 휴대폰 모서리로 맞을 것 같아서 관뒀어"
"관두는 김에 이 이름도 어떻게 좀 관두지 그랬어"
"김종현한테 오빠라고 부른다길래. 괜히 질투가 좀 나서, 하하"
민현의 능글스러운 말에 무시를 시전한 여주였다. 소름 돋게, 덩치 산만한 인간이 무슨 질투야. 여주는 소름이 돋은 팔을 이리저리 쓸며 학교로 들어갔다.
학교에 도착한 뒤, 민현은 어제와 똑같이 다시 학교를 나섰고 여주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 모습에 왜인지는 묻지 않았으나 의구심이 들었다. '다음에 물어보면 되겠지'하며 여주는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에 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제 사과를 못 받은 것 같아서"
"...."
"그래서 불여우를 친히 보러 왔어."
"...."
"어제 일신이 네 편 들어주니까 좋았어?"
어제 보았던 그 소프라노 여학생이 자신의 친구들까지 데려온 모양인지 네 명이서 은우를 둘러싸고 구박하고 있었다. 여주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저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여럿이서 몰려다니면서 유치한 짓 하는 것들은 꼭 있네. 하나, 둘.... 네 명? 가만 보자, 소프라노는 있으니까 나머지는 메조, 알토, 테너? 할 짓 없으면 합창부나 하러가지, 으휴.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람.
여주는 합창부 무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은우가 주었던 빵과 우유, 치워진 방 안이 생각났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지라 여주는 '아, 씨....'라고 중얼대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우를 둘러싸고 있던 네 명의 여학생들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여주가 있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넷의 시선을 한껏 받은 여주는 로봇이 대사를 읽듯이 딱딱하게 말하였다.
"안녕, 룸메이트. 학교 되게 일찍 오네"
거기다가 어색한 미소와 손짓은 덤. 여주의 등장에 여학생의 친구들은 술렁술렁 하였다. '야, 망했다....', '그래서 내가 일신 오기 전에 하자고 했잖아...!' 다 들리는데 왜 작게 말하는 걸까. 여주는 합창단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올곧이 은우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길치라서 그런데 반에 좀 데려다줄래? 어제는 부승관 군이 다 서포트해서 괜찮았는데 오늘은 부승관 군이 안 보이네."
당연 거짓말이었다. 학교 오면서 승관이 보이길래 자켓으로 얼굴까지 가리며 뛰어들어온 여주였다. 민현이 그 모습에 크게 웃긴 했지만. 은우가 오늘도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자 답답한 마음에 은우의 손목부터 어제처럼 덥썩 잡았다.
"야, 너 어제부터 왜 계속 끼어들어?"
소프라노 여학생은 그런 여주의 행동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바로 여주의 손목을 잡았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소프라노 여학생은 알고보면 학교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그녀의 수식어는 '자존심 빼면 시체' 그리고 '터진 입'. 전자는 자존심이 세서 그런 별명이 있고, 후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선을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자존심 빼면 시체'라는 별명 답게 여주의 이런 행동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애들 앞에서 체면 구기는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까. .... 뭐, 그래봤자 여주는 눈 깜짝 안 했지만. 학교 다닐 때 워낙 말싸움이든 몸싸움이든 많은 싸움을 해본지라 이 정도로는 우스웠다. 충분히 무시 가능할 수준이었다.
소프라노 여학생은 아침인데도 목청이 살아 있었다.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는 덕에 여주도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소프라노는 달라. 아침부터 목이 살아있네. 그러나 속과는 다르게 여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귀가 따가웠거든. 소프라노 여학생의 쩌렁쩌렁한 목청 크기 덕분에 주위에 있던 등교하고 있던 모든 학생들이 '뭐야, 뭐야'하며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드는 모습에 여주는 혀를 한 번 찼다. 쯧. 다들 수업 안 가시나 봐요. 이런데 신경 쓰시고.
"신수가 일신이라서 나대는 것 같은데"
"...."
"너 원래 무영인이였어서 주술은 커녕, 신수도 다룰 줄 모른다며?"
여주는 그 말에 가만히 있었다. 아, 가만히 있던 것 아니고 때마침 귀가 간지러워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하지만 그 모습에 더 열이 뻗친 건지 소프라노 여학생은 눈을 부릅뜨고 여주를 향해 점점 시동 걸고 있었다.
"신수 소환은 할 줄 아니? 그래서 1학년 수업 듣는거야?"
"...."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일신이 신수가 된거야?"
뭘 시동거냐고? 그야, '터진 입'이였다. 이 여학생의 별명을 모르는 여주는 이게 시동인지 몰랐다. 그래도 이정도의 폭언이야 들어줄 만 했다. 오히려 무영 세계에서 듣던 욕이 더 상처였고 더 울컥했었다. 너, 사람 상처 받게 하는 법 좀 걔네한테 배우고 와라. 이정도로는 어림 없다, 야. 무영 세계 때 지독시리 자신을 괴롭혔던 무리들의 얼굴이 떠오른 여주는 순간 토할 뻔했다. 그러나 꾹 참았다. 그리고 자신이 괜히 대견해졌다.
와, 여기서 토했으면 전교생에게 토쟁이로 찍혔을 거야. 편입생. 일신 주인. 그리고 토쟁이.... 어우. 질겁한 여주는 뭐라도 다른 거에 집중해야 그 얼굴들이 안 떠오를 것 같았고, 어쩔 수없이 집중할 게 이 소프라노 목소리를 가진 여학생의 말이라 그것에 집중했다. 듣다 보니 소프라노 여학생은 '터진 입'이라는 별명에 맞게 폭언이 점점 수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수위가 심하지 않으면 그건 폭언이 아니긴 하지.
"일신이 전 주인 땜빵으로 너 구했나보다. 전 주인이랑 그렇게 알콩달콩 했다던데.... 근데 그 전 주인은 결혼해서 애도 낳았다며."
".... 뭐?"
"그거에 상처 받아서 주인이 죽자마자 19년 간 숨어 지낸 거라더라. 잊으려고. 그래서 네가 물어보는 거야. 너 전주인 땜빵이니?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무영 세계에서 살았던 별 볼 일 없는 네가 일신이 신수일 리가 없잖아"
"...."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뭐라도 하나 해줘야 주인으로 선택해줄 거 아니야. 일신이 잘 해줘? 아, 아니지. 네가 일신을 잘해줘야지"
"...."
"안 그러면 너는 일신한테 버려질 거니까"
여학생의 발언에 주위가 싸해졌다. 구경하러 몰려 있던 학생들도 미간에 주름이 질 정도였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도를 넘어선 발언에 여주는 눈썹이 꿈틀했다. 아아, 걔네한테 배우라는 말 취소, 취소. 상처 받진 않았지만 기분은 졸라 더러운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를 반박해줘야 하나 싶은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반박이 통하기는 할까. 벽 대고 얘기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게 없는데.
여주는 소프라노 여학생의 별명은 몰랐지만 성향은 알아냈다. 만약, 여주가 여학생의 별명을 알았다면 별명 지어준 사람 누구냐고 박수까지 치며 상도 줄지도 몰랐다. 여학생은 딱, 선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런 사람들이야 주위에 심심찮게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더라. 여주가 심사숙고하면서 소프라노 여학생에게 대적할 무기를 고르고 있던 그때였다. 승관과 성연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갑작스럽게 여주 앞에 파워레인저마냥 서 있었다.
"우리 여주님한테 너무 무례하신거 아니에요? 말은 막한다고 다 말이 아니예요."
"여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데 그런 소릴 하세요? 참 나, 여주님이 무영 세계에 산 이유도 모르는 주제에.... 우리 여주님은 무영 세계로 수련 가셨던 거거든요? 뭐 알지도 못 하면서...."
뭐 알지도 못하는 건 너희야, 이것들아! 승관과 성연은 시키지도 않은 여주의 보호를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둘의 등장에 여주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말리려고 해봤지만 이미 소프라노 여학생은 자신을 제쳐두고 이 둘과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주제는 여주인 건 변함이 없었지만. 아니, 저기요! 네 싸움 상대는 난데, 왜 이 꼬마들을 상대하는 거죠? 나, 질투나려고 그러는데!
여주는 말리려고도 해봤지만 패기 넘치는 이, 병아리 1학년 두 명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여학생에게 삐약삐약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피처링으로 소프라노 목소리까지.... 셋이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에 해탈한 여주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너희 그 잘나고 잘나신 여주님은 주술은 할 수 있대? 신수 소환은 너희도 무린데 역시 무리겠지? 무영인이시니까!"
"무슨 소리세요! 무영인이라뇨! 제 얘기 뭘로 들으셨어요! 그리고 발현이 늦었던 거지 주술은 물론이고 신수 소환도 할 줄 아실 거예요! 그것도 못 하실까봐?"
응. 그것도 못해. 승관의 말에 여주는 단언했다. 물론, 속으로. 승관과 성연이 양쪽에서 '할 수 있죠? 믿어요!' 이런 눈빛으로 쳐다보니 아무리 여주라도 눈치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소프라노 여학생을 비롯하여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의 시선까지도 모두 여주를 향하고 있으니 거기다가 자신있게 약점을 밝힐 수 없었다. 여주의 머릿속에는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지, 거짓말을 말해야 하는지 갈등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던 상황이 악화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여주는 조심스럽게 침을 꿀꺽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얼른 해보세요! 여주님!"
"...."
미친. 성연은 여주를 부추겼고 여주의 마음 속 입에서는 차마 담지 못할 육두문자들이 방언처럼 터지고 있었다. 누구의 발을 애타게 찾았고 뭐로 변했는지 뭐가 됐다는 말도 나왔다.
"저기,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학교 내에선 선생님의 허락 없인 주술 사용과 신수 소환은 금지야"
여주는 어디선가 들리는 구원자의 목소리에 소리가 들리는 쪽을 휙 쳐다보았고, 그곳엔 민경이 서 있었다. 선도부 일을 막 끝내고 온 참이라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진 않았지만 학생회답게 교칙을 위반하려는 상황에 제지를 두었다. 여주는 민경 덕분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승관과 성연을 포함하여 주변의 학생들은 실망한 티가 역력하였다. 민경은 교실로 가려고 몸을 틀었고 흘리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정식적으로 대결을 하는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
뒤이어 나오는 민경의 말에 여주는 토끼 눈을 뜬 채로 민경을 쳐다보았고, 승관과 성연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민경의 말은 계속 이어나갔고 그 말들에 여주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정, 그렇게 주술 사용과 신수 소환을 하고 싶다면 신수 대결장에서 하던가. 참고로 신수 대결장 개방시간은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야. 쓸거면 시간 잘 지켜"
민경은 곧 2학년 홈베이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자리에서 떠났다. 그리고 구원자가 망할 것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신수 대결'은 음양 학당을 비롯하여 각 학교마다 있는 특별한 풍습으로, 신수의 강함과 자신의 영력의 크기를 과시하고, 수련으로 발전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다. 대결은 '신수 대결장'에서 펼쳐지며 학교의 선생님이나 학교의 학생회-2학년 이상-중 한 명이 심판이 되어 펼쳐진다.
심판의 기준은 신수가 카운트 내에 일어서지 못하면 지는 것이고, 주인에게 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며 오직 신수와 신수만이 서로에게 공격이 가능하다. -신수가 해를 입으면 주인에게도 약간씩은 느껴진다.- 보통 사자. 호랑이, 늑대 등등 이런 육식동물들을 신수로 가지고 있는 주인이 승리의 깃발을 대부분 쥐긴 하지만 수련으로 영력이 강해진 초식동물을 신수로 둔 주인이 이기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리고 여주는 그 여학생과 신수 대결을 하게 되었다. 여학생은 여주가 일신임에도 불구하고 신수 소환도 못하고, 주술도 못한다고 생각하여 대결을 신청한 것이었고, 그 생각은 맞았다. 여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리 일신이라도 주인의 소환이 없으면 스스로 나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물론, 일신이니 어떻게든 나오는 건 가능하겠지만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바로 다시 주인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결론은 여주가 아무리 신수가 일신이어도 주인이 좁밥...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진다는 말이다. 거기에다 대결을 할 여학생의 신수는 흑곰이며, 속성은 수(水)이고, 공격력이 꽤 강하다. 또한 이 여학생은 1학년 때, 신수 대결을 자주 하였으며 대결에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주는 이런 소문을 듣고 난 후 더욱 더 절망하였다.
대결을 약속한 일이 있는 금요일 다음인 토요일, 여주의 부름으로 민현과 민현을 따라온 종현이 여주와 은우의 기숙사방으로 모였다. 나름의 비상 대책 위원회였다.-여주 지인들 모임이었지만.- 이미 전교에 소문이 퍼진 덕분에 여주가 부른 이유를 알았지만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들어보니 정말 웃기다면 웃기는 상황에 민현을 폭소케했다.
"푸하하하하, 그래서 진짜 신수 대결하는거야?"
"지금이 웃을 때야?"
여주는 서늘하게 민현을 바라보았다. 민현은 곧바로 얼굴에 띄운 웃음을 지웠다.
"미안...."
"진짜 일이 크게 벌려지긴 했다. 이미 전교에 소문 쫙 퍼졌던데? 일신이 신수 대결 나온다고"
"아, 맞아. 전교생이 보러올 것 같더라. 하하하"
"여주야, 진짜 미안... 괜히 나 도와준다고..."
옆에 있는 은우는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 여주에게 연신 사과를 하였다. 여주는 그에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은우에게는 괜찮았다. 그 병아리 두 놈이 문제지. 속으로 승관과 성연을 무지막지하게 씹고 있는 여주였다. 아, 물론 그 후 승관과 성연은 여주에게 아주 혼쭐이 났다.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냐고. 덕분에 그날 하루 동안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들 마냥 옆에서 다가오지도 못하고 낑낑거렸다. 여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일신도 사람처럼 생겼던데. 어떻게든 소환만 하면 알아서 싸우지 않을까"
"일신도 신수라서 어쩔 수 없이 주인의 주술 명령이 있어야 싸워. 음양 세계의 법칙이야"
"무슨 그런 개같은 법칙이...."
여주 나름 깊게 생각해서 나온 말이었지만 종현의 말로 묵살되었다. 아, 그럼 뭐, 어쩌라고! 여주는 그냥 잠이나 쳐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사 귀찮아진 여주는 풀린 눈동자로 나직하게 말했다.
".... 그냥 질까?"
"안 돼!"
"안 돼!"
민현과 종현이 동시에 여주의 말에 대답했다. 여주와 은우는 갑작스럽게 난 큰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채로 둘을 쳐다보았고 둘은 정말 완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일신이 지는 일 따윈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둘이다. 여주는 그 말들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대단한 일신이면 뭐 해. 주인이 좁밥... 아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 그럼 져도 할 말 없지. 여주는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생각해보니까 잘 됐네"
"뭐, 인마?"
뒤이어 나온 민현의 천하태평한 말에 옆에 있던 여주는 '이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야?'라고 말하며 바로 민현의 멱살을 잡았고 그걸 말리는 은우와 종현이었다. 멱살을 잡힌 민현은 잡힌 와중에도 이젠 멱살잡이가 익숙해졌는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하하'하며 웃기만 했다. 여주가 민현을 대하는 취급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해져가고 있었다. 멱살잡이가 풀린 민현은 잡혔던 옷가지를 정리하며 자신의 발언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불여우 왕따 문제가 학교에서 꽤 큰 문제라서 말이야. 학생회가 골머리 썩었거든. 근데 너 덕분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민현의 말에 종현도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은우도 고개를 작고 느리게 끄덕였다.
".... 음, 확실히 여주가 신수대결에서 이기면 문제처리가 쉬워지긴 하겠다"
불여우 왕따 문제는 음양학당뿐만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문제였다. 수많은 불여우를 신수로 둔 음양인들이 힘들어했다. 학교에서 문제는 직접적으로 괴롭힘보다 간접적으로 괴롭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생회에선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왜죠. 제가 이기는 거랑 그 문제랑 무슨 상관이죠"
이곳에서 여주만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지들끼리만 이해하고 있어. 씨. 심통이 난 여주가 입술을 삐쭉대자 종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해주었다.
"만약 신수 대결에서 네가 이겨서 그 자리에서 일신이 '불여우를 더이상 괴롭히지 마라'라고 언급해주잖아?"
"언급해주면?"
" 그러면 불여우에 대한 인식도 나아질뿐더러, 왕따문제도 어느 정도 없어지게 되거든."
".... 일신이 그렇게 말한다고 다 듣겠어요?"
종현의 말에 불신스러운 듯, 여주는 말했다. 그에 민현도 합세하여 여주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일신의 이름 봐봐. 일'신'. 말 그대로 일신은 우리 세계에서 신이야"
"근데?"
"신의 말을 거역할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신이 지면 학교 뿐만 아니라 한국을 넘어서서 전 세계에 난리가 날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지면 안 되는 거고"
그러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일신'이라는 하나의 신을 섬기는 거나 마찬가지네. 크리스트교로 친다면 예수님이 별 볼 일 없는 인간한테 지는 거랑 마찬가지다.... 뭐, 이런 건가. 여주의 말에 민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주는 뒷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일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분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모두의 꿈의 신수라고 하지만 모두의 동경을 받는 건 자신에겐 꽤나 번거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되면 여주가 이기는 게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은데? 하핫"
내 말이요. 여주는 종현의 말에 따라 한숨을 쉬었다. 다가올 미래가 걱정이 되었다.
"여주는 아직 신수 소환 안 배웠지?"
"네.... 이틀 동안 배운 건 이론뿐이라서"
아까도 말했듯이 여주는 주술은 커녕, 신수를 다룰 줄도, 신수 소환도 할 줄도 모른다. 아니, 음양 세계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도 여주는 하지 못한다. 왜? 이제 겨우 이틀 차인데,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랴. 여주는 다시 떠오른 승관과 성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하핫, 큰일 났네. 신수 대결까지 며칠 남았지?"
"... 5일이요. 목요일, 다섯 시"
촉박한 시간이었다. 신수 소환과 주술이란 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영력이 아무리 강해도 영력은 주술이 성공했을 시 위력이 높아지는 것이고, 신수 소환과 주술은 영력을 어떻게 다를 줄 아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여주였지만 사람이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5일 안에 해내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욱 똥줄이 탔다.
"어떻게든 제가 오일안에 신수 소환이랑 주술을 좀.... 해야할 것 같아서 불렀으니까 빨리 뭐라도 가르쳐줘요. 학생회장이랑 부회장이니까 곤란에 처해있는 학생을 좀 도와달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생전 부리지도 않던 앙탈을 부리는 여주였고 민현과 종현은 뒷목만 긁적댈 뿐이었다. 하핫. 신수 소환이랑 주술이 하고 싶다고 빨리 되는 게 아니라서.... 멋쩍은 웃음으로 여주를 진정시키는 종현이었지만 종현의 말은 여주를 진정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종현에 여주는 바닥을 팡소리 나게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 하니까 당신들을 부른거예요. 학생회장이랑 부회장은 성적도 뛰어나다면서요?"
아니, 김종현이 말했는데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민현은 무섭게 치켜뜬 여주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에 여주는 그 눈으로 종현을 휙 쳐다보았다. 여주의 서슬퍼런 눈빛에 흠칫한 종현은 손사레까지 치며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민현인 몰라도 나는 보통 학생들 기간 정도 소환하고 주술하고 그래서 나한테 배울게 없어...!"
종현의 말에 여주는 눈에 힘을 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은 어땠는데요?
"민현인 신수 소환을 하루만에 했거든"
은우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종현의 말에 크게 놀라 보였다. 하지만 여주에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으니 은우의 눈치를 한 번 봤다가, 민현의 눈치를 한 번 봤다가, 종현의 눈치도 보았다. 민현은 종현의 말에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 같은 걸 내색 않고 말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여우니까, 그렇게 놀라워할 것도 아니야"
"...."
"오히려 그 대단한 신수를 보통 기간 안에 성공한 네가 더 놀랍지. 그렇게나 까탈스러운 신수를"
뭐야, 이 훈훈한 이 상황은. 서로 품앗이 해주는 건가. 재수없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현과 종현이 말하는 분위기 상, 전교 1등과 2등의 대화를 보는 것 같아 괜히 기분 나빠진 여주였다. 마치, 너는 수학 점수가 더 높아서 나보다 공부 잘하는 거다. 아니다. 너는 영어 점수가 높은 걸 보니 나보다 네가 더 공부 잘한다. 이딴 대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여주는 빈정 상한 목소리로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말했다. 그에 민현은 '음....'하며 고민하다 여주를 보고 말하였다.
"우리보다는 걔네한테 가는 게 더 나을지도"
"걔네?"
"응"
"아, 걔네들?"
여주와 은우는 물을표를 띄운 채로 민현을 쳐다보았다. 종현만 알아들은 듯 했다. 또 지들끼리만 얘기 해. 민현과 종현의 알 수 없는 대화에 여주는 그냥 주어 좀 밝히면 어디 덧나냐고 역정을 내었다. 그에 민현과 종현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민현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여주에게 알려주었다.
"사방신(四方神)"
"사방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알쏭달쏭한 느낌에 여주는 심각한 표정을 짓자 원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역시, 사방신이 제일 간지나긴 해. 원우의 목소리와 동시에 눈앞에서 보았던 현무의 모습도 떠올랐다. .... 아, 간지긴 했지. 다시 생각해도 위엄 있는 현무의 모습에 여주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럼 그 신수를 가진 애들한테 신수 소환을 배우란거야? 여주의 질문에 민현은 맞다고 했다.
"이번에 들어온 현무를 빼곤 다 2학년, 3학년이라 널 좀 더 도와줄 수 있을거야."
"...."
"일신이 제일 세지만, 그래도 일신이랑 제일 비슷한 위력을 가진 신수인데, 걔네도 신수 소환을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렸거든"
"우리 때는 민현이랑 백호만 하루만에 성공했지"
"와...."
종현의 말에 민현은 팔꿈치로 종현을 툭 건드렸고,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그런 은우를 웃으며 쳐다보다 민현은 다시 여주를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원래는 월요일부터 사방신이랑 너랑 특별 수업을 받는데. 내일부터 한 번 나가봐. 내가 사방신한테 연락해둘께. 다정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하는 민현이었지만 여주에겐 그 내용 때문인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여주는 민현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말했다.
".... 내일, 일요일인데...."
"지금 너한텐 요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여주야"
맞는 말이지만 뭔가 재수 없게 들리는 민현의 말에 싱긋 웃는 얼굴을 칠뻔한 여주였다. 하지만 진짜로 칠 수는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꾸역꾸역 숨겼다. 얼추 여주가 앞으로의 방향을 잡으니 이 만남도 일단락 되었다. 종현과 민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어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기숙사 복도에선 여학생들이 둘을 보고 꺅꺅거렸다. 여주는 기숙사 학생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래, 저녁에 거의 다 큰 남정네 둘이 여학생 기숙사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안 놀랄 리가. 민현과 종현은 기숙사 로비로 나올 때까지 어색하게 사과하면서 나가야 했다.
방안에 남은 건 은우와 여주, 은우는 뭔가 심각한 얼굴이었다. 여주는 그런 은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뭐 먹을게 없나 찾아보고 있었다.
"여주야,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대결을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뭐?"
낮게 가라 앉은 목소리가 여주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여주는 냉장고에서 먹을 걸 찾던 행동을 관두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뒤로 휙 쳐다보았다. 은우와 여주는 눈을 마주했고 여주의 눈에는 꽤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고 있는 은우의 얼굴이 담겼다. 여주는 들어나보자라는 식으로 냉장고 문 손잡이에 손을 떼고 싱크대에 걸터 앉아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그에 은우도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대결에서 여주, 네가 얻는 이익은 없어. 이겨야 본전 찾은 거야."
"...."
"얘기 들어보니까 이제껏 무영 세계에만 살다와서 음양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지면 네가 잃을 게 너무 많아, 여주야"
여주는 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 이겨야 본전이었다. 일신인데 당연히 이겨야지. 전교생의 공통된, 아니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일, 여주가 지게 되면 주인의 자질로서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뒷말이 나오고 편안한 학교 생활은 그른 게 분명하다. .... 지금도 그른 것 같지만. 은우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굳이 불여우에 대한 인식 바꾸겠다고 네가 나설 필요가 없어"
"...."
"그리고"
"...."
"불여우에 대한 인식이 그런건 나도 이해하니까, 이렇게 계속 살아도"
"...."
".... 괜찮아"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은 진심이라는 듯이 은우는 여주를 바라보았고 여주는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은우를 쳐다보았다. 조금 뚱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눈빛 만큼이나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뭘 이해하는데? 느닷없는 여주의 질문에 은우는 약간 멈칫하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 그 전쟁 때문에 엄마,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많아. 그런 애들이 우리 학교에도 많고"
"...."
"부모를 죽인 원인인 불여우가 눈앞에 있는데 왜 안 싫어하겠어"
"...."
"사실 나도 내 신수가 불여우가 아니였으면 불여우가 신수인 애들을 피하고, 욕하고, 손가락질 .... 했을거야"
"...."
"그러니까 이해...."
"야"
말을 하면서 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은 미약했지만 방안은 조용했고, 그래서 더욱 잘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였다. 은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고 여주는 더 이상 듣기 싫은건지 한 번 인상을 구겼다가 피면서 은우의 말을 막아섰다. 말을 하면서 여주의 시선을 피했던 은우는 여주가 부르는 소리에 입을 닫고 다시 여주와 눈을 마주했다. 여주는 걸터 앉았던 싱크대에서 일어나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전쟁 네가 일으켰냐"
"...."
"네가 안 일으켰으면 걔네 이해하지 마"
"...."
"죄는 네가 저지른 게 아니고 걔네가 저지르고 있는건데, 왜 네가 이해하려고 해?"
"...."
"착한거야, 멍청한거야"
여주는 냉장고에서 푸딩을 찾아냈다. 은우가 산 거였지만 나중에 차차 갚으면 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냉장고에 기대어서 푸딩 껍질을 뜯었다.
"...."
은우는 어느새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힘들었던 게 한 번에 터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기대어서 먹으려다 숟가락이 없다는 걸 까먹었던 여주는 그 얼굴을 등지고 푸딩을 먹숟가락을 꺼내는 여주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불규칙한 숨소리와 작은 흐느낌으로 은우가 울고 있단 것쯤은 여주도 알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편히 울라는 배려인건지, 아니면 정말 신경이 안 쓰이는 건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여주였다.
그저 여주는 숟가락을 꺼내 태평하게 푸딩을 맛있게 먹기만 하였다. 푸딩의 상큼함과 달달함이 입 안에서 기분 좋게 퍼졌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이런 건 어디서 파는 거야. 여주는 푸딩의 포장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은우는 정말 오랜만에 맘편히 큰 소리로 울었다. 은우의 울음소리를 듣고만 있던 여주는 포장지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다가 관두었다. 그리고 다시 숟가락을 들어 푸딩을 떠먹었다.
꽤 느린 숟가락질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현생에 치이고 있다....
+새로운... 인물... 넣고 싶었지만... 넣을 타이밍이 없다.... 또르륵...
+은우는 우는 것도 예쁘다. 나대는 승관이와 성연이도 카와이하다. 종현이랑 민현이는 너무 잘생겼다.
+급해서 내용 확인도 안하고 올리니 며칠동안 조금조금씩 수정할 예정ㅎ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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