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신궁 아닌데요
四
급작스럽게 시작된 경기에 신이 난 건 오후 훈련이 일시 보류된 사수들이었다. 지민과 여주를 중재하는 데 오전을 허비한 윤기는 한가득 쌓인 업무를 보기 위해 결국 한영을 불러 심판을 보게 했다.
지민과 여주에게는 각각 열다섯 발의 대나무 화살이 주어졌다. 양궁에서도 대나무 화살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실내경기에 대나무를 쓰기도 했고 초보들도 종종 대나무 화살을 썼지만 여주는 주로 알루미늄 화살을 썼다. 양궁 화살을 쓸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여주가 가져온 화살은 단 하나뿐이었고 촉이 국궁 과녁에 맞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이곳 화살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선 둘을 요괴들이 둘러쌌다. 수련장의 중앙이자 지민과 여주 사이에선 한영이 시작 신호를 보내자 어수선하게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흐른다.
화살을 끼운 지민이 길게 시위를 당긴다. 시위를 놓을 때까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과녁을 노려본다. 꽂히는 화살들이 매서웠다.
거침없이 날아간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경쟁하듯 몰려 있었다. 여주의 과녁판 역시 중앙 근처에 꽂히는 화살이 하나하나 늘어났다. 어느덧 남은 화살은 열 발이 채 되지 않았다.
둘의 실력이 비등비등하자 관중들 사이에서는 은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요지는 저 괘씸한 인간이 이기는 꼴은 못 본다는 것이었다. 지민은 부대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사수였다. 만에 하나 지민이 여주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어리석은 요괴들이 삼삼오오 모여 흉계를 꾸몄다.
뱀 인간이 화살깃 근처에 송곳니에서 나온 독을 묻히자 여우 묘현이 기척을 죽이고 여주에게 접근했다. 경기에 몰두해 있던 둘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간 묘현이 화살을 몰래 바꾼다. 한영은 이를 뒤에서 뻔히 보고 있었지만 못 본 척 딴청을 부렸다. 한영 역시 분수도 모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인간이 마땅찮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여주가 차분히 화살을 하나 더 꺼냈다. 일단 빡 돌아서 내던지긴 했지만 시합 초반에는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다 보니 어색하고 불편한데 지민이 생각 외로 화살을 잘 쏘기까지 했다. 처음에 페이스를 잃고 조금 바깥쪽에서 돌긴 했지만 이제 제법 지민과 비슷한 정도, 아니 슬슬 추월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명중률이 나아졌다.
활시위에 화살을 끼우려던 여주가 검지에 스친 날카로운 무언가에 놀라 화살을 놓쳤다. 내가 촉 부분을 잡은 건가? 떨어진 화살을 다시 주우려던 여주가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땅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곧바로 알아차린 건 지민이었다. 무능한 줄 알았더니 제법 하는 것 같아 알게 모르게 은근히 시선을 주고 있었다. 흐트러진 공기에 지민이 흘긋 곁눈질해보니 크게 휘청인 여주가 탁자를 잡고 겨우 균형을 지키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허우적거리는 손끝에 치인 화살통이 엎어지자 여우 묘현이 넣었던 화살이 쏟아진다. 고요하던 지민의 얼굴에 파문이 인다. 화살의 나무 부분이 독에 물들어 살짝 검게 변해있었다. 작전에 성공한 뱀 인간의 무리가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저기구나. 몸을 튼 지민이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뱀 인간의 머리 바로 위로 화살이 꽂힌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화살에 뱀 인간은 오금이 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둥에 꽂힌 화살의 반동으로 화살깃이 흔들렸다. 지민이 활시위를 놓고도 변함없는 자세로 서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저 아이와 나의 경기다.”
지민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건 독에 취해있던 여주였다.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번쩍 들었다. 여전히 몸이 무겁긴 했지만 머리는 바쁘게 돌았다. 요괴들은 보통 동료에게 저렇게 화살을 막 쏘는 건가. 사람을 향해선 활조차 들지 않는 게 여주가 배운 수칙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지민은 개의치 않고 화살을 겨눴고, 실제로 쏘았다. 인간의 도덕이나 율법을 요괴에게 들먹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자연스레 드는 위화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주가 이태까지 있었던 곳은 그랬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주제넘긴. 싸늘한 지민에 뱀 인간이 일단 고개를 수그렸지만 한편으론 억울했다. 저 혼자 벌인 일이 아니었고 그리 심한 독도 아니었다. 사실상 요괴에게는 거의 무해하다고 해도 될 약한 독이었다. 정말 제가 마음먹고 독을 묻혔다면 저 인간은 이미 살아 있는 몸이 아니다. 지민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제가 졌습니다.”
한영을 향해 통보하듯 짧게 말한 지민이 활을 내려놨다. 추잡한 것도 정도 것이지. 오만방자한 인간을 눌러주려고 했지만 한번 그르친 경기에는 더는 흥미가 솟지 않았다. 저런 상태에서는 더 경기를 진행하는 것도 무리였고, 이긴다 한들 찝찝하기만 할 게 뻔했다. 그리고 솔직히... 잘 쏘긴 했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여주를 내버려 두고 떠나려던 지민을 한영이 막아선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지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쪽이 제정신이 아닌데 어찌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한영은 지민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계급으로만 따지면 지민과 같은 품계였지만 나이는 한영이 까마득하게 많다. 귀계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지민에 관해선 한영은 나이에 집착했다. 나는 박지민보다 상전이다. 그 멍청한 믿음은 한영이 아집을 부리게 했다. 저 새끼가 다른 애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나한테 쪽을 줘?
"주어진 화살을 다 쏘아야 끝난다는 게 규칙이다."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 유명무실한 수련장이 옛 규칙을 들먹이자 지민이 혀를 쯧하고 찼다.
망설임 없이 남은 것을 모두 꺼낸 지민이 화살들을 두 동강을 냈다. 우지끈 부러진 화살들이 한영의 발 앞에 우수수 떨어진다.
"이제 끝났네요."
고고하게 고개를 쳐든 지민의 시야에 눈에 핏발이 선 한영이 들어왔다.
***
조용히 시합하라고 했더니.
닫힌 창문을 비집고 새어 들어오는 소란에 참다못한 윤기가 한소리 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지민이 유유히 떠난 뒤의 수련장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는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던 윤기가 뒤늦게 여주를 발견하고 눈을 홉떴다. 그대로 창문을 넘어가더니 곧바로 땅에 발을 디뎠다. 가까이서 보니 안색이 더 심각하다. 하얗다 못해 파랗기까지 한 게 당장 쓰러진다 해도 당연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괜찮게 생겼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 웅웅 맴돌았다. 혀가 굳어 움직이지를 않는다. 입술만 뻐끔거리는 여주에 윤기가 이마를 움찔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할 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아이고. 대충 둘러 보니 짐작이 간다. 여즉 벌벌 떨고 있는 뱀 인간과 독이 서서히 대나무에까지 스며들어 검게 변한 화살. 무슨 더러운 뒷수작을 부렸던 게지.
의원을 불러오라 아랫것에게 시킬까 했지만 의원의 걸음으로 오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윤기가 여주의 등과 허벅지 아래를 잡아챘다. 얼떨결에 여주는 안긴 자세가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 밀어내려고 했지만, 두 손은 윤기의 어깨 근처도 가지 못하고 힘없이 미끄러졌다.
"꽉 잡으십시오."
별 생각 없이 말한 윤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잡을 힘이 있을 리가. 여주가 윤기를 꽉 잡는 대신 윤기가 여주를 단단히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의원이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아파서 그런 건지 아까는 온몸에 열이 나서 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추위에 뼈가 시렸다. 이 와중에 감각은 또 점점 둔해진다. 앓는 소리를 낼 겨를조차 없었다. 윤기는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수시로 여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살짝 내려다보는 눈가에 근심이 어렸다. 이 연약하고 하찮은 인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석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의료원에 도착한 윤기가 앞뒤 볼 것 없이 발로 문을 뻥 차고 열었다. 장지문이었으니 사실 문이 부서졌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라진의 붕대를 새로 감아준 뒤 약과를 나눠먹던 남준이 문이 날아가는 걸 보고 아연실색을 했다. 활부대의 민윤기라면 남준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개차반이 따로 없군. 가까이 다가가던 남준이 윤기에게 안겨 밭은 숨을 내뱉는 여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오시죠."
침대에 여주를 조심스레 눕힌 윤기가 남준에게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 뱀의 독에 감염됐고 시간이 좀 지났다고. 고개를 끄덕인 남준이 꼼꼼하게 여주를 살폈다. 오른손 끝이 검게 물든 거로 보아 손에서 감염이 시작된 거로 보이고, 아직 왼손은 멀쩡하니 많이 퍼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독에 면역이 워낙 없는 몸이라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바로 병실 뒤쪽에 있는 약재실로 달려간 남준이 망설임 없이 서랍을 열어 필요한 약초들을 꺼냈다.
본격적인 해독약을 만들기 전 일단 독이 퍼지는 걸 일시적으로 막아줄 약초를 짓이겨 동그랗게 만든 뒤 윤기에게 건넸다.
"세 알 모두 먹여야 합니다."
환을 건네받은 윤기가 여주의 침대맡에 섰다. 여전히 여주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먹이지. 잠깐 고민하던 윤기가 몸을 숙이고 여주의 입술 사이로 환을 집어넣었다. 영 삼키지 못해 상체를 살짝 일으키고 물을 머금고 넘기게 하니 환 하나를 꼴깍 삼켰다. 빠르고 차분하게 나머지 두 알도 먹인 윤기가 조심스럽게 여주를 눕혔다.
달여온 해독약을 먹이자 겨우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처음엔 미동도 없길래 혼수 상태가 된 건가 심각해진 윤기에 남준은 잠이 든 것뿐이라고 알려줬다.
"일단 해독은 했습니다. 다만 독의 여운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라 앞으로 몇 시진은 깨어나시진 못할 겁니다."
한숨 돌린 윤기가 이마를 짚었다. 흥건하게 묻어나오는 땀에 질색하면서 털어냈다. 남준이 너저분한 주변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인제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일어나시면 아이를 보내 알려드리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알겠다고 하려던 윤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됐습니다. 따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다는 걸 확인했으니 제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제대로 부하들을 살피지 못한 책이 있긴 하지만…. 다음에 수련장에 나오면 그때 아는 체하면 되겠지. 남준을 향해 인사를 한 윤기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윤기가 나가자 남준이 윤기가 미리 고쳐뒀던 문을 닫았다. 의료원 안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남준이 기척을 죽이고 여주에게 살그머니 다가갔다. 여주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인세에서 넘어왔다는 인간. 왕이 궐에서 머무는 걸 허락해줬다지.
어쩌다 간특한 이들로 바글거리는 귀계에 오게 된 걸까. 이곳에서 여주의 존재는 많은 파란을 가져올 게 분명했다.
기회가 되겠구나.
남준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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