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백현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응? 이내 남자가 백현의 팔을 제 앞으로 당기며 입꼬리를 추욱 내렸다. 백현은 남자의 악력에 속수무책으로 침대에 엎어졌다. 남자 쪽으로 넘어가면서 벽에 머리를 받은 백현이 머리를 감싸쥐며 작게 신음했다.아, 아파. 그런 백현의 모습을 본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현, 왜 그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지 않은가. 때 묻지 않은 큰 눈망울로 살살 웃는데 백현은 무어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백현이 남자의 몸에서 일어나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찬이,너 뭘 잘했다고 웃어. 사뭇 단호한 백현의 말투에 남자가 눈을 치켜뜨며 백현의 교복 카라를 앙하고 물었다.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백현이 아래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 거 좀 놓고 말 해. 백현은 찬이가 무엇을 물고 놓아주지 않을 때 그랬던 것 처럼 남자의 양 볼을 두 손가락으로 눌러 벌렸다. 남자가 입을 삐죽이더니 카라 깃을 놓고는 백현의 두 볼을 양 손으로 감싸 꾸욱 눌렀다."백현, 이게 얼마나 아픈줄 알아?""야, 이거 안...야!"찬이가 아파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찬이가 말을 할 수 있게되니까 별 걸 다 알게되네.남자가 양 손으로 백현의 볼을 이리저리 부볐다. 백현이 간다고 할 때까지 안 놔줄거야. 남자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찬이는 힘 조절을 하지 못하는듯 했다. 백현이 뭉개진 발음으로 놓으라며 남자의 어깨를 콩콩쳤다. 사람 몸 속에 들어가더니 힘도 사람처럼 세진 거야? 양 볼의 근육이 뻐근해짐을 느낀 백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알았어. 가면 되잖아.""정말이지?""응. 근데 내가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해?""당연하지."백현아, 너 통화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니니?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에 백현은 당황해 남자의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쉿!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아. 남자가 문 틈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 보며 백현에게 속삭였다. 백현은 고른 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빨래를 개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찬이가 처량해 보였다. 엄마가 빨래를 갤 때면 옆에 가만히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강아지, 백현은 지금만큼은 낯선 남자가 아닌 빛나는 털을 가진 골든 리트리버가 제 곁에 있음을 느꼈다. 백현, 근데 내가 조용히 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백현한테만 들리는 건데. 백현이 남자의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너만 조용히 하면 나도 목소리 높일 일 없어. 남자가 따라서 백현의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자기도 꼭 한 번 해보고싶었다며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엄마 보고 싶지?""지금도 보고 있는데 뭘.""그래도 엄마가 너를 못 보는 거 섭섭하지 않아?""괜찮아, 아직도 난 엄마의 손길,눈빛,목소리를 기억하거든."곧 잊어버리게 될테지만. 남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백현이 남자의 볼을 주욱 잡아 당겼다. 그렇게 웃지 말고 환하게 웃어 봐 나처럼. 백현이 양 손가락으로 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남자도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 백현, 근데 요즘은 안 바빠? 그 때 백현의 머리에 문득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내일까지 숙제 안 해오면 알아서들해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대체 몇 시간동안 찬이랑 얘기를 한 거야. 백현이 가방을 뒤져 수학책과 연습장을 꺼냈다."찬이야, 나 숙제할거니까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있어.""백현은 맨날 숙제해.""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어.""백현이 가장 후회되는 게 뭐라고 했더라?"숙제한다는 핑계로 찬이와 놀아주지 않은 것. 백현이 편지를 불태우며 울면서 했던 말이었다. 대체 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거야? 남자가 생글생글 웃었다. 백현이 바퀴 달린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연필 끝을 씹는다. 정말로 후회하는 일이었다. 백현은 놀아달라고 멍멍 짖는 찬이를 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따가 놀아줄게. 찬이는 풀이 죽어 제 침대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후회했던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니 본인의 행동이 우스워 백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까짓 것 혼나고 말지. 뭐 하고 놀까?""찬열 병원 가서 놀자!""안 돼, 지금은 너무 늦었어.""흐음, 그럼 백현 그냥 숙제해."남자가 다시 한 번 몸을 침대에 뉘였다. 난 백현 모습만 보는 것도 재밌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백현이 숙제할 때 찬이를 방 안으로 들여 보낸 적이 없었다. 들여 보내달라고 밖에서 멍멍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 이어폰을 귀에 끼우며 애써 무시한 기억뿐이었다. 내가 찬이한테 너무 못 했구나. 백현의 마음속에는 온통 미안함으로 가득찼다."그럼 그냥 같이 자자.""정말? 나 백현이랑 같이 자는 거야?""그래."찬이의 몸집이 거대해진 이후로 찬이를 침대 위에서 재울 수 없었다.찬이가 바닥에서 잠을 청한 것이 거의 10년이었다. 찬이가 가끔 자는 백현을 보고 짖을 때며 백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화냈었다. 찬이야, 네 침대 가서 자. 그런 백현이 같이 잠을 자자고 한다. 남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 백현, 이 게 얼마만이지? 한껏 들뜬 목소리었다. 백현이 이불을 하나 더 꺼내 차곡차곡 개서 베개를 만들어 주었다. 베개 안 하면 고개 아플걸. 남자가 베개를 손톱으로 벅벅 긁는다. 백현은 그런 남자의 팔을 잡아끌어 제 가슴팍에 가져다 놓는다. 손 아프잖아."꼭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그치 찬이야?""백현, 정말로 돌아 간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서로 마주보며 남자와 백현이 살며시 미소 짓는다. 백현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긴다. 으음, 찬이야. 백현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남자가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백현, 이번에 나 떠나면 울지 않기. 잠든 백현의 입매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백현은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게 틀림 없었다. 어렸을 적 앞마당에서 찬이와 함께 뛰어놀던 행복했던 그 시절을.마이 찬! (My Chan!) 02W.마이마이"찬이야, 너 그 병원 이름 알아?""아니.""그럼 위치는?""기억 안 나."그럼 어떻게 가자는 거야! 백현이 소리를 빽 질렀다. 남자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며 백현을 흘겨 본다. 백현이 병원에 가지 않으면 찬이가 계속 가자고 조를 것임에 분명했다. 백현은 찬열을 보러 가자며 졸라대는 찬이를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이름도 모르고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국에 수많은 병원 중에 찬열이 있는 병원을 찾는 것은 모래알에서 진주를 찾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 곳곳에 전화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현이 책상 위에 추욱 늘어졌다. 화창한 일요일에 병원 곳곳을 찾아 다녀야하는 거야? 백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가 눈을 큼지막하게 뜨더니 문 쪽에 귀를 가져다댔다."백현, 이리 와봐!"제게 오라며 손짓하는 남자를 보고 백현은 터덜터덜 걸어 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귀를 쫑긋하는 남자의 모습이 퍽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뭔데 그래. 백현이 따라서 문에 귀를 맞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백현은 놀라서 귀를 더 가까이 가져다댔다."아드님이 지금 중환자실에...네, 아드님 이름이...박,찬,열. 오늘 저녁 6시쯤 찾아 뵐게요. 괜찮으시죠?"정말 그 박찬열인가. 백현의 엄마의 목소리가 사뭇 무거웠다. 보이지 않지만 백현의 엄마는 평소 습관대로 손톱을 물어 뜯고 있을 것이다. 백현은 입을 앙 다문채 방문을 벌컥 열고 엄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는 백현의 엄마가 백현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백현은 엄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지금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남자가 백현의 앞을 가로막더니 재잘재잘댄다. 얼른 같이 간다고해. 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박찬열이라는 사람 저 알아요?""얘기 들었니?""네.""당연히 알지. 우리에게 찬을 분양해준 아저씨 아들이잖아. 같이 논 적도 있었고."백현이 머리를 망치로 맞은듯 한 동한 멍하니 엄마를 바라 보다 어렴풋이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마당에서 눈 싸움을 하면서 같이 뛰놀았던 그애? 기억의 편린들이 조각조각 맞춰지는듯 했다. 아, 그 때 그 통통하고 동그란 무테 안경을 썼던 애, 이름이 찬열이구나.백현은 낡은 기억들을 잊고 있었다. 키도 부쩍 크코 살도 많이 빠진 찬열의 모습에 백현이 못 알아 본 것이 어찌보면 당연했다. 백현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난 건강하게 잘 지내는데,너는 왜. 그동안 이름도 몰랐고 십여년 전 얼굴을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백현은 마치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 가슴이 미어졌다. 왜 넌 나를 사랑했니. 백현이 눈물을 삼켰다."엄마, 저도 같이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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