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스콤 김태형 VS 그의 천적 전정국 ―
여주는 이제 대학교 2학년 올라가는 미술전공 여대생. 대학생이라고 하면 뭐 엄청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것 같지? 응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다들 CC 절대 하지 말라고 목 터져라 충고하지만 솔직히 멋모르는 새내기 때는 로망이라는 게 있잖아. 여주도 과 생활에 적응할 때 즈음 썸 타는 선배가 생겼음. 훈훈한 외모 때문에 신입생들 사이에서 전부터 말 많던 선배였는데 어쩌다 보니 여주랑 눈이 맞았어. 다들 부럽다고 난리인데 여주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어. 여주도 그 선배한테 호감이야 당연히 있었지. 근데도 이게 썸인지 쌈인지 설렐 틈도 없이 마음 졸이는 이유는 남자라는 동물이 자기 옆에만 있어도 식겁하고 떼어놓으려는 인간 때문이야. 바로 남동생 태형이었지.
누나 영향으로 연애 같은 거 쳐다도 안 보는 태형이가 누나 연애에는 관대할까? 절대 아니야. 여고 다닐 때에는 좀 안심했는데 대학 들어간 작년부터는 시커먼 사내놈들이 누나한테 뭔 짓 할까 봐 오만가지 걱정을 다 하는 태형이임. 대학 가면 개나 소나 다 연애한다던데, 누나한테 남자친구 생겼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함. 몇 달 전 남자 선배가 여주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장면을 목격했어. 집에 오자마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정도로 여주한테 캐묻고 신경질 내서 결론만 말하자면 둘이 깨지게 하는 데에 성공함ㅎㅎ. 자기랑 아빠를 제외한 남자랑 단둘이 있는 누나 모습을 처음 목격한 태형이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어. 누나 옆에 자기 말고 다른 남자가 서있는 건 생각도 안 해봤거든. 그래서 이 이후로 더 여주 주의 깊게 주시하는 태형이. 누나한테도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생길 수 있구나, 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아까부터 계속 전화오는데? 누구야?"
"응? 아니...ㅎㅎ 아는 선배."
"선배 누구? 남자야?"
"아니이- 같은 과 여자 선배야."
둘이 같이 외출해서 밥 먹으러 왔는데 테이블 위에 엎어둔 여주 핸드폰 계속 진동하니까 또 예민해지는 태형이. 여주 웃으면서 대답하면서도 손으론 몰래 테이블 밑에서 문자 침. '정국아 나중에 전화할게.' 여자 선배는 개뿔. 사실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남자가 있거든. 두 살 어린 고등학생에 심지어 태형이랑 같은 학교야. 교복 입고 만난 적 몇 번 있어서 같은 학교라는 거 알고는 있었는데 태형이 얘긴 아직 정국이한테 안 했음. 워낙 자기 일에 유별나게 구는 태형이 때문에 괜히 정국이 난처해질까 봐 였어. 불편해할 것 같기도 하고. 둘이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국이와의 관계를 태형이가 알게 되면서 좋은 상황이 연출될 일은 절대 없으니까.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
"…너 누구랑 싸웠어? 얼굴이 왜 그래?"
"그냥, 축구하다가 좀 다쳤어요. 신경쓰지 마요."
축구를 얼굴로 했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들은 아니였어. 걱정되는 눈으로 쳐다보니까 '오늘 뭐 할까요, 우리?' 하고 정국이는 급하게 화제 돌려버림. 눈치챘겠지만 정국이 얼굴, 축구하다 그렇게 된 거 아니거든. 근데 어떻게 솔직히 말해. 안 그래도 여주가 가끔 자기 어린애 취급할 때마다 자존심 팍 상하는데 같은 반 애랑 주먹다짐하다가 이렇게 된 거 알면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는 나이냐며 막 웃을 것 같았음. 그거 싫어서 거짓말한 건데 자기가 봐도 핑계가 너무 택도 없었음. 여주도 그거 알지만 그냥 넘어가 주는 것 같아서 쪽팔림인지 뭔지 얼굴에 열이 확 올랐음. 그냥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지.
근데 정국이 그걸로 쪽팔려할 필요 전혀 없어. 똑같이 말하는 애가 한 명 더 있거든ㅎㅎ
"너 얼굴이 왜 이래?!"
"축구하다가 다쳤어ㅎㅎ"
쓸데없이 이럴 때에도 해맑기만 한 태형이 때문에 한숨만 나옴. 가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대산데? 여주 바로 정국이 떠올랐음. 그 이후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에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부정하려 했음. 에이, 설마. 나이가 몇인데 주먹질이나 하고 학교에서 사고 쳤겠어? 그리고 아직 둘이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걸. 태형이 얼굴에 약 발라주면서 정국이 생각 떨쳐내려는 여주였음. 괜히 정국이 생각하고 있다가 태형이 앞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말 잘 못 나올까 싶어서. 여주 입에서 남자 이름만 나와도 펄펄 뛰는 태형이니까.
태형이 여주가 치료해주는 손길 받으면서 마냥 행복한 얼굴로 헤헤 웃고 있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맞을 걸 그랬나. 누나가 걱정해주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음. 아니, 사실 좋았지. 그것도 엄청. 근데 또 솔직하게 누구랑 싸웠다고 말하면 걱정 많이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둘러댔어. 축구하다가 다쳤다고. 캬, 김태형 순발력 봐라. 당황하지 않고 눈도 깜빡 안 하고 누나를 속였다는 생각에 뿌듯한(?) 태형이. 거기서 멈췄어야 된다는 걸 몰랐던거지ㅎㅎ
사건의 발단은 늘 언제나 똑같이 벌어지는 일상에 불과했어. 예상했겠지만 정국이랑 태형이는 사이가 엄청 안 좋아. 둘이 학교 얼굴 간판인 것도, 축구 광인 것도, 여자애들한테 인기 캡짱인 것도 등등 공통점이 되게 많은데 그게 은근한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킨 거지. 근데 사실 그건 부가적인 문제고 결정적으로 둘이 성격이 안 맞아. 정국이는 태형이가 교실에서 너무 시끄러워서 원래부터 좀 꺼려 했어. 아무리 쉬는 시간이라도 반 안에서 공 튀기고 노는 거 정국이는 진짜 개념 없다고 생각했음. 태형이는 공으로 애들 맞추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쉬는 시간 10분인데 너무 짧잖아. 운동장 나가면 종칠 것 같은데 공놀이는 하고 싶고. 그래서 교실에서 공 튀기는 것뿐이야.
근데 그게 시작이었지. 정국이는 잘 때 누가 깨우는 걸 엄청 싫어해. 태형이는 에너자이저처럼 학교에서 내내 활발하게 활동하는 반면 정국이는 딱 점심시간 축구할 때에만 말짱한 정신이고 나머지는 거의 책상에 엎드려서 일과를 보냈음. 하필 또 맨 뒷자리라 태형이가 교실 뒤에서 공놀이하면서 소란스럽게 하는 거 안 그래도 거슬렸던 참이었음. 한 번 걸리면 보자, 했는데 딱 걸려버린 거임. 태형이가 친구한테 패스한다는 게 그만 잘 못 튀어서 공이 정국이 뒤통수를 가격해 버린 거야. 아. 엎드린 채로 딱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정국이 목소리에 순식간에 교실 분위기 싸해짐. 정국이 천천히 엎드려있던 몸 일으키면 태형이가 막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헐,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막 쩔쩔매는데 정국이는 그런 거 보이지도 않고 그냥 이 상황이 짜증 날 뿐이야. 그러게 애초에 교실에서 공놀이를 왜 하냐고. 넓지도 않은 공간에 애들한테 피해만 주고.
"재밌냐? 니들 때문에 애들 불편해하는 건 안 보이고?"
"…뭐?"
"너네가 쉬는 시간마다 뒤쪽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애들이 지나다니지도 못 하잖아. 그렇게 축구를 하고 싶으면 운동장 나가던가."
자다 깬 것도 짜증 나는데 맞은 뒤통수가 아직 얼얼해서 쌓아뒀던 말 폭격기처럼 와다 쏟아붓는 정국이. 태형이는 처음에 조금 당황하다가 약간 어이가 없어짐.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분명 미안하다고 했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도 했는데 자기를 무슨 민폐 덩어리 취급하니까 되려 열받는 거임. 야, 너 말 다 했냐? 축구공 옆구리에 끼고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니까 태형이 올려다보던 정국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남. 내가 뭐 틀린 말했냐고 당당하게 나오는 정국이가 태형이 신경을 더 긁었어. 그 뒤는 안 봐도 뻔하지. 또래끼리 이런 다툼? 있을 수 있지. 문제는 그 다툼이 해결이 안 되고 그렇게 이 년 째 지속됐다는 거지만. 그 공놀이 사건이 2학년 때 있었거든.
정국이는 선생님들도 이해 못 하겠음. 작년에 그렇게 서로 죽일 듯이 기싸움하는 거 다 봤으면서, 둘 불러내서 한심해하는 얼굴로 훈계까지 했으면서 결국 또 같은 반에 넣음. 이건 그냥 싸우라는거지ㅇㅇ. 고삼이니까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서로 지나가다 한 대씩 치라고 그러는 건가 싶기도 함. 근데 둘이 하필 또 같은 축구부야.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서 얼마나 피 튀기는 열전이 벌어지는지 몰라. 축구부에 다른 애들도 많긴 한데 거의 전정국 VS 김태형 임 ㅋㅋㅋㅋㅋ 여자애들도 파 갈려서 응원하는데 그게 또 은근 경쟁심리를 부추긴단 말이지.
둘이 축구하면서 서로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를 태클 걸다가 진짜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음. 그날도 그런 경우였고. 똑같이 땀에 흠뻑 젖은 체육복 차림의 두 남학생이 교무실에 나란히 서있었어. 열중쉬어 자세로,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해서는. 너네는 도대체 언제 철들래, 내일모레 성인인데 언제까지 애처럼 굴 거냐, 어디 신성한 학교에서 주먹질이냐 등등. 둘 다 입술 불어터진 상처 하나씩 달고 네, 네 대답만 하는데 담임 마지막 말이 피날레였어. 둘 다 내일 보호자 한 분씩 모시고 와! 더는 안 되겠다며 내린 특단의 조치였음.
정국이는 오늘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다는 표정 한 번 짓고 그만이었는데 태형이는 사색이 됐어. 보호자면 누나도 가능하긴 한데 분명 누나가 걱정할거고 솔직히 또 잔소리 들을 생각하니까 막막해. 근데 부모님은 두 분 다 맞벌이하셔서 괜히 자기 때문에 더 피곤해하시는 거 보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결국 누나의 잔소리를 선택한 태형이. 여주 안 그래도 과제 때문에 바빠죽겠는데 동생 놈 때문에 다시 갈 일 없을 것 같던 고등학교에 호출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어. 태형이는 자기 눈치보면서 흐헿, 웃는데 화낼 수도 없고 진짜. 말없이 한 번 노려봤더니 금방 입 꾹 다물고 얌전해지는 태형이. 둘이 같이 등교하니까 당연히 이목이 집중돼. 야, 김태형 옆에 저 존예는 누구시냐? 누나 아니야? 김태형 누나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아, 어제 일 때문에 설마 보호자 데려온거임?ㅋㅋㅋㅋㅋㅋ 태형이 신경 안 쓰고 싶어도 신경쓰임. 특히 자기 누나한테 예쁘니 뭐니 얼평하는 것들 때문에 심기 불편함. 평소답지 않게 얼굴 싹 굳히고 여주 어깨에 팔 둘러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태형이. 누나, 앞만 보고 걸어야 해. 여주는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얘가 또 앞 뒤 상황 볼 줄 모르고 무작정 소유욕 발동하니까 신경질나서 팔꿈치로 태형이 옆구리 살짝 쳤음. 그래도 꿈쩍 안 하는 태형이.
"왜 너만 와? 한 명 더 있어야 하잖아. 어딨어?"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야!!!"
오자마자 정국이 얘기부터 꺼내니까 심통난 태형이. 자기도 모르게 삐딱한 말투로 대답했더니 여주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부라렸어. 너 자꾸 이러면 진짜 죽는다. 딱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 아우,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동생 교육을 제대로 시켰어야 하는건데. 연신 허리를 숙이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여주를 보고 있자니 태형이 마음이 좋지가 않아. 괜히 자기 때문에 이런 꼴 당하는 거 생각하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누나가 왜 사과를 해. 뭘 잘못했다고! 여주 팔목에 힘줘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태형이를 담임이 어이없게 쳐다봤음. 쟤는 여기서도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는구나, 싶었지. 여주 선생님 표정 보고 다급하게 태형이한테 잡힌 팔목 빼내려 해도 꿈쩍도 안 하는 태형이. 더 숨 막혀진 분위기에 여주가 긴장하면서 침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는데 담임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대뜸 소리침. 넌 또 왜 혼자야!
자기들한테 한 말 아닌 거 알아차린 태형이랑 여주가 동시에 뒤돌아봤어. 잠에 취한 눈으로 터벅터벅 교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정국이랑 눈 딱 마주친 여주. 둘이 어떤 반응이었냐고? 안 봐도 뻔하지 뭐. 정국이 졸려하던 눈 확 떠지면서 동공 지진 일어났어. 그리고 '누나가 왜 여기….' 하고 아련하게 말했지. 여주는 같은 학교니까 정국이 마주칠 수도 있을 거란 생각 하기는 했는데, 그게 이렇게일 줄은 몰랐던 거지. 요즘 바빠서 잘 못 만났는데 그새 얼굴에 새겨진 상처에 흉터 자국이 눈에 들어왔어. 그리고 태형이 얼굴을 한 번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여주. …설마, 설마 아니겠지. 여주가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는 줄도 모르고 태형이는 둘 사이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어. 뭐야, 너 왜 우리 누나한테 아는 척이야? 언제 봤다고 누나래! 버럭버럭 소리지르는 태형이와 동시에 혼이 나간 듯 멍해진 정국이. …설마. 정국이 여주만큼 불안해해. 그 순간 정국이 여주랑 다시 눈 마주쳤지. 그런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건지 태형이가 여주 손목 살짝 잡아당겨서 자기 뒤로 숨기듯이 해. 그제서야 상황이 백퍼센트 이해된 정국이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외치겠지. 아, 좆됐다.
…그냥 한 번쯤 보고싶었던 모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