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이 닳고 닳았고 꽉 끼거나 키가 훌쩍 자라 바짓단이 깡총해지기 까지 한 3학년 겨울이었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고 선생들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나름대로 자유로웠고 즐거웠다. 추위에 내린 눈은 질퍽거렸고 그 질퍽거림 사이에서도 행복했다. 3년 내내 달고있던 어린애, 라는 호칭도 이 질퍽거림과 끈적함 사이로 밀려가 버리길. 몇 개월 만 지나면, 며칠만 지나면 교복도 새것으로 바뀔테다. 은근한 기대가 부풀고 억눌러졌다.으레 수업시간은 모여 음담패설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 밖에서 축구, 농구 등 몸을 굴리는 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음담패설과 게임얘기.나름 공부한다는 애들은 책에 코를 박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자유롭고 해방적인 이 질탕함 속에 나를 묻고 싶다. 그러고 싶었다. 망나니 같은 하루 속에 튀어나온 너란.체육복이 네게 맞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흡사 네가 체육복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체육복 안에 구겨넣어진 느낌. 헐렁한 체육복을 입고 의자에 거꾸로 걸터앉아 입이 터지도록 웃던 너. 내 마음 속에 구겨 들어온 것 같던 너. 느낌이 묘했다 별 거 아닌 것 처럼 넘겼던 그때 당시, 너는 자꾸 얼얼하게 내 뒷통수를 때렸고 너로 인해 몸을 뒤틀었다.하루를 질퍽거림과 축축함 , 그 중간에서 시작했고 끝도 그렇게 마무리 짓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닳아갈수록 너 마저도 닳아가는 것 같았고 일찍 너를 발견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내 이상형도 온통 너로 얼룩졌다. 아니, 내 이상형이 너로 바뀌었다 하는게 옳을 거다. 졸려 보이는 것 같아 싫었던 축 쳐진 눈매는 나른하고 뇌쇄적인 눈매로 변했고 짧은 손가락도 예쁘게 다듬어진 귀여운 손가락으로 변모했다. 내 시야가 온통 네 위주로 돌아갔고 너만큼 내게 중요한 게 없었다. 너는 상상속에서 내게 느긋하고 다정했다. 행복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순간, 순간을 상상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는… 네가 아닌 환한 형광등 만이 내 눈을 부셨을 뿐. 너는 내 상상속에서만 숨쉬는 존재였고 내 상상안에서는 교태넘치고 나를 위해 살아있는 것 같았다. 너는 굳은 살처럼 내게 푹 패여갔고 나는 다급하고 음울한 기분으로 매 하루를 맞았다. 졸업이 코에 닿았고 나는 조급해졌다. 미리미리 번호라도 따둘 것을 후회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굴어볼 걸 그랬다. 결국 졸업 당일에도 너는 내게 닿을 수 없는 존재였고 말 조차도 쉽게 걸 수 없었다.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터지는 플래시에 맞춰 밝게 웃는 너.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잘 차려입은 코트. 지금이라도 꽉 안아버리고 싶었다. 품에 안고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었다. 내 생활의 활기와 윤기로 내 일부를 윤택하게 빛냈던 너였기에.내 눈에 마지막으로 투영된 너는 순결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