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굳이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써야 할 것 만 같았어요. 당신이 준 이 표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어떻게든… 그래요. 어떻게든. 아마도 전 이 표를 한 가을날 받았을 겁니다. 맞아요, 그날이 마침 코트를 첫 개시하겠다며 벼르고 있었거든요. 쓸쓸하고 노란 빛이 은근한 향수와 코트는 더없이 잘 어울렸었는데. 이제는 그 코트를 밀어넣고 말았네요. 아무튼, 당신이 내 손을 부여잡으며 건넨 그 표는 참 고마웠습니다. 하얗고 뽀얀 바탕에 짧막한 연극의 제목과 당신의 지문이 몇 자국 묻어있었어요. 전 표를 받아들고 소중히 품에 당겨 품었습니다. 알을 부화시키려는 어미닭의 마음처럼 전 성급하고도 미련하게 그렇게 표를 꿈꾸었어요. 무대위에서 당신이 빛날 그날만을 그렸습니다. 당신이 춤추고 노래하며 나만의, 나만의 뮤즈가 되기를 꿈꿔왔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날은 왠일인지도 날이 짓궂더군요. 눈은 와르르 엎질러져 시야와 발걸음을 막아버렸습니다. 자꾸만 소나무를 휘감아 도는 바람조차 심상찮았어요. 불안했습니다. 당신의 극장은 시내 쪽에 있었고 우리 집은 시외라…한참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거든요. 전 망설였습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당신인데, 무대 위 해사한 당신을 며칠이고 몇날이고 그리워했었는데. 전 결국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왜 이리 꾸물거리던지요. 아스팔트 도로에 못을 박은 듯 눈을 깔아뭉개며 앞으로 나갈 생각을 않았습니다. 저는 초조해지고 불안해져 손톱을 몇 번 물어뜯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다듬은 손톱인데 흉해져서야… 성큼 당신이 제 마음아래 오래도록 패여있단 걸 깨달았어요. 지난 몇 달간 당신은 제 곁에 부재였음에도… 여전히 제 곁에 머물러 있더군요 부재는 존재로 대변되고, 존재는 부재로 대변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버스 안 발을 동동거리며 당신이 건넨 표를 슬쩍 쥐어보았습니다. 손 안에 꽉 차는 느낌이 참 좋았어요. 오돌토돌한 활자의 느낌 역시. 이 표, 표로 증명되는 단 몇 시간을 위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미루며 기다려왔던 순간들. 상상은 행복으로 번져왔습니다.
눈은 자꾸만 창밖을 긁었고 더더욱 초조해졌습니다. 얼른 버스를 보채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낡은 버스는 털털거리며 몇 안되는 손님을 실고 시내로 향했습니다. 그 버스 안에서도 어찌나 행복이 솟아나던지. 자꾸만 입꼬리가 방긋거리는 것을 주체못하였어요. 한 움큼 한 움큼 극장에 다다를때마다 도담거리는 가슴을 짓누르기 바빴습니다. 진정으로 그로 인해 설레는 하루였습니다. 그가 노래하는 모습, 그가 바르르 떨며 울먹이는 모습, 그리고 미처 분장을 채 못지운 모습, 날 반기는 모습. 그 모든 것을 상상하며 달아올랐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생각만으로도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무의식 속의 그는 저를 조련하고 있었습니다.
공연장 앞에서 버스가 멈췄습니다. 기쁨과, 환상과 설렘으로 점철된 발걸음은 날아갈 듯 동동거렸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진정으로 날 좀먹고 있던 겁니다. 발걸음은 설렘과 기쁨으로 점철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저 환상 속의 당신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내 발을 삼키고 있었을 뿐. 그 덕분에 계속 발이 빠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꾸만 발이 뽀얀 눈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아, 역시 당신은 다르지 않더군요. 실망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싱그러웠어요. 분명 삭막하고 건조한 겨울이었음에도 당신은 촉촉하고 상큼하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줄거리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화려하고 나비같던 당신을 포착하기에 바빴으니까요.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저를 불안하게 했으니까요. 장대한 음악과 부시던 조명 사이 당신은 의기양양하게 꿈틀거리며 피어났습니다. 찬사와 찬미가 입을 가르고 터져나오더군요.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오르고 눈동자가 확장되었습니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습니다. 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신의 곁은 부산했습니다. 그의 품 속엔 많은 꽃다발이 안겨져 있었고 조금전까지만 해도 찬사가 쏟아져 나오던 입술은 딱 굳어버리더군요. 야속한 입술. 당신은 저를 알아본 듯 인사를 건넸습니다. 왔네- 가볍게 한 마디 툭 던지는 듯 한 말인데도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저는 꽃다발을 건넸고 당신은 받아들고 몇 번 얼굴을 찡긋거리더니 자리를 떴습니다. 고마워 짧은 인사가 귓전을 강타했고 당신은 그대로 내 앞을 떴습니다. 그의 눈동자 안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축하와 환희로 뒤덮혀있었습니다. 그리고 꽃다발 까지.
전 순간적으로 힘이 쫙 빠져버렸습니다. 고작 이 두마디를 들으려 몇 달 전부터 설레여왔던 것인가. 혼란스런 가슴을 부여잡고 얼른 공연장을 떴습니다. 연극이 끝난 이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빛나고 있더군요. 제가 범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어느새 마음이 탁해진 건지… 오직 한 번만이라도 당신을 보았으면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새는 혼탁해져 버린 겁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나를 반겨주었으면 했어요. 당신에게 환영받고 당신의 포옹을 받으며 전 당신께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기대로 다듬어진 양 손이 허전해 지더군요. 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당신이 야속하지도 밉지도 않았습니다.
버스 안에서 표를 찢었습니다.
슬픔이 겹쳐 목이 메더군요.
그리고 당신이 보고싶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언젠가 표를 주신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편지를 쓰는군요. 너무 늦어 죄송하기 까지 해요. 다만 1년전의 제 진심을 털어놓는 와중에 후련해졌습니다. 1년 전 제 앙금을 털어놓으며 새삼 당신을 기억하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당신의 작품을 보러갈까 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똑같겠지요? 여전히 빛나고 있을까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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