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렇게 그 아이를 오래 좋아할 생각도
이많큼 많이 사랑할 계획도 없었다.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하고 한번도 남자란 동물을 이성으로 생각해 본적 없던 나는
그냥 나를 여자로 대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얼떨결에 받아버린 고백에 신나는 마음에 단숨에 사귀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가 사귄다는 건 나에게 그저 드라마속 일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도 몰랐고 소위 밀당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쵸코우유를 건넨다면 다음날 나는 곰인형과 비누를 선물했고
그 아이가 나에게 몇천원짜리 반지를 내민다면 다음날 내 용돈을 탈탈 털어 목도리를 선물했다.
그래도 간간히 수업시간에 뒤를돌아보며 나를 쳐다보고있는 그아이 눈빛이 느껴지는게 너무 행복했고
내가 속상해있을때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내볼을 꼬집으며 힘내라고 하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아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혼자 부끄러워 얼굴도 빨개졌었다.
내 눈은 분명 책상위를 향해 있는데 그아이가 어디있는지 다 알수있었다.
그렇게 100일이 되었다.
독서실에서 저녁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그 아이의 나오라는 문자를 받고 후다닥 튀어나갔다.
가운데 자전거를 두고 나에게 어깨를 어색하게 두른 상태로 한참을 산책하다가
주차장 한구석으로 날 밀어내곤 입을 맞췄다.
운동을 하다 왔는지 땀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너무 가슴떨리고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생 처음으로 남자와 입을 맞췄다는 생각에
나도모르게 웃음이 피식 피식 나왔다.
그후로도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밤을 새워가면서 통화도 하고 문자로 야한얘기를 하다 다음날 아침에 했던 문자내용을 바쁘게 지우기도했고..
난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의 즐거움에 빠지고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아이는 점점 나한테 멀어졌다.
나에게 못만난다는 변명이 많아졌고 차츰 문자도 전화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자존심이란게 뭔지 그아이가 나에게서 멀리 떠나서 나만 덩그러니 남기 싫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
헤어지잔 내말에 붙잡는 말 하나 없이 그 아이는 '응' 이라 했다.
너무 밉고 원망스러워서 인사도 안하고 오는 문자에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2년후.
동창회에서 만난 그 아이는 그 사이 키가 많이 컸다.
어른이 다되어서 숏컷을 한 모습은 완연한 어른의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좀 눈물이 날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이뻐질껄 좀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날껄 후회도 했다.
헤어지면서 달라진 연락처를 주고 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차마 그아이에게 내 전화번호를 아무렇지 않게 알려줄수가 없었다.
그까짓 자존심때문에
그렇게 또 5년이 흘렀다.
이젠 사회생활을 시작할 우리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그 이후로 나가지 않는 동창회는 간간히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소문을 들으니
그 아이는 공부를 지지리 못하더니 고등학교때 정신을 차렸는지
결국 좋은대학교에 입학해서 자기가 원하는 과에서 적지않은 장학금을 챙기며
한 유명한 학원의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몇주전 또 동창회에 오겠냐는 동창생의 형식적인 문자가왔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못간단 말을 전하고 컴퓨터를 열었다.
옛날 미니홈피 비공개함에 저장되어있는 그아이와의 사진.
그 당시의 그 아이의 송충이 같은 눈썹을 보며 웃음이 난다.
걘 아직 나를 기억이라도 할까?
분명 다른 여자아이와 연애를 하면서 나 같은건 애초에 잊어버렸겠지..
나도 내가 참 한심하다.
이제 이게 괜한 집착이 아닐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아이가 찍힌 동창회사진을 보면 숨이 살짝 막히는 기분이다.
평소엔 잊고 살다가도 누군가가 나한테 다가온다면
나도모르게 그 아이와 비교하게 된다.
진짜 또 다른 사람을 찾으면 그 아이를 완전히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늘이 동창회날이라는데
갈까말까 수천번 갈등하며 손톱을 물어뜯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