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경] Eternal days
제 4 화
맥 作
누가 제 머리카락 몇 가닥을 붙잡고 살짝 당기다가 놓고, 다시 당기다가 말고를 반복하며 장난치고 있었다. 아씨. 경이는 살짝 짜증을 내며 머리 위로 손을 휘젓고 저를 귀찮게 하는 손을 쳐냈다. 우지호가 또 제 머리카락이 신기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계속 자려고 하는 저를 자지 못하게 괴롭히려는 개수작이 분명했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자세였고 무엇보다 평소라면 다시 끈질기게 머리카락을 다시 붙잡아 올 우지호의 손길이 없었다. 뭐지? 경이는 X자로 교차시킨 팔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뒷목이 쎄 - 하게 아파왔다.
“잘 잤어요? 너무 오래 자길래.”
낯선 얼굴의 남자가 저를 향해 인사를 했다. 남자는 환자복을 입고 팔에 붕대를 하고 있었으며 저는 그 남자의 병원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헉, 소리를 내려다가 뒤늦게 어제 저녁에 겪었던 사고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 경이는 입을 벌린 그대로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둥글게 말고 있던 허리를 얼른 곧게 펴고 경이는 남자의 팔 상태를 살폈다. 붕대가 감긴 팔은 다행히도 괜찮아 보여서 벌렁벌렁 거리는 심장이 급속도로 가라앉을 수 있었다. 에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경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팔은 괜찮아요?”
“네, 다행히도 신경은 안 다치고 유리조각도 안 박혔대요.”
“아, 진짜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에이, 아니던데. 잠만 잘 자던데?”
남자의 말에 경이는 너무 찔린 나머지 손사래를 치며 강한 부정을 했지만 남자는 괜찮다며 웃는 낯으로 경이를 위로했다. 왠지 그게 저를 놀리는 것 같아 경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남자가 웃었다.
“지금 삐친 척하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저 놀리시는 거 보니깐 멀쩡하나 보네요.”
“아닌데, 아직도 많이 아파요. 팔을 못 움직이겠어.”
“와인 병 박혔는데 당연하죠, 그 건. 아 정말 어제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 정도만 다친 것도 감사한 줄 아세요. 내가 그 아저씨 옆으로 밀지만 않았어도 이미 당신의 배는……근데 이름이 뭐에요?”
“이민혁이에요. 박경 씨 맞죠?”
“어? 어떻게?”
“보호자 이름에 적혀져 있는 거 봤어요.”
“아,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제 이름 불렀는데……헐,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전화했어요?”
“슬프게도 없네요.”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민혁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는데 정말 잘생겼다. 길가다 마주치면 여자들이 한 번씩 눈길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왜 여자 친구가 없지? 이해할 수가 없네. 경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구부리고 자느라 뻐근해진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허리를 돌리며 쭉 살펴본 4인실 입원실에는 젊은 여자와 아주머니,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한 명, 그리고 민혁이가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자주 본다는 티비도 꺼져있고 다들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경이는 다시 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요?”
“그냥 다 붕대 풀 때까지 입원하고 있으라고 그러던데요? 아, 근데 나이가 어떻게 돼요, 박경 씨는?”
“저 25살이요.”
“아, 저는 28살이에요. 형이니깐 말 놓을게요?”
“헐, 진짜 28살? 진짜로? 완전 동안이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안 그래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근데 존댓말 하다가 갑자기 반말하니깐……어색해요.”
“나는 반말이 더 편한데 경이 너는 그럼 존댓말 쓰던지.”
“민혁 씨가……아니, 형이 저한테 반말 쓰는 것도 어색해요.”
“익숙해지도록. 냉장고에 저기 아주머니가 넣어 놓은 오렌지 주스, 먹어도 된다 하시던데 가서 두 개만 들고 와요. 아, 경이 씨가 존댓말 쓰니깐 나도 갑자기 존댓말 나오네.”
“뭐에요, 그 이상한 말투는.”
경이의 으하하, 거리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렸다. 민혁은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경이가 들고 오는 오렌지 주스를 재빨리 받아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웃음의 여운이 남았는지 경이는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그만 웃어요.”
“괜찮아요. 여자들은 반말하고 존댓말 섞어 쓰면 설렌다고 좋아하던데요, 뭘.”
“진짜요? 그럼 자주 이래야지. 근데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누나가 알려줬거든요. 옛날에 드라마에서 어떤 연예인이 민혁 씨처럼 반말하고 존댓말 섞어 썼는데 설레서 죽을 것 같다면서 집안을 난리 치고 다녔죠.”
“연락처 좀 줄래요? 박경 씨랑 닮은 누님이면 미인이겠네.”
“아닌데, 못생겼어요. 근데 민혁 씨 반말하고 존댓말 계속 섞어 쓰는 거 알아요? 저는 남자라서 그런지 되게 웃기네요.”
듣는 대로 말하게 되는 게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비슷한 거라 민혁은 경이와 다르게 반말을 쓰겠다고 해놓고 경이가 계속 존댓말을 쓰자 저도 모르게 입이 귀를 따라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경이는 그런 민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듯했다. 민혁은 미간을 작게 좁혔다.
“아……이게 다 박경 씨 때문이야.”
“왜 제 탓이에요? 민혁 씨가 더 편한 반말 하시라니까요? 저는 존댓말 쓸 테니까.”
“나 입원하는 내내 반말 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친해진 것 같은데 얼른 반말 쓰면 안 돼요?”
“그렇게 원한다면……알았어요, 형.”
어색한 것도 있거니와 요상한 민혁의 말투, 그리고 그 말투 때문에 당황하는 민혁의 모습은 꽤나 재밌는 눈요깃거리였는데 아쉽다. 경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말고 오렌지 주스의 뚜껑을 따 마셨다. 민혁이 그런 경이를 빤히 바라봤고 경이는 그 뜨거운 시선에 민혁과 눈을 마주치고 병뚜껑에서 입술을 뗏다.
“사실 경이 너 자고 있을 때 걱정을 좀 했거든. 나처럼 말 수 없거나 차가운 놈이면 입원하는 내내 얼마나 재미없을까, 싶었지.”
“에? 아닌데. 민혁 씨……아니 형 다정하고 말도 많은데?”
“너한테만 그러는 거야. 너한테만.”
“음……생각해보니 나도 형이 이런 성격이어서 다행인 것 같아.”
“응?”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한데. 막 나한테 치료비 물어내라고 하고 내 멱살 잡고 때렸으면 어떡해.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러니까 너도 영광인지 알라고.”
“내가 형, 이 팔 다 나을 때까지 확실히 책임질게. 걱정 마!”
“당연하지. 그럼 환자인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고 했어? 여자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놈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 형 조금 이상한 거 같아.”
경이의 웃음이 또 한 번 다시 터져 나왔다.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는 민혁의 소리에 경이는 더 크게 웃었다. 만남의 과정이 많이 색다르고 험난했을 뿐, 좋은 사람과 연인을 맺게 된 것 같아 경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원체 사람을 좋아하는 경이라서 그랬다.
“너도 만만치 않게 이상해. 너 편의점에서 나보고 죽지 말라면서 울먹인 거 기억나? 내가 그때 힘이 없어서 못 웃었지 진짜 웃겼거든?”
“아 나는 진지했다고요. 그리고 진짜 형 잘못하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었어요!”
“의사선생님이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이번엔 경이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민혁이 웃기 시작했다. 생각이 곧바로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인가, 이런 건 보통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들의 특징인데.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이라니, 민혁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경이가 미간을 더 깊게 좁히며 그만 웃으라고 툴툴댔다.
그리고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병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병원 음식이 담긴 식판을 내려놓고 가셨다. 경이는 얼른 병원 침대에 붙어있는 접이식 식탁을 밖으로 꺼냈다. 식판을 조심스럽게 들고 오는데 맛있는 냄새가 경이의 코끝을 찔렀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먹은 게 없어 아무리 맛없다고 하는 병원 음식이라고는 하지만 위를 요동치게 하기는 충분했다. 식탁 위에 올려두고 경이는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도 왼손 다쳐서 밥 먹여달라고는 안 할게.”
“으웩, 상상했는데 끔찍하다.”
“근데 넌 밥 안 먹어도 돼?”
“안 그래도 배고파 죽을 거 같아.”
경이는 제 배를 부여잡고 오만상을 다 썼고 그 모습을 본 민혁은 경이가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귀엽다고 중얼거리고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을 펐다. 경이는 차마 옹졸하게 환자의 밥을 뺏어 먹을 수가 없어서 그저 맛있게 먹고 있는 민혁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민혁은 계속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밥알들과 당면으로 막았다.
“아, 진짜 배고파요 형…….”
“그래.”
“나 돈도 없는데…….”
경이는 주머니를 더듬어보며 혹시나 기적이란 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지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주머니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예상대로 텅 빈 주머니가 경이를 반겼다. 경이의 손을 보며 진짜 작다고 생각한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벗어둔 정장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밑에서 뭐 좀 사 먹고 오라고 하려 했지만 경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민혁은 입을 열다 말고 다물었다.
“헐!!”
“왜, 뭔 일이야.”
“내 핸드폰!”
어쩐지 주머니가 너무 가볍다 했다. 경이는 다시 한 번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리다가 제가 앉아있던 플라스틱 의자 주변, 병원 침대 밑까지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저의 애물단지 검은색 스마트 폰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거 비싼 건데! 경이는 제 머리카락 한 움큼을 쥐어 잡았다. 울상이 저절로 지어졌다.
“핸드폰 잊어버렸어?”
“어, 안 보여! 어디 있지, 그거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잘 찾아봐, 아니면 내가 전화 걸어줄까?”
“어, 전화 걸 - .”
전화. 그 단어에 경이는 누가 뒤통수를 치고 간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제서야 지금껏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던 우지호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연락도 안 됐고 심지어 외박까지 했다. 난 이제 죽었다. 경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경아 전화번호 좀 불러봐.”
민혁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경이는 손을 덜덜 떨며 이제 제 앞에 펼쳐질 지옥을 상상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민혁이 붙잡을 틈 없이 냅다 병실을 뛰쳐나가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빨리 찾아가서 우지호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난 진짜 죽었다, 이제.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
혹시나 해서 녹음실에 먼저 들렸지만 거기에 제가 찾던 우지호는 없고 형들의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만이 경이를 반겼다. 경아 너 어디에 있었어?!, 형들이 제 어깨를 잡아오며 도대체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데 경이는 이미 우지호가 여기 녹음실에서 난리 쳤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망했다. 어제 우지호 어땠냐고 물어보니 건들면 죽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는 승호 형의 말에 경이는 정말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울컥함을 간신히 억누르고 제발 우지호에게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과 함께 다음에 차차 말해준다고 하며 형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집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달리기에 젬병인 제 다리가 미운 한 편,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704호, 라고 적혀진 현관문을 보고 경이는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들어선 경이는 조용한 거실에 제 숨통이 바싹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아, 인제 어쩌지. 우지호는 또 어디 간 거야. 경이가 울상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TV 앞에 섰을 때, 끼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주 무섭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우지호가 갑작스럽게 거실로 나왔다. 경이는 제 심장이 발끝까지 툭 떨어지는 느낌에 그 흔한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우지호는 경이를 보고 옆으로 째진 눈을 놀랬다는 듯이 크게 떴고 경이는 여전히 목석마냥 굳어져 있었으나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숨 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점차 정신이 들고 화가 나기 시작했는지 지호의 얼굴색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경이는 얼른 어떻게 하면 우지호한테 덜 죽음을 당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했다.
“지호야, 그게, 그 - .”
“야!!”
지호가 화난 발걸음으로 경이에게 무섭게 다가왔고 경이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지호에게 손을 싹싹 밀었다. 도저히 우지호의 염라대왕 빙의한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서 경이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 감았다.
“아니, 지호야. 내가 진짜 잘못했어. 어제 갑자기 취객이 편의점에 들어와서 난동 피우는 바람에 손님이 다쳐서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어. 나는 멀쩡해. 지호야 내가 백 번 잘못했어, 응? 나도 핸드폰 사라진 지 이제 알았단 말이야. 으헝, 지호야아…….”
“일어나.”
서슬 퍼런 지호의 차가운 목소리에 경이는 제 목이 댕강 잘리는 상상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막 나 때리는 거 아니야? 그럼 바로 4년 동안 애인이고 뭐고 다 버리고 헤어질 거야. 아냐, 좀 맞아줘야 하나? 경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의 판정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착각이 들었다.
“다친 데는 없다고?”
“어? 어어.”
지호가 저를 꼭 껴안아왔다. 느껴지는 지호의 온기에 경이는 순간 긴장이 풀려 지호에게 힘 빠진 몸을 의지하고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는 지호의 말에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헝, 지호야. 뒤늦게 참고 참았던 놀랬던 마음과 지호에게 미안함이 한 번에 저에게 밀려오는 기분에 경이는 코끝이 알싸해져 얼굴을 찡그렸다. 지호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촉촉해진 목소리로 지호에게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머리채가 잡혔다.
“너 진짜 죽을래? 연락 안 돼서 얼마나 걱정한 지 알아? 연락 끊겼던 네 친구들 번호까지 내가 싹 다 알아내서 연락하고, 녹음실도 한 번 뒤엎고 왔어. 근데 이제야 집에 들어와? 어떻게 너 나를 잊을 수가 있냐? 어디 편의점에서 알바하는지도 안 알려준 주제에, 아오……. 진짜 빡친다.”
“으악! 지호야, 아퍼! 머리 누르지 마!”
“뭘 잘했다고, 지금 아프다고 그래! 너 진짜 나같은 애인 만난 거 하늘에 감사해야 해. 다른 놈이면 너 반쯤 죽여 놓고도 남았어. 진짜 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모르겠지. 모르니까 지금 나를 찾아왔지, 응? 너 때문에 내가 잠도 한숨 못 자고. 아주 고맙다, 고마워.”
“아악! 아파!!”
머리칼을 쥔 그 상태에서 제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밑으로 누르는 지호의 손아귀 힘에 경이는 제 머리통이 손과 지호의 어깨 사이에서 눌려져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지호가 머리칼을 쥔 손에 힘도 더 주어 머리칼이 뽑히는 것과 비등한 아픔을 받았다. 벗어나려 했더니 허리를 잡은 반대편 손에도 힘을 꽉 준다. 살려달라고 경이가 외쳤으나 지호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진짜 맘 같아서 너 아그작 아그작 다 씹어먹어 버리고 싶다. 엉? 내가 너 때문에 십 년이나 늙어요, 십 년이. 경아. 에휴……진짜 한 대만 맞을래?”
“안 돼! 아, 지호야 손 좀 치워봐. 진짜 아프다고, 으헝.”
“징징대지 마. 아직도 화가 안 풀려. 너 이제 외박 금지야. 알바고 뭐고 다 때려치워.”
“어? 안 되는데? 나 그 손님 간호 - .”
“죽고 싶냐? 당장 알겠다고 해라.”
“헉, 야 나 숨 막혀!”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 온 힘을 주고 제 허리를 압박하는 지호에 경이는 순간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별을 보았다. 숨이 안 쉬어져 컥컥 댔지만 지호는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인지 계속 힘을 더 줬으면 줬지 손을 풀지 않았다. 경이는 계속 파닥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외박 안 하겠다고?”
“알겠어, 알겠다고!!”
“진짜?”
“으악, 아퍼! 빨리!”
그제야 지호는 손을 풀었고 경이는 핑핑 도는 시야에 잠시 휘청거리다가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지호가 옷도 갈아입고 씻고 오라며 경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쳤는데 짝, 하고 찰진 소리가 크게 났다. 악! 왜 때려!! 경이가 성질을 내며 쓰라린 엉덩이를 부여잡고 방방 뛰었으나 지호는 죄인은 말이 없는 법, 이라고 하며 얼른 옷이나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진짜 세게 때렸네. ……그래도 이 정도에 끝난 게 어딘가. 집에서 쫓겨날 각오도 잠깐 했다. 그런데 민혁이형 어떡하지……. 번호도 모르고 이제는 우지호가 현관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을 텐데. 아, 각박한 내 인생이여. 경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고단한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