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크리스] 《마왕의 제물》 1 - 인스티즈(instiz) 픽션 카테고리

"마왕의 성인식이 곧 열린데"

"근 500년간 가장 강력한 마왕이래"

"마계에서 난리가 났다나봐."

더러운 죄수용 수레안에 갖힌채 잠들어 있던 ㅇㅇ가 힘겹게 눈을 떴다. 꿈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 어렸을 적, 가족들과 함께 했던 희미한 기억이 ㅇㅇ의 꿈속에선 자주 되풀이되곤 했다. 그런 꿈을 꾼 뒤 잠에서 깨고 나면 아무런 보호막 없이 날선 세상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진짜 현실인데도 매번 받아들이기가 벅찼다. 그리고 이번에도.

ㅇㅇ는 덜컹거리는 수레 때문에 창살에 머리를 쿵쿵 박다가 이내 창살을 손으로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몇시간을 이렇게 이동한 것일까. 난 어디로 가게될까. 이렇게 죽게되는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어린 동생들에게 까지 이어졌다. 어린시절의 행복한 기억조차 없는 불쌍한 내 동생들. 나조차도 부모님의 얼굴이 가물가물한데 그 아이들은 오죽할까. 저를 엄마처럼 따르는 아이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내가 죽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나와 한살 터울인 디오가 모든걸 책임져야 할 텐데. 그렇다면 그토록 좋아하는 마법공부는 더이상 할 수 없겠지.

ㅇㅇ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래 우리집안은 유서가 깊은 귀족가문이었다. 따듯한 집과 사람들, 자상한 아버지와 어머니, 귀여운 나의 동생들, 마당에서 뛰어놀던 하얀 강아지들... 조각조각난 기억을 더듬어보면 절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집안에 우환이 닥치기 시작한건 저가 10살 남짓할 때였다. 어느날 갑자기 군사들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데려가버린 그 날 부터, 모든 곳에서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 나를 감싸 안은채 우시기만 했다. 복도에 몰려 이야기를 나누던 하녀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시체는 빠른 시일 내에 집으로 보내졌다. 그날 어렸던 나와 디오는 서로를 의지한채 울며 잠들었다.

그 뒤로 어떻게 삼촌이 우리 집안의 재산과 명예를 독차지하고 엄마와 우리 남매를 변두리로 내쫓았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내내 기력이 쇠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이 기억 날 뿐이었다, 그 날부터 나는 이 세상에 던져졌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꼬마들을 4명씩이나 한꺼번에 받아주는 고아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4남매를 먹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처음엔 빨래를 했다. 그 다음엔 바느질을 배워 옷감을 짜고, 아이를 돌보았다. 돈 한푼 없는 어린 여자애에게 귀족의 성씨만큼 쓸모없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린 날에 어깨너머로 구경하던 하녀들의 일을 그대로 따라했다. 디오가 마법사 벨트릭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 한 뒤론 수업료를 마련하기 위해 돈이 되는 마법약재 밀매를 시작했다. 북극도롱뇽 꼬리나 펑나무의 열매같은건 수입이 별로였지만 흑인어의 비녀처럼 위험한 약재는 꽤 돈이 됐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다. 이리 살다보면 우리 디오가 훌륭한 마법사가 되고, 어린 동생들도 장성해서 결국엔 행복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는데...

머릿속으로 집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스쳤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 처럼,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집 문을 열고 들어와 다짜고짜 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끌었다. 디오는 우물로 물을 길르러 나가고 없었기에 나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끌려나가 철창에 갇혔다. 울며 따라나오는 동생들에게 곧 돌아올거라고, 디오가 올 때 까지 집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을 했고. 그다음엔... 이렇게 됐지.

어디서 부터 잘못됐을까. ㅇㅇ는 천천히 정보가 셀 만한 인물들을 머릿속으로 더듬어보다가,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와서 알아서 무엇하랴, 이미 나는 잡혀버렸는데. 운도 더럽게 없지.

"아직까지 마왕을 본 사람이 있나?"

"무시무시하게 생겼데."

"인간은 보이는 족족 죽인다나봐."

"인육을 즐긴다고 하더군. 특히 어린아이의..."

ㅇㅇ는 쇠창살 사이로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슬쩍 거리를 쳐다봤다. 대낮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서서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왕의 성인식이 가까워 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왕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날에 성인식을 치르고 진정한 마왕으로 군림한다. 마왕이 성인이 되든 말든 사실 인간들에겐 크게 상관이 없다. 다만 이 일이 크게 화재가 되는 건 제물 때문이었다. 바실제국이 서 있는 이 땅은 원래 일만년 전까지만 해도 마족들의 땅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려 했던 인간들은 마계에 양해를 구하고 그 땅을 빌리기로 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새로운 마왕이 성인식을 맞을 때 마다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며 왕족이나 귀족자제를 제물로 바쳐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팔백년만에 새로 등장한 마왕에게 제물을 바쳐야만 할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 제물이 누가 될 것이냐 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주님이 그리 아름다우시진 않으시잖아? 제물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딸을 순순히 내놓겠어? 마왕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생겼는지 들었잖아?"

"마왕은 눈이 다섯개라서, 제물이 허튼생각이라도 하면 끔찍한 벌을 내릴거래."

ㅇㅇ는 다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밖에서 저렇게 마왕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는 사람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마법약재 수출입은 제국이 국고를 채우는 주요 수단이기 때문에 밀무역은 중대한 범죄였다. 살아서 집에 돌아가더라도 이 몸이 성할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도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를 걸어다니던 때가 있었지. 어릴적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녀 림의 손을 잡고 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때도 꼭 이랬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대며...

순간, ㅇㅇ는 이상한 기시감에 번뜬 눈을떴다. 익숙한 이 기분, 이 냄새. 단순히 분위기 때문이 아니다. 여긴, 여기는... ㅇㅇ은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풍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자란 대저택이 눈 앞에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삼촌. ㅇㅇ은 애꿎은 치마자락을 꽉 쥐었다.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이고 어머니를 죽게한 살인마에 가까웠다.

"군사들 때문에 놀랐겠지. 요즘엔 귀족들이 사병을 들일 수가 없어서... 과격했다면 사과하마. 고의는 아니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죠?"

삼촌의 입에 조소가 스쳤다.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음미하더니 우아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너는 어릴 적 부터 영특했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고, 어려운 설명도 척척 알아듣곤 했어."

"말 돌리실 거면 절 이만 보내주시..."

"그러니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도 잘 이해하겠지."

순간 삼촌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ㅇㅇ는 치마자락을 더 꽉 쥐었다. 찰나의 순간이 몇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왕의 제물, 내가 나의 조카딸을 보내달라 폐하께 청했다."

"......!!!"

"나는 너가 뭘 원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자, 잠시만 나는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동생들을 제대로 키우고 싶지 않아?"

순간 목에 뭔가가 걸린 것 처럼 말문이 막혔다. 동생들, 그 존재가 대화에 나타난 순간 나의 미래가 숙명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벨트릭에게 마법을 배우는 나의 동생은 내 능력으론 한없이 아까운 존재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가 제물로 간다면 네 동생들의 양육은 내가 보장하지. 금전적으로 모든 부분을 지원할 생각이야. 그 다 무너져 간다는 집도 좀 옮기고. 응?"

"......모든부분을, 말이죠."

"그래. 만약 너가 마계로 가는 순간까지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는다면 말이야."

체념같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샜다. 곧 돌아오겠다고 동생들에게 했던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할 것을 예감한 후회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발그레한 두 뺨에 키스를 해주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건데. 순수한 아이들은 매일 저를 손꼽아 기다리겠지.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어차피 부정의 대답같은건 선택지에 없었다.

마계로 가는 당일의 아침엔 아침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인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일어나자마자 욕조로 쳐박혔기 때문이었다. 저 하나를 씻기자고 수많은 하녀들이 달려들고 난 후엔 엄청나게 무겁고 휘황찬란해보이는 짙은 자색드레스를 입어야했다. 난 차라리 커튼을 뒤집어쓰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온몸에 보석을 주렁주렁 메달고 난 뒤엔 한 하녀가 대뜸 검은 천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가렸다. 딱히 도망갈 생각도 없었지만 하녀들은 그런 내 의중은 생각지도 않은채 손발까지 포박해버렸다.

집 안에 갇힌채 죽은 듯이 잠만 잤던 일주일이었다. 꿈을 꾸면 끊임없이 어린 시절의 추억과 부모님이 등장했다. 도저히 깨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던져지는 세상은 눈이 다섯개 달렸고 무시무시하며 어린아이의 인육을 즐기는 마왕이었다. 간혹 사람과 괴물이 반쯤 섞인 듯한 마왕이 꿈에 나와 쫓아오기라도 하면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저는 물론이고 동생들의 안전까지 위험해질게 뻔했다.

애벌래같은 자세로 어디론가 들려가기 시작했을 땐 ㅇㅇ는 정말로 정신을 놔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집 밖을 나섰는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동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좋아, 꽃다운 나이에......"

"이 가문에 조카딸이 있었어?"

"아이고오- 불쌍해라."

예전에, 마왕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었나.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이제는 정정해야겠다. 나를 불쌍해하는 저 사람들이 미치도록 부럽다고.

"디오! 너 자꾸 그러면 마왕이 화악-! 잡아간다?"

분명 혼나는 것은 디오인데 저도 모르게 움츠리는 ㅇㅇ이었다. 엄마가 손톱을 세우며 마왕 흉내를 내면 어렸을 땐 와앙-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컸으니까, 아버지의 트로피를 깨뜨리는 것 처럼 큰 잘못을 한게 아니라면 마왕은 절대 나타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죄송해요오..."

저렇게 디오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더더욱 마왕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콩닥콩닥 뛰던 가슴이 조금 진정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