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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었다. 시작이 좋으려나 했지만 끝은 아슬하게, 무너지기 직전의 비틀거림으로 마무리 되는 날.
과외 알바를 생각 중이라는 나의 말에 내 동기는 자신의 동생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 우리 과 선배 동생이기도 해. ' 라고 덧붙인 동기의 말을 듣고 한 번 더 고민을 하는 여유 따위는 그 때 당시엔 없었기에. 오히려 더 좋지! 하고 웃어넘기며 호기롭게 첫 과외 학생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동기가 말한 우리 과 선배였다. 하지만 얼굴을 확인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 어, 여주가 과외선생이었구나! "
" ...아.. 안녕하세요. "
" 들어와, 들어와! 야하하- 대박. "
교수님 면담이 끝나고 휴게실에서 만났던 복학생 선배였다. 들어오라는 선배의 말에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둘러댈까 하는 상상도 했었다. 그 때엔 멍청한 생각이라 치부했었다. 곧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고 선배의 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단발머리가 귀여운 여자애였다. 선배는 조금은 민망한 반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있었지만 내가 들어오자마자 허겁지겁 옷을 주워입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나는 괜찮다며 다급히 동생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문이 열리고 먹던 과자와 함께 쟁반에 어수룩하게 무언갈 준비해온 선배가 따라왔다. 동생은 선배에 비해 정말 조용했다. 간이 책상을 펴서 그 위에 필통과 종이, 교과서를 올려두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동생을 한 번, 선배를 한 번 보았다.
" 감사해요 선배님 잘 먹을게요. "
" 응응. 뭐 필요하면 말하고! 나도 여기있을게. "
" 오빠가 왜? "
" 그냥 첫 날인데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하지 않겠어? "
" 하.. 뭐래. "
" 여주야. 나도 여기 있어도 되지? 그냥 오빠로서 잘 하나 보고 싶은데. "
" ...그럼 잠깐만 앉아계시다가.. "
" 그래그래! 여주가 역시 착해. "
갑작스럽게 어깨를 주무르는 선배에 깜짝 놀라 바닥만 바라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선배는 나와 동생을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헝클어진 윗옷을 정리하며 가방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 어색하지만 잘 지내보려 애쓰는 미소로 ' 이름이 뭐야? ' 라고 물었다. ' 김다윤이요. '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열심히 해보려는 의지는 느껴졌기에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데 불쑥 선배가 끼어들었다. ' 얘가 공부를 지지리도 안해서 걱정이야. ' 그러자 다윤이는 선배에게 크게 소리쳤다. ' 제발 좀 꺼지라고! 귀찮게 하지말고! ' 벌컥 화를 내는 다윤이를 보며 무어라 하려던 선배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머쓱한지 하하 웃으며 ' 우리 다윤이가 사춘기여서~ 알겠어. 오빠 나가볼게. ' 하곤 황급히 방을 나갔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던 나는 속으로 이 과외를 오늘 끝낼지 아니면 급히 돈이 필요하니 참고 할지 고민했다.
" 아 짜증나. "
" ...오빠랑 사이가 안 좋아? "
" ...몰라요. 그냥 싫어요. 짜증나고 귀찮고. "
" 아.. 그렇구나. "
" 선생님도 짜증나죠? "
" 응..? 아, 아니야. "
" 짜증나는건 짜증난다고 말 해야해요. 안그러면 계속 귀찮게 구니까. "
하-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어져버린 다윤이를 보며 급히 오늘 첫 날이니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을 하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려다 자리에서 일어나 쫓기듯 현관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 어! 여주야 벌써 끝났어? ' 따라오는 선배에 신발을 신기전에 잡혔다. ' 밥이라도 먹고 가. ' 라며 내 팔을 잡는 선배의 손은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나를 세게 잡아오는 선배의 힘에 놀랐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라는 나의 말에 선배는 아예 ' 그럼 데려다줄게. ' 의자에 걸린 자켓을 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괜찮다는 나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은체 말이다. 결국 나는 티나지 않게 선배에게서 의식적으로 떨어져서 걸었고 선배는 옆에서 무어라 많이 떠들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 어디쯤에서 선배와 헤어져야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 커피라도 사줄게, 카페 가자. "
" ㅈ.. 제가 커피를 못 마셔서.. "
" 카페에 커피만 파나, 들어가자! "
나를 억지로 밀어넣듯 카페로 유도하는 선배를 이 당시엔 맥없이 따랐다. 한 학년 선배라는 사람이 왜이리도 무섭고 하늘같은 존재로 느껴졌는지. 죄인처럼 누군가를 마주칠까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까지 제대로 들지 않으며 맛없는 녹차라떼를 조금씩 마셨다.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나를 보자 선배는 ' 약속있어? 자꾸 핸드폰만 보네. ' 라며 나를 더더욱 불편하게 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황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고 그것은 내 인생에서 돌이키고 싶은 순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갔고 1시간여를 카페에 묶이고 나서야 선배와 가까스로 헤어질 수 있었다.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고 7통의 부재중 전화와 5개의 정우에게서 온 카톡을 보고 길거리에 멍하니 서서 나와 선배가 카페에 있는 사진을 보낸 정우와의 카톡 대화창만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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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졌잖아... 우리.. "
" ..... 그래. "
정우에게 안겨있던 나는 팔을 들어 정우를 밀어냈다. 나에게 밀리며 눈이 마주친 정우의 눈가가 빨개져있었다. 붙잡듯 내 얼굴을 감싸쥐는 손도 거부하며 나즈막이 말했다. 우리 헤어졌어 정우야. 내 말을 듣고나서야 정신이 든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계속해서 재촉하듯 내게 다가오던 정우는 아주 느리게,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떨구어진 가방을 주워 머리카락에 가려진 정우의 얼굴을 보다가 뒤를 돌아서는데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주춤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완전히 등을 보이고 서는데, 다시 한 번 정우가 내 팔을 붙잡고 돌려세우며 '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냥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 내가 더 잘할게 여주야. 제발. 응? "
" ....게, "
" ..... "
" 어떻게 그래... 어떻게.. "
" ..여주야, "
" 너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
끝내 터져버린 눈물에 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시라는 것이 너와 나에게 있을 수 있을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데, 어떻게 다시 너를 만나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낼 수 있어. 아직도 어리고 덜 자란 나라서, 과거의 일들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후회와 절망을 왔다갔다 해. 그 사이엔 언제나 너가 있었고 나로인해 힘들고 괴로워하던 모습만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너를 다시 만나. 가방끈을 쥐어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우는 내 울음이 다 그칠 때까지 아무런 말 없이 서 있었다. 내가 잠잠해질 때쯤, 작은 목소리로 ' 갈게. ' 짧은 말을 남기고 쓸쓸히 떠나갔다. 바닥을 끌며 걷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제서야 나도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서둘러 세수를 하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눈 위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참 웃긴 상황에 눈은 계속 울면서도 얼음은 놓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아침수업인데, 밤에 조금이라도 울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부어버리는 타입이라 마음을 추스를 세도 없이 눈이 붓지 않게 해야했다. 민형이와 쉬시가 보면 분명 물어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음으로 눈두덩이를 마사지하며 훌쩍거리다, 대충 휴지로 얼굴을 닦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오늘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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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누가 눈 때렸어? "
" 왜, 아무렇지도 않은데. "
" 맞아. 누나 눈 오늘 귀여워. "
" ...고.. 고마워. "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앞에서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던 쉬시는 다짜고짜 누가 눈을 때렸냐고 물어왔다. 순간 놀래서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아무렇지도 않아보인다는 민형이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형이는 ' 평소랑 똑같은데? ' 하며 웃어보였다. 나는 괜스레 손거울을 꺼내 앞머리를 정리하는 척 눈을 보았다. 와, 화장할 땐 괜찮아보였는데 눈이 정말 누군가에게 맞은 듯 부어있었다. 혼자 헉해서 한참을 거울만 보다가 눈치를 보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분명 민형이는 알면서 그랬겠지, 라고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쉬시는 어느새 밥을 다 먹고 내가 시킨 음식을 조금씩 먹고 있었다. 아예 쟁반을 바꿔주며 먹으라고하자 ' 누나 최고~! ' 하며 엄청난 속도로 내 밥까지 먹는다. 정말 먹성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을 하는 와중에 민형이와 눈이 마주쳤다.
" 좀이따 배 안고프겠어요? "
" 아, 네.. 괜찮아요. "
" 정말로 괜찮아요? "
" ..... "
왜인지 정말로 괜찮냐는 민형이의 말에 코끝이 찌릿했다. 안돼 김여주. 허벅지까지 꼬집어가며 간신히 참고 난 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럼 됐어요. ' 민형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었다. 그렇게 잠시 조용하나 싶더니 내 옆으로 누군가가 앉았다. 부과대와 같은 반 여자 동기들이었다. 하나같이 나를 보곤 인사를 할듯 말듯 하다가 민형이와 쉬시를 보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의자를 살짝 반대쪽으로 밀어 앉았다. 금새 왁자지껄해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데 부과대가 말을 걸었다.
" 맞아요 선배님, 씨씨였다면서요? "
" ....네? "
" 정우 선배님이랑 씨씨였다면서요. "
" 헐 대박. 그 존잘 선배? "
" 그래! 정우 선배 지금은 여자친구 있어요? "
"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
" 아아- 근데 민수 선배님이랑도 씨씨였어요? 선배님 씨씨 많이하셨나보다. "
" 그 분은 아니에요. "
" 아 민수선배랑은 아니고, 그렇구나~ "
" 다 먹었는데 일어날까요? 쉬시 아이스크림 먹고싶다며. "
" 맞아, 쉬시 구슬아이스크림! 얼른 가야해! "
언제 다 먹은건지 쉬시는 민형이의 말에 벌떡 일어나 내가 시킨 것까지 두 팔 가득 쟁반을 들었다. ' 가요, 선배. ' 민형이의 말에 나도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민형이는 잘가라는 부과대의 인사에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눈도 못 마주치고 쫓기듯 먼저 식당을 나왔다. 민형이와 쉬시가 그릇을 처리하고 오는 동안 식당 밖에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저 아이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 일들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누구에게서 들은건지. 아직도 그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람들 입밖을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아니 온몸이 떨려온다. 정신을 놓고 멍하니 있다가 나를 콕콕 찌르는 쉬시덕에 깰 수가 있었다. 쉬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볼에 닿는 손가락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쉬시는 마냥 좋은지 ' 속았지! '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결국 그 웃음소리에 나도 피식 하고 말았다. 나와 쉬시, 민형이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구슬아이스크림을 사는데 3개를 사는 쉬시를 보며 나는 먹지 않을거라 했다. 허나 쉬시는 ' 이거 다 쉬시건데. ' 정색했다.
" 야 쉬시, 너 그거 다 먹다가 탈나. "
" 쉬시 괜찮아. 더 많이도 먹어봤어. "
" ...하긴, 인정할게. 누나는 뭐 먹을래요? "
" 아, 저는 그냥 비타민음료. "
" 음- 그럼 나도 그거 먹어야지. "
민형이는 들고있던 커피를 두고 나를 따라 비타민 음료를 집어들었다. 나는 카운터에 먼저 가서 카드를 꺼내 기다렸다. ' 에이, 왜 그래요 누나. ' 민형이는 극구 말렸지만 고마워서 그래요. 라는 내 말에 보조개를 보이며 미소짓더니 알겠다고 답했다. 쉬시는 ' 누나, 싸랑해 ' 손가락 하트를 들어보였다. 순간 당황했다가 귀여운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편의점을 나와 햇볕이 좋아 학교 앞 벤치에 앉아 서로가 산 것들을 먹었다. 쉬시는 10초만에 구슬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고 다음 아이스크림 뚜껑을 깠다. 민형이는 그런 쉬시를 보다가 나를 바라보며 ' 저희도 언제 한 번 맛있는거 같이 먹어야죠. ' 말했다. 나는 민형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려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충 학교가 끝나고 따로 보자는 말임을 깨달았다. 민형이와 쉬시라면 괜찮을 것 같다. 또 둘 덕분에 여러모로 민망할 수 있었던 상황들을 많이 피하기도 하였고, 선배로서 무언갈 도와주기는 커녕 바보처럼 받기만 했으니 이번에야 말로 무언갈 해줄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 둘이 뭐 좋아해요? 제가 사줄게요. "
" 에이 왜 그래요 누나 진짜. "
" 쉬시 좋아하는거 있어. "
" 뭐, 구슬 아이스크림? "
" 누나. "
" ....너 미쳤어? "
" ..아닌데. 나 이렇게 사람 아니야. "
뜬금없는 쉬시의 발언에 갑작스레 다 마신 비타민음료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민형이와 쉬시는 서로를 보고 미쳤냐며 티격태격 하였다. 쉬시는 참 정이 많은 아이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왜 나는 바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다가 삼겹살은 어떠냐는 민형이의 말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쉬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 먹은 아이스크림 통만 긁어댔다. 정말 덩치만 컸지 하는 행동은 어린 아이야. 민형이는 뭐가 또 맘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쉬시를 힐끔거린다. 뭔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인데..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