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진짜 웃겨서. 지가 뭔데 너보고 깜찍이래!! 넌 내 깜찍이거든?" 완전 어이없어. 교실로 와서도 학연은 어이없다는 말만 계속 되내었다. 택운은 학연에 의해 강제로 팔짱끼기를 당한채로 초코우유만 기계적으로 마시고있다. "근데 저번에 너 교무실갔을때 왜 삐진거였어?" "언제?" "내가 문학쌤한테 수행평가 대신 내달라고 부탁한 날." "..." "..." 학연은 다시금 그 때가 떠오른 듯 입술을 살짝 삐죽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목이 타는지 택운의 손에 들린 초코우유를 원샷해버린다. "어, 내건데.." "너 하나 더 있잖아." 그래도.., 그건 원식이 준 거였다. 아까까지만해도 속으로 시발시발거리며 초코우유만 주구장창 먹이는 원식을 미워했는데 막상 저에게 준 걸 학연이 뺏어 먹으니 그게 또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거다. "..그 때 삐진거 아니야." "그럼?" "그런 게 있어." 차마 원식의 책상에 놓인 초코에몽을 달라며 애교를 떨었지만 쟈갑게 거절당했다고는 말 못하는 학연이다. "그건 그렇고, 운아." 택운은 일단 기분을 풀기로 했다. 원식이 준 초코우유라서가 아니라, 내 걸 학연이가 먹어서 그런거라고. "나 오늘 너네집 놀러가면 안돼?" "싫어." "아, 왜! 집에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싫어." 학연이 택운과 꽤 가까이 붙어 앉았다. 코찔찔이 꼬맹이 시절부터 둘이 함께 커온터라 두 가족도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왔다. 그리고 택운과 학연의 가족이 유채꽃을 보러가겠다며 덜컥 제주도 행에 오른지 오늘이 딱 1일째라는 말씀이 되시겠다. 누나도, 형도 다 비행기에 올랐는데 택운과 학연은 그대로 집에 남았다. 고3이라는 이유로.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응?" 저번에 피씨방도 같이 안갔으면서. 뒷말까지 전한 학연은 그제야 택운과 오롯히 보낸 시간이 까마득한 옛날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은 기필코 놀겠어! 라며 다짐하는 학연이다. "우리 다다음주 중간고사야." "어차피 공부도 안하는게." "..." "아, 해도 성적이 안나오는건가?" 일순 택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걸 학연이 캐치했다. 죠아써, 걸려들었어! "내가 모르는거 가르쳐줄까?" 전교 상위권에서 놀고있는 학연과 반에서 평타치는 택운과는 레벨이 달랐다. 모의고사까지 포함한다면 전국에서 이름을 오르고 내리는 학연이니, 물이 다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택운이라도 공부에 신경을 쓰지 않을까. 벼슬이라는 고삼타이틀을 떡하니 붙이고 부모님의 은근한 기대를 온전히 받고있는데. 그리고 원식의 똥등급이라는 망언이 내심 신경쓰였던 택운에게 믿음직한 학연의 저 말이 쐐기를 박았다. "진짜? 진짜 나 가르쳐줄거야?" 학연이 택운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고 그윽한 눈빛으로 택운을 바라봤다. 인자하게 웃으며 끄덕이는 학연에게서 전교1등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럼 나 오늘 너네집 놀러간다?" "노는 거 말고.." "알았어. 공부하자, 우리." 원래 이렇게 성적에 신경쓰는 애가 아니었는데. 학연은 택운이 제 자식이라도 된 양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요즘들어 쉬는시간엔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앉아 공부하는 택운이었다. 맨날 자던 녀석이 웬일이래. 대견한 마음에 학연이 팔을 뻗어 택운의 머리 위에 손을 척 얹었다. 고새 학연이 귀찮아진건지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택운 때문에 학연의 앞엔 동그란 뒷통수 하나가 놓였다. '짜증나.' 아까 원식이 택운의 머리를 쓰다듬은 게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 깜찍인데...! 학연은 입을 쭉 내밀고 괜히 택운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고개를 돌린 택운이 멀뚱멀뚱 학연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곤 문제집에 집중했다. 학연은 택운의 볼을 또 꾹 찔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냥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 "버스 안 타?" "응. 차 있어." 정류장 쪽으로 향하던 학연의 팔을 택운이 잡아끌었다. 무슨 차? 학연이 택운에게 물었지만 둘 앞에 부드럽게 멈추는 검은 차가 택운의 대답을 대신했다. "얘도 타도 돼요?" 택운은 조수석이 아닌 뒷자석에 학연과 나란히 앉고나서야 원식에게 물었다. 이미 탔잖아. 바람 빠지는 소리로 피식 웃은 원식이 룸미러를 통해 택운을 바라보았다. 택운의 옆에 찰싹 붙은 학연과도 눈이 마주쳤다. 아아, 25번 쟤. "넌 집이 어딘데?" 학연을 향해 묻는 말이다. 평소 같았음 순순히 대답해줬을 학연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초코에몽부터 자기 자리를 뺏은것까지. 학연은 원식이 마음에 안들었다. 게다가 원식은 택운의 집도 알고있고 매일 태워줬던 게 분명했다. 택운과 꽤 친하다고 생각했고, 택운에 대해 모르는게 없다고 자부했던 학연이었는데 그걸 원식이 조금씩 망쳐놓으니 제 나름대로는 불만이었다. "택운이네 집으로 가시면 돼요." "왜?" "저, 오늘 택운이랑 같이 잘거거든요." 학연이 택운의 어깨에 턱을 걸쳤다. 아슬아슬하게 맞붙은 두 얼굴은 보는 원식이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원식은 시선을 룸미러 속 택운의 볼에 진득하니 고정시켰다. "멀쩡한 너네 집 두고. 왜?" "제가 운이한테 가르쳐줄게 있어서요." 눈을 살짝 감은 학연이 원식을 놀리듯 답했다. 금방이라도 입이 닿을 것 같은 포즈에 약간 올라간 입꼬리와 눈빛, 그리고 대사까지 더하니 택운을 꼬시려는 게이 한마리로밖에 안보였다. 적어도 원식에게는. "정택운, 뭐 배우는데?" "..그냥," 문학이요. 택운은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나 공부 못한다고 놀려서 공부하려고요, 라는 착한 학생 코스프레를 했다간 오구오구 거리며 원식의 뽀뽀 세례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저희 둘만의 비밀인데요?" 학연이 택운을 꼭 안고 잔망스럽게 말했다. 거울을 통해 원식과 눈이 마주친 택운이 잽싸게 눈을 내리깔았다. 나빴어, 정택운. 알려주지도 않고. * 집으로 돌아온 원식은 전전긍긍, 발을 동동 굴렸다. 그간 봐왔던 학연의 모습을 보나, 아까 택운을 바라보는 학연의 끈떡지근한 눈빛으로 보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게 분명했다. 애써 태연한 척 책을 읽는 원식이지만 머릿속에선 학연과 택운이 주연인 야시꾸리한 영상이 자동플레이가 되었다. "아오!" 원식이 손에 쥐고있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무턱대고 윗집으로 쳐들어갈수도 없고.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 몇 번째 거는 전화인데도 택운은 묵묵부답이다. 원식은 답답한 마음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1004호와 달리 1104호는 평온하다.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위험한 장난은 무슨,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공부하는 바람직한 고삼의 모습뿐이다. "너 작년에 평균 3등급 맞은거 보면 그렇게 공부 못하는 머리는 아닌데." "..." "근데 국어에 젬병이네. 모의고사는 5등급 맞고 문학 내신도 거지고." "..너도 똥등급이라고 말하려고 그러지?" 사근사근 물으며 학연을 향한 분노의 눈빛을 감추지 않는 택운이다. 똥-등-급~?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학연이 되물었다. 야, 그게 뭐 똥등급이냐! 푸하하, 웃으며 나름 택운을 위로하는 학연이지만 택운의 눈엔 그저 얄미운 생명체 하나에 불과했다. "너 평소에 책 좀 많이 읽어라! 수업에 집중 좀 하고." 지금 책 읽기엔 좀 늦었나? 학연이 택운의 3월 모의고사 시험지를 냉큼 채가서 대충 훑어봤다. 지문에 답이 다 나와있는 문제였는데 고새 함정에 빠져 엉뚱한 답이 체크되어있었다. 택운이 귀찮다는 듯 탁상 위에 엎드렸다. '야, 내가 89쪽까지 풀으라고 했지! 시간 계속 재고!' 학연은 일단 독해력을 높이려 비문학만 주구장창 풀게 했다. 야자까지 마치고 새벽 두시까지 이어지는 고된 훈련에 택운도 학연도 진이 빠졌다. 택운이 읏차, 하며 몸을 겨우 일으키는데 학연은 뒤로 벌러덩 누웠다. "아까 내가 알려준거 기억하고.., 내 책 보고 필기 못했던 거 제대로 해.. 모르는거 있으면 나 부르고...." 웅얼웅얼 느릿하게 말을 잇던 학연은 꿈뻑꿈뻑, 눈을 몇번 감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택운은 지문 하나당 3분 내로 풀면서 학연과 약속했던 89쪽까지 모두 끝냈다. 슬쩍 학연을 보니 그르릉, 작게 코를 골고있었다. 그나마 내일 토요일이라서 다행이지. 택운은 방에서 이불을 끌어 학연의 위에 덮어주었다. 책들을 대충 정리하면서 택운은 그제야 핸드폰을 보았다. '부재중 통화 14건' 모두 원식에게서 온 전화다. 무음이라서 몰랐는데. 마지막으로 온 전화가 8분 전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지금은 주무시겠지, 하고 택운은 넘어가기로했다. 거실 불도 끄고 제 방 침대로 가는데 어둠 속에서 택운의 핸드폰이 밝게 빛난다. 또 원식이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왜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있어? "아. 무음이라서 몰랐어요." -잠깐 나와. 어딜? 뚝 끊긴 전화에 택운은 현관문을 바라봤다. 집에서 나오라고? 거울 앞에 선 택운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잠옷인데... 학연이 깨지 않게 택운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등이 켜져 밝아진 계단에, 10층과 11층 사이에 원식이 우두커니 서있다. "차학연은?" "지금 자요." "둘이서 뭐하고 있었어?" "공부요." 원식이 한걸음, 한걸음 말을 주고 받으며 계단을 올랐다. 두 계단을 남기고 멈춘 원식이 택운을 진득하니 쳐다봤다. "그럼 저 들어가도 돼죠?" 원식의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택운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원식은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성큼 오르더니 택운을 제 속에 가뒀다. "잠깐만 안을게." "..."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전화도 안받고. 택운은 그저 원식에게 가만히 안겨있다. 팔을 들어 원식의 허리를 감싸려다가 그냥 내려버렸다. "택운학생." "네." "차학연이랑 진짜 별일 없던거 맞죠?" "제 말 못 믿으세요?" "아니, 믿는데 차학연은 못 믿겠어." 계단등이 꺼졌다. 택운이 팔을 휘휘 저어 불을 킬까, 생각하다 이 역시도 가만히 있기로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원식과 같이 있는게 더 좋았다.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었다. 택운이 원식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데 학생, 선생님 싫다면서 나한테 잘만 안기네요?" "선생님이 저 안은거잖아요." 이제야 택운이 몸부림을 쳐서 벗어나려했지만 원식에게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원식은 택운을 꽉 끌어안았다. "학생, 있잖아." "네." 짐짓 진지한 말인지 원식이 침을 한번 삼켰다. 서로 얼굴이 가까운 상태인지라 침을 삼키는 소리가 택운에게도 들렸다. 괜히 택운도 같이 진지해져 표정까지 굳혔다. "아침에 학교 꼭 와~" 원식이 택운의 볼에 기습뽀뽀를 날리고 그대로 아랫층으로 뛰어갔다. 껑충껑충 계단을 내려가는 원식의 모습은 짝사랑에 단단히 빠진 초등학생 남자애같이 보인다. "뭐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택운의 표정은 싫지가 않아보인다. 택운은 저도 모르게, 원식과 같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 * * * * 개강 준비하느라 자주 오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올거예요! 랍택 행쇼할때까지 내가 못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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