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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e Want

Written by.흑지

 

 

 

*

 

 

 

종인은 러시아로 떠났다. 유럽 쪽에서 발레로 유명한 곳이 러시아라고 들었다. 그건 떠난 종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러시아로 떠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막상 러시아로 와도 문제였다. 종인은 기본적인 자세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 몸은 어렸을 때와 다르게 굳어있었고 충분한 스트레칭이 밑받침이 되어야만 발레를 정식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꿈의 학교라던 바가노바에 입학하려면 상당한 실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종인은 이제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바로 학교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바가노바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또 기본자세를 취하고 춤에 대한 이해도와 배움이 빠른 종인은 금세 적응해, 기본 동작을 수월하게 외웠다.

 

 

 

“종인, 다리 안 근육을 써야 해요. 플리에 할 때에는”

“네.”

 

 

 

사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열정보다도 더 컸던 건, 세훈에 대한 감정이었기 때문에 종인은 가끔 집중하지 못했다. 반복적인 동작을 계속해서 하다가도 어느새 생각의 초점은 세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왜, 방금까지 잘만 하다가 힘을 풀었냐는 선생님의 지적에도 종인은 힘없이 웃으며 하고 있는 연습을 계속해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연락이라도 하고 싶다. 번호가 바뀌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한국에 대한 생각 말고 세훈이도 그 동안 사귀었던 친구들도 모두 잊어버리고 하고 싶던 발레에 전념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아무도 모르는 타지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러시아 사람인 발레 선생님뿐이었다.

 

 

 

“종인의 체형은 무용을 하기에 타고난 체형이에요. 스트레칭만 잘 된다면 곧바로 음악에 맞춰서 춤을 배울 거예요.”

“감사합니다.”

 

 

 

소통에 대한 문제도 컸다. 아무리 러시아 사람인 선생님이 영어로 차분하게 말을 해준다해도 종인은 이제 겨우 고3이었다. 종인은 아무리 선생님이 길게 말해도 대충 알아듣고는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종인의 생활은 이러했다.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남들은 2~3시간 수업 받으면 집에 가는데. 종인은 거의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트레칭의 이유도 있었다. 남들보다 더 빨리 다리를 찢어야 했고 허리의 유연성과 적당한 근육이 필요했다. 발레는 무엇보다도 다리의 힘이 중요했으며 내뻗는 팔에는 항상 힘이 들어갔다. 동작이 우아하다고 해서 결코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종인은 운동량을 늘렸고 제 또래애들이 해왔던 기준치까지 올리는 것에 치중했다. 그렇게 두 달이 걸렸다. 종인에게는 외롭고 힘겨운 사투였다.

 

 

 

*

 

 

 

종인이 떠난 뒤로 힘들어했던 건 세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아무리 물어보아도 어느 나라로 갔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근황에 대해서는 알려주질 않았고 세훈은 세훈 나름대로 답답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던 와중에 세훈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국제사립고에서 유일하게 공부 욕심이 없는 애, 찬열이었다. 키도 큰 놈이 제 몸을 반으로 접고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겨우 깨어나 밥을 먹으러 갈 터였다. 세훈은 찬열의 어깨를 두드렸고 찬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며 일어났다. 세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진지했기 때문에 부러 입술을 꾹 다물어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박찬열, 학교 다니기 싫지?”

“…뭐, 졸업장은 따야지.”

“외국 다녀올래?”

“응?”

“김종인, 찾아와.”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아니, 어떻게 사는지만 알려줘. 그거면 돼.”

 

 

 

그리고 세훈은 말을 덧붙였다. 너도 김종인 좋아하잖아. 아버지가 아무하고도 연락을 못하게 해서 지금 혼자 외롭게 타지에서 힘들게 생활하고 있을 거야.

 

 

 

“너는 왜 직접 찾지 않는데?”

“후계자 수업 받아야하니까. 아버지가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래도 김종인은 …널 더 좋아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김종인을 먼저 볼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텐데.”

 

 

 

처음으로 오세훈에게서 절망을 보았다. 무언가를 포기하는 세훈을 보는 것은 실로 처음있는 일이었다. 종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래의 세훈이었다면 막무가내로 종인을 만나고 오겠다고 학교를 결석했을 것이고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도 불분명한 곳으로 몇 번이고 종인을 찾아 헤맸을 거다. 세훈은 그랬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왔다. 그래서 김종인에 대한 관심을 비뚤어지게 표현했었다. 점차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찬열은 원래의 세훈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세훈이 몹시도 낯설었다.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넌 그냥 외국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살면 돼.”

“그래서 나도 외국 가서 살라고?”

“종인이 있을만한 곳 찾아봤는데, 러시아, 프랑스”

“…그래서 정말 찾아와?”

“거기 있어. 찾으면 잘 있는 거 확인하고. 아버지가 종인이 출국 못하게 막을 거야.”

“너는 김종인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하지만 적당함을 알아야했다. 예전 같았으면 앞 뒤 안 재고 그냥 찾아갔을 텐데. 지금은 제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내 마음대로 멋대로 종인을 찾아간다면? 모든 건 뒤바뀐다. 종인이 원하는 발레도 제가 쥐고 있는 후계자자리도 모두 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후계자자리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종인이 원하던 미래가 부서질 수 있었다. 양아들이면서 내 아들의 앞길을 방해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물론 아버지는 김종인을 아꼈지만. 김종인이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생각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내놓은 자식. 외국에서 성공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을 태세였다.

 

 

 

“보고 싶은 것 보다,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

“혹시 외롭지는 않을지, 타지에서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돼서 그래.”

“그래, 다녀올게.”

“주위에 친구하나 없고 힘들어하고 있으면 네가 친구해줘.”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김종인한테 필요이상으로 찝쩍거리면 죽는다.”

“…내가 어떻게 살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사람하나 더 붙일거야.”

“물론 형제의 명목으로. 잘 지내는지, 혹시 어긋나진 않는지.”

 

 

 

형제라고 내가 왜 김종인이랑? 결국 이렇게 엮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형제 이외의 핑계거리를 댈 수 없었다. 내가 김종인이랑 한 집 살면서 품었던 감정들. 처음으로 김종인에게 미안했고 심장이 덜컥거렸던 순간들을. 그리고 사랑했던, 앞으로도 사랑할 김종인에 대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래도 꾹 참으며 기다려낼 수 있었다. 어떠한 것보다도 중독성이 강하다는 마약도 끊게 했고 습관적으로 피우던 담배도 끊게 한 종인이었다. 모든 걸 내리누를 수 있었다. 김종인에 대한 감정만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가능케 했다.

 

 

 

“다녀와.”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늘 저녁 8시표야. 선생님께는 내가 말해놓았어.”

“나, 캐리어도 없고 뭣도 없는데.”

“정규수업 끝나고 사러갔다가 공항 가.”

 

 

 

사람 붙여둘 테니까. 막 쓰지 말고. 카드 한 장과 비행기표를 찬열의 자리에 놓아둔 세훈이 꽤나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찬열은 세훈이 이제까지와는 알던 세훈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찬열은 세훈의 호의에 고맙다고 답했다. 어머님께도 말해놓을게. 내가 유학보냈다고. 세훈이 말했다. 찬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발레 배우러가는 거 아니야. 괜히 김종인 옆에 붙어있지 말고 다른 거 배워.”

“…내가 갑자기 뭘 어떻게 배워. 한 게 없는데.”

“너 중학교 때, 밴드 부였잖아. 악기를 배워도 좋고 새롭게 다른 걸 배워도 좋아.”

“…알았어.”

 

 

 

모든 것은 갑작스러웠다. 그건 찬열의 생각뿐만 아니라, 세훈의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갑작스러운 것은 종인이 떠났다는 거였다. 모든 생각의 위주는 종인으로 돌아갔다. 찬열도 역시 그랬다. 비어있는 빈자리를 보며 시시때때로 종인을 떠올렸고 세훈의 옆에 있으면서도 제게 호의적이던 종인을 떠올리며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좋은 기억들이었는데. 갑자기 당사자가 보이질 않으니까. 찬열도 찬열 나름대로 아팠고 세훈의 아픔은 더할 나위 없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정말 좋아했고 매일 보았던 사이고 같은 집에서 항상 같이 있었던 사이인데. 찬열은 세훈의 아픔이 더 클 거라고 생각했다.

 

 

 

*

 

 

 

정규수업이 끝나고 찬열은 제 가방을 올려 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보충수업이 남아있었지만 찬열은 개의치 않고 교실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쪽에 앉은 경수가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어디가.”

“집.”

“땡땡이야?”

“뭐, 그런 거지.”

“고3되서 사람 된 줄 알았는데.”

“네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잠시 침묵했다. 경수는 뒤이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너 잘 지내는 줄 알았어. 명백하게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찬열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고. 친구대접도 안 해줘놓고 서운하다. 정말. 그리고 교실을 나갔다. 옆 자리에 있던 백현이 경수의 어깨를 붙들고 말리는 것 까지 확인한 뒤에야 찬열은 깊은 한 숨을 내리쉬며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정문 앞에 대기 중이던 흰 차에 올라탔다. 매번 세훈과 종인이 함께 타던 차였다. 조수석 자리에 앉자, 낯설은 아저씨가 말을 붙였다.

 

 

 

“찬열 도련님이시지요.”

“아, …도련님은 아니고요.”

“어떤 집에 살던 어떻게 자라왔던 귀한 자제분들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말 낮추세요. 전 괜찮습니다.”

“백화점 들렸다가, 공항 갈 거예요. 아마, 오늘 뿐만 아니라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 동안 도련님과 동행할겁니다.”

 

 

 

찬열은 직감했다. 이 분이 나와 러시아까지 동행할 분이라는 걸. 그러고 보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세훈과 종인을 매일 태우러 오셨던 분. 그만큼 두 사람을 매일 가까이 했던 분이었다.

 

미리 시동이 걸려있던 차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좋은 차의 승차감에 찬열은 절로 마음이 편안해져,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이윽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찬열이 지나가면서 자주 보던 커다란 백화점 앞에 멈춰 섰다. 그 옆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댄 뒤에 찬열이 먼저 내리고 아저씨가 뒤따라 내렸다. 아저씨는 찬열의 옆에 서서 걸었다. 저쪽이에요. 길을 잘 모르는 찬열에게 매장 입구를 알려주고 옆에서 차분히 찬열을 도왔다. 캐리어는 저쪽에 있습니다. 부터 시작해서 여행이 짧지는 않을 것 같으니, 큰 걸사지요. 하고 하나만 사시면 안 됩니다. 수화물용으로 붙일 캐리어와 지갑이나 귀중한 소지품을 넣을 기내용 캐리어도 고르셔야지요. 하고 차분하게 일렀다.

 

우유부단한 찬열이 잘 고르지 못하자, 옆에서 아저씨는 계속해서 찬열에게 안에 안 주머니가 있는 것이 편할 것 같군요.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하고 여러 번 되물었다. 찬열은 무난하게 네이비와 브라운 캐리어를 고르고 계산을 하자마자 받아들려 했지만 아저씨에게 캐리어를 뺏겼다. 주세요. 짐은 제가 듭니다. 찬열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광경이었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쇼핑을 하라고 했다.

 

 

 

“러시아는 춥습니다. 아우터를 두 개 정도 구매 하셔야 해요.”

“…하지만 세훈이가 캐리어 사라고 했는데요.”

“캐리어만 사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아, 허락된 거였어요?”

“저는 세훈도련님의 지시와 찬열도련님의 지시에 움직입니다.”

 

 

 

찬열은 아웃도어 매장에 들어가 두툼한 패딩을 집어들었다가 가격표를 보고 여긴 비싸요. 하며 나가려했다. 두 자리 수도 아니라 세 자리 수라니. 찬열의 씀씀이에는 감히 생각도 못할 가격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찬열의 팔을 붙들면서 여기서 고르시지요. 여기가 따뜻합니다. 하고 말했다. 찬열은 또 한 번 제 생각보다는 아저씨의 생각과 조언에 패딩을 골랐다. 기다란 롱 패딩과 간단히 입을 수 있는 적당한 기장의 패딩.

 

 

 

“집에 딱히 챙기실 소지품은 없으십니까?”

“지금 교복을 입고 있어서요. 사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아, 여분의 옷이 없군요.”

“네, 집에 가면 있어요.”

“지금 시간이 여섯시인데. 공항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려서.”

“…아.”

“일단 편하게 입을 여분의 옷을 구매한 뒤에 백화점에서 바로 출발하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아저씨는 찬열의 아버지뻘 정도였다. 찬열은 제 진짜 아버지가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아마,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하며 든든한 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체구는 조금 작지만 듬직하신 아저씨. 찬열은 아저씨에게서 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흐릿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었다.

 

대여섯 벌 정도의 옷을 구매한 뒤, 이 쯤 하면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필요한 옷을 살 수 있습니다. 하며 처음으로 찬열의 앞에 서서 걸었다. 이 쪽입니다. 찬열은 계속 해서 따라 걷다가. 주차장입구까지 들어와서 잰걸음으로 아저씨의 옆까지 걸어와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하루만 보고 말 사이가 아니라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찬열은 태생이 외로움이 많은 아이였다. 고작 잠깐 본 아저씨에게 이토록 정을 느끼는 것을 보면.

 

공항으로 와서 자잘한 것 하나하나까지 아저씨가 모두 챙겨주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여권까지 찬열의 손에 쥐어졌다. 캐리어를 끌고 출국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한 뒤에 아저씨는 작은 서류가방과 작은 기내용 캐리어만 끌고서 입국장으로 들어왔다. 공항은 분주했다. 캐리어 끄는 소리,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소리. 스튜어디스의 구두굽 소리 등, 온통 소음이었다. 찬열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꼽고서, 한 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음악을 재생시켰다. 가벼운 인디밴드곡이였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아저씨가 하는 말을 흘리지 않았다. 화물용 캐리어 붙여드릴게요. 기내용 캐리어는 끌다가 안고 타세요. 부터해서. 찬열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찬열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서류가방을 열어 정리가 되지 않은 A4용지들을 훑어 내리며 빠르게 읽었다.

 

 

 

“뭐보세요?”

“세훈 도련님이 챙겨주신 자료들이요.”

“…우와, 얘는 언제 이걸 다 준비했대요.”

 

 

 

찬열이 슬쩍 프린트된 글을 읽자, 아저씨가 반대쪽으로 빈 종이를 보여주었다. 저 보라고 쓰신 겁니다. 도련님은 보시면 안 됩니다. 하고 단호하게 덧붙이는 말에 찬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핸드폰만 매만졌다. 비행기가 곧 이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조금 뒤로 가는 느낌이 들더니, 모터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비행기는 이륙장을 내달렸다. 그리고 조금씩 하늘 위로 치솟았다. 금세 가까워진 구름에 찬열은 비행기 창문을 매만지며 와.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구름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했다.

 

 

 

찬열이 다시 비행기 내부를 보자, 아저씨가 안경을 썼다가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럽이긴 하지만 아시아와 가까워서 금방 가요. 잠시 주무셔도 좋습니다.”

“아, 네.”

 

 

 

그리고 아저씨는 무언가에 계속해서 집중하듯 태블릿 pc를 꺼내든 후에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찬열은 또 다시 아저씨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또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일부러 딴 곳을 쳐다보았다. 스튜어디스가 주는 음료수와 간식거리들을 받아 물고서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작게 흥얼거렸다.

학교에서는 잘만 오던 잠이 비행기 안에서는 오지 않았다. 잠이 안 와. 찬열은 계속해서 노래를 들으며 음료수를 몇 번이고 마신 뒤, 화장실로 향했다. 스테인레스 소재의 화장실은 몹시도 낯설었다. 비행기의 소음과 함께 물이 내려가는 소리 역시 낯선 것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얌전하게 앉아있자. 아저씨가 말을 붙였다. 지루하지요? 하고. 찬열은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저씨는 보고 있던 서류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종인이 있을 법한 발레학원들이 적혀있었다. 1번부터 5번까지는 밑줄이 그어져있었고 6번이외의 것들은 딱히 중요하지 않은 듯, 아무표시도 되어있지 않았다. 1번이 가장 유력하다고 하네요. 아니,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2번이나 3번일 수도 있다고 했고요. 세훈 도련님께 전해 들은 건데. 찬열 도련님도 종인 도련님과 친했다지요.

 

 

 

“아, 네.”

“저도 매일 보다가 갑자기 못 보니까. 보고 싶네요.”

“…아.”

 

 

 

딱딱하게 정형화된 말만 내뱉던 아저씨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들으니, 찬열은 괜스레 울컥했다. 보고 싶었다. 종인이. 그건 찬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세훈 도련님의 부주의가 문제였겠죠.”

“…네? 부주의요?”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 도련님이 사장님을 직접 찾아왔었습니다.”

“….”

“친구도 뺐어갔다지요. 찬열군.”

 

 

 

크리스가 그런 얘기를 했어? 내가 자기 친구였다고? 언제부터? 찬열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왠지 세훈도 모르고 있는 비밀얘기를 자기 혼자만 알게 된 듯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잖아. 분명 세훈과 종인 사이를 눈치 챘다면 지금처럼 종인을 멀리 보내버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세훈과 종인을 떨어뜨려놓는 것은 어쩌면…. 찬열은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도 지금처럼 머리를 써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가 내가 오세훈 쪽에 넘어간 것에 크게 신경 쓰고 있었을까. 그러면 김종인에게 말을 걸던 그 순간에도….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이미 알게 된 거 더 얘기해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세훈이와 당분간 만날 일이 없으니까.”

“…크리스, 그 분 눈치가 빠르더군요.”

“네?”

“두 사람을 후계자에 올린 것부터 해서 사장님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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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요? 찬열은 잠자코 아저씨의 말을 들었다.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몰랐는데. 아저씨는 저를 비서실장 정도로 소개했다. 사장님은 오래 일한 믿음직스러운 저를 아들 두 분 옆에 붙이셨고. 저는 두 분을 태워다 드리고 회사로 출근하는 식이였지요. 사장님은 둔하신 분이 아닙니다. 두 분이 여러 사람이 느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면 사장님도 다 듣지요. 처음엔 두 분의 관계를 그냥 친해진 친구 정도로 인식했습니다. 형제라기엔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사이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형제처럼 투덕거리진 않더라도 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얘기는 저도 알아요.”

“역시나, 학생들도 의심쩍게 생각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웠지요.”

“…그래서요? 결국 종인이를 보낸 게 답이었나요?”

“때마침, 종인 도련님이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신다 하셨고. 사장님은 걱정을 한 시름 덜었지요.”

 

 

 

갑작스러운 여행, 갑작스러운 진실은 찬열을 혼란케 하기에 충분했다. 종인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버려지고 철없는 어머니와 사는 저보다도 종인이 더 힘들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타국에서 혼자 있을 종인이 걱정되었다. 자신은 영어를 잘 몰라도 비서 아저씨가 옆에 있다면 걱정이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했고 기내용 캐리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수화물로 붙인 캐리어도 별지장 없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받아서 나왔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는 호텔에서 짐을 내려놓은 뒤, 가벼운 몸으로 아저씨와 택시를 탔다. 아저씨는 미리 외워둔 학원 이름을 불렀고 택시는 출발했다. 번화가에 있는 학원. 그러나 그곳에서는 종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Do not have such a person? 종인의 이름을 대며 한국인이라고 지칭했지만 이곳에는 한국인이 몇 있지만 여자밖에 없다고 답했다. 역시 찾기 쉬울 거라곤 생각 안했습니다. 하며 실장님은 더 둘러볼 새도 없이 뒤돌아섰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바가노바 스쿨 옆에 위치한 학원에서도 그런 학생은 없다고 답했다. 세 번째, 번화가와 좀 떨어진 곳. 그곳에서는 현지인밖에 받질 않는다 했고 네 번째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섯 번째가 되었을 때는 선생님에게 묻지 않고도 바로 종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바로 앞에 있는 거울이 앞에 있는 사람이 종인이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종인 도련님.”

 

 

 

연습에 몰두하던 종인이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섰다가 오랜만에 보는 비서실장님과 옆에 있는 의외의 인물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찬열이? 찬열이가 여기 왜 있어? 실장님은? 일 때문에 바쁘실 텐데?

 

 

 

“실장님! 그리고 박찬열! 여긴 어쩐 일이야.”

“너 보러 왔지!”

“두 사람 다 저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네.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숨김없이 기쁜 내색을 비추며 종인이 웃었다. 바 한 쪽에 다리를 걸친 채로 아직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다리가 다 안 올라가요. 그 나이 때의 소년처럼 웃으며 남은 연습을 마저 했다. 이 동작만 끝내면 당장 두 사람 앞에 달려갈 참이었다.

 

 

 

“열심히 하네. 바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하던 것만 마저 하고!”

 

 

 

아나방, 플리에, 드미플리에, 앙바, 업, 간단하게 기본 동작을 되짚은 후, 바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멀뚱멀뚱하게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조합이에요. 찬열이랑 실장님이라니! 의외네요.”

“내가 너보고 싶다고 졸라서 온 거야.”

“아 진짜? 실장님이 그런 걸 들어주실 분이 아닌데?”

“내가 김종인이랑 제일 친하다고 했어.”

 

 

 

오세훈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찬열은 부러 세훈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세훈 때문에 종인은 여기 온 것이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찬열 역시 이곳에 온 거지만…. 종인은 찬열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찬열이 더 이상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서 두세 번 되묻다가 그냥 포기했다. 어찌됐건 이 먼 곳까지 저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찾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였다. 머릿속에 번뜩 세훈이 스쳐지나갔다. 이 두 사람의 연관성, 절대적으로 두 사람은 제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찾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찬열이의 경제적여건, 그리고 실장님의 업무 등을 비롯해서 생각해봤을 때. 두 사람은 결국 세훈이 보낸 거였다.

 

 

 

*

 

 

 

한 차례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다. 내리쬐는 햇빛에 큰 눈을 절로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그런 경수의 옆에서 백현이 제 손으로 경수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바보야, 고개를 숙이던지, 손으로 햇빛을 가리던지. 다정함이 잔뜩 묻은 그 잔소리에 경수는 그저 작게 웃었다.

 

 

 

“이대로 여름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너 더운 거 싫어하잖아.”

“괜찮아, 더우면 더운 데로 지금처럼.”

“….”

“너랑 같이 있고 싶다. 백현아.”

 

 

 

은연중에 항상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경수였다. 특히 종인이 떠난 뒤로 더더욱. 겉으로 드러나는 불안 증세는 많이 없어졌지만 백현은 항상 주기적으로 경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괜찮다니까. 또 환자 취급한다. 입술이 앞으로 삐죽 나와서는 툴툴거리는 경수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통을 손에 쥐어주었다. 백현은 어느새 경수의 하루의 일과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다. 백현은 딱히 무서운 것이 없었다. 저는 외동이었고, 원치 않는 약혼은 전처럼 깨버리면 되었고 무엇이던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건 경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경수도 백현이 원하는 쪽으로 잘 따라와 주었다. 이제 우리의 현재에는 잔물결도 일지를 않는다. 평온한 수면위로 편안하게 몸을 띄웠다. 우리는 이대로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잔잔한 수면의 파동에도 백현은 경수의 손을 깍지 껴잡았다. 그래, 어디든 좋다. 너만 있다면 우리가 함께 있다면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으니.

 

 

 

“끝까지 같이 갈 거야. 너랑.”

 

 

 

처음으로 우리의 위치에 감사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우리. 어쩌면 세훈과 종인처럼 형제라는 이름으로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는 우리. 그래서 과거가 어떻건 미래가 어떻게 되건 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토록 경수가 집착하던 현재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다면, 나는 뒷걸음 칠 것이다. 현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어디라도 함께 가자.”

 

 

 

그게 답이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정해져 있었다. 불분명한 목적지, 하지만 끝은 언제나 너와 함께 있는 것. 우리는 함께 있어야만 세상에 공존할 수 있었다. 내가 없으면 위태로울 경수, 그리고 그런 경수를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나.

우리는 언제라도 함께 해야 했다.

 

 

--

백도 잠깐 킵핑.. 32편에 등장 안 할 수 있습니다. 아, 근데.

저 몰매 맞기 전에 먼저 고백하나만 할께요. 왕가네 식구들 결말 버금가는 왓위원트 결말을 보시게 될 겁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5월 가기 전까지는 완결 내는 게 목표임..

그리고 후속작 낮과밤은 비축분 쌓고 있으니.. 성실연재를 목표로..(절 믿지 못하시겠지만.. 쌓아두고.. 풀거라니깐여.. 헤헿..)

풀고 싶을때 일주일에 두세번 꼴로는 풀수 있도록.. 10편 정도 써놓고 풀게여..

 지금 사실.. 1편밖에 못씀.(에효.. 이거 이번 년도 안에 나올 수 있긴 할까요..)

낮과 밤 미리보기 조각조각 땄다다.. 세종임니다. 번외로 백도 나올 예정.

〈!--StartFragment-->

*

태초부터 신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아름답게 수놓아진, 꽃과 나무들. 동식물들.

대지의 모든 것들을 더욱더 화사하고 영롱하게 빛나게 하는 태양, 하늘에는 태양이 떠있었다. 그 태양은 처음에 필요이상으로 자신의 빛을 조절하지 못하고 대지를 태우곤 했다. 태양은 자전해야만 했다. 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곧이어 밤을 만들어냈다. 어둠이 내린 대지에 동식물들이 편히 쉬며 잠을 청했다. 실로 평화로운 광경 이였으나, 아침의 아름다운 하늘과는 상반되는 밋밋한 하늘이 싫었다. 별로 수를 놓고, 태양처럼 커다란 원형체의 행성을 띠웠다. 태양이 있기에 그 달은 빛을 머금을 수 있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부름에 충실하게 일해 왔었다. 낮이 밝아오면 어김없이 세훈은 태양을 돌려세웠다. 지구는 공전하고, 태양은 자전을 했다. 매일 균형 있는 듯 했지만, 도는 궤도는 조금씩 불일치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아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신을 닮은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 신은 미래를 내다보았다. 자신 말고 자신의 일을 도와줄 또 다른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저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인간보다도 훨씬 더 제 모습과 가까운. 그들을 창조해내었다.

아침을 주관하는 세훈은 간간히 어릴 적 보았던 낮달을 떠올렸다. 낮달은 밤의 일부를 비춰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밤을 주관하는 신과의 통신망이었던 거다. 그와 오래전부터 보아온 사이인데도 우리는 항상 어색했다. 수백 년 동안 함께 지냈음에도 우리는 늦게 각성했다. 신의 각성, 그것은 수많은 날을 지나고 또 모든 걸 겪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대지가 흔들리고, 행성이 지구를 충돌하고, 운석이 대기층에서 분해되어 하늘에서 겹겹이 떨어져, 유성을 봤을 때도, 우리는 태초부터 함께였음에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StartFragment-->

“오랜만이야. 종인.”

“그러게요. 잘 지내요?

밤을 주관하는 종인은 세훈에게 예를 표했다. 나는 어둠 일뿐이고, 그는 빛이었다. 낮달을 통해서 보아왔던 그의 얼굴은 아침, 빛 그 자체였다. 종인은 세훈이 먼저 말을 붙여올 때마다 하나밖에 없는 제 신을 떠올렸다. 내 위의 신은 그분밖에 없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세훈은 자신의 신보다도 영롱하게 빛나는 것일까. 종인은 세훈을 높게 추켜올렸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밝은 태양보다 더 빛나는, 세훈은 빛,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낮달을 통해서 서로의 모습을 엿봤다. 딱 달만큼의 시야였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침과 밤의 하늘을 구경했다. 푸르른 하늘의 흰 구름, 까마득한 밤의 회색 구름, 지상을 내려다보면 너무나도 아득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바다였다. 아침하늘의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바다. 하늘의 색을 온전히 투영한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면 어김없이, 그 달사이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세훈은 종인을 보고 있었다. 밤은 그다지 볼 게 없었다. 딱히 꼽자면 별이 빛나는 정도. 세훈은 달 틈새로 종인을 보았다. 어두운 낯빛이었으나, 짙은 눈매, 굳게 달린 입매는 조금 고집스러울 정도로 무뚝뚝해보였다. 그러나 그는 내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아무리 밤보다 먼저 만들어진 게 아침이라지만 그는 동등한 신이었다. 그가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가며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할 때에, 그에게서 나는 감춰져있던 빛을 보았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서 빛을 갈망하는 그의 눈망울이 빛으로 물들었다. 실로 아름다운 눈이었다. 깊게 빠져버릴 것 같은. 그러던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그를 너무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던 탓에 살짝 몸을 뒤로 뺐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을 보았어요.”

“그랬구나. 나는 별과 달을 보았어.”

거짓말이었다. 종인을 보느라, 밤하늘은 아예 살펴보지도 않았다. 밤하늘이라 칭하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태양의 반대편으로 가면 볼 수 있었다. 물론 낮을 주관하는 세훈은 태양의 옆에서 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 빛을 잃고 어둠속으로 영영 추락할 터였다. 낮달이 떠있을 때는 낮달을 움직여서 시야를 움직이면 지구반대편, 밤을 엿볼 수 있었다. 밤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밤을 주관한 신, 종인은 흥미로웠다. 일단 내가 현재 볼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었다. 몇 백 년을 함께 했지만, 이제야 겨우 가까워졌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온통 종인뿐이었다. 천고의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이것은 각성전이라, 인간의 나이로 따지자면 4살도 채 안 되어있을 때의 만남이었다.

“저는 습관적으로 달을 보곤 해요.”

“음…, 왜지?”

“세훈은 낮달로 이곳을 먼저 볼 수 있지만, 저는 낮에 달이 떴는지 보지 못하니까요.”

세훈이 낮달로 본다면 종인은 달을 통해서 아침의 하늘을 보았다. 그가 나와 반대편에 있다는 게 무색할 만큼 나는 그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약 3년 전쯤이었다. 아직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했던 게 몇 년인데, 왜 이제야 네가 못 견디게 그리운 걸까. 널 다시 만나려면 3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허송된 세월, 하릴없이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내가, 드디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사랑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도 너를, 사랑하게 되었나보다. 아니, 이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나? 알 수 없었다. 각성하기 이전의 일들은 결코 기억해낼 수 없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네게 가고 싶다. 될 수 있으면 많이. 하루에 몇 번이나 너를 그렸는지 모른다. 달로 투영된 네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가슴이 저릿한 일인지 알까? 볼 수도 닿을 수도 없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애가 닳는 것 같아서. 세훈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신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아이다. 미개한 태초의 인류보다도 더 세훈은 종인을 원했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인 아이었다. 세훈은 종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로 투영된 종인의 모습은 뚜렷했지만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바로 앞에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StartFragment-->

“조금 안 있으면 개기월식이네. 곧 보겠다. 종인아.”

“아, 그러게요. 벌써 세훈을 못 본지 삼년이나 되었네요.”

“이번에 만나면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네? 저흰 항상 가깝게 만나왔잖아요.”

“존댓말 불편해서 그래.”

“아….”

그렇지만 세훈은 저보다 더 일찍이 만들어진 신인 걸요. 신의 바로 다음 신. 종인은 애써 말하지 않았지만 세훈은 종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의 부름을 받아 낮을 주관하는 저와 밤을 주관하는 종인은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종인은 저렇게나 조심스러웠다. 나는 좀 더 편해지고 싶은데. 세훈은 불퉁스러운 듯 입술을 잠시 내밀었다가. 너와 나는 같이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 나 혼자, 낮만 존재할 수 없기에 밤이 만들어진 거잖아. 하고 말해주었다. 종인은 살짝 감동받은 눈치였다.

“고마워요.”

“진짜 이번에 만나면 그 존댓말 안하는 거다?”

“네.”

애써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세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담과 하와. 얼마 안 된 인류의 시작이 종인과 저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담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하와가 만들어진 것이고. 둘은 인류의 번식을 위해, 두 사람이 저질렀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들은 신에게 증명해보였다.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한 마을이 형성되었고 점점 그 규모는 커졌다. 그리고 세훈은 아담과 하와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찌 보면 저도 아담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종인이 만들어졌지 않은가. 낮과 밤은 어쩌면 아담과 하와처럼 꼭 세상에 맞물려야할 중요한 톱니바퀴인지도 몰랐다.

일식은 삼일 뒤였다. 신들의 시간은 인간과 별다를 바 없었다. 다만 사람들처럼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늘 똑같고 지루한 일만을 몇 백 년 동안 반복해야만 했다. 세훈과 종인은 습관처럼 태양과 달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뛰어나게 부지런하거나 노고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조금 움직이고 쉬는 게 다였다. 태양과 달은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인 뒤, 습관처럼 세훈은 낮달을 찾았고 종인은 달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었다. 낮달이 떴구나. 아침을 볼 수 있겠어. 그리고 세훈도.

“많이 가까워졌네. 마음만 같아서는 그냥 한 번에 다 움직이고 싶다.”

“…그러지 마요. 미움을 살 거예요.”

“누구 미움을?”

“신의 미움이요.”

바로 눈앞에 달이 보이는 데 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세훈은 아닌 척했지만 종인처럼 모든 것의 신인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찮아. 삼일 쯤 빨라져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세훈은 태양을 달과 더 가까이 붙여놓지 못했다. 어서 눈앞에 보이는 달을 덮어두고 싶다. 그래야 수직선의 길이 열렸다. 그래야만, 종인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부분월식 역시도 종인을 볼 수 있었지만 종인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은 단언, 개기월식 때였다. 월식 때는 완전하게 달을 품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일식 때는 달이 해를 품었다. 종인은 어두운 것에 익숙했지만 세훈은 그러지 못했고. 종인은 밝은 곳에도 적응을 곧잘 했지만, 세훈은 밝은 곳에서만 종인이 보였다. 일식이 오면 세훈은 섣불리 발을 떼지 못했다. 종인이 먼저 가까이 와야만 종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밝은 곳에서만 있었기 때문일까. 어두운 곳에서 세훈은 날렵한 눈을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종인이, 안 보인다. 내가 먼저 찾았어야했는데. 어둠에 눈이 익은 종인이 먼저 세훈을 찾아 어깨를 붙잡았다. 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었다. 이번엔 분명 다를 것이다. 부분월식도 아니고 개기월식이다. 그리고 어두운 일식이 아니라, 그나마 밝은 개기월식이다. 세훈은 이번엔 제가 먼저 종인의 앞에 서있겠다고 다짐했다.

3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설명한 이유는 부분적인 일식, 월식은 태양과 달이 가까워지긴 하지만 온전히 달을, 해를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몇 미터, 인간들의 거리로 따지면 한 10m~20m가량 떨어져서 서로를 지켜봐야했다. 견우와 직녀라면 오작교라도 있을 텐데. 우주의 한 폭에 떨어진 두 사람은 발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 발에 무언가를 붙여놓은 듯, 아주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한 걸음도 뗄 수 없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암호닉 끌어올게요.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 하트..

72%님 심키님 안녕님 판다님 잉여님 렌즈통님 판다님 잉여님 텐더님 슈슈님
리마님 퐁퐁님 호호님 짜요짜요님
디니님 비밀님 파레라님 aa님 백백님 정모카님 삥님

암호닉 진짜 마감해요..ㅠㅠㅠ 봐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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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ㅜㅜㅜ좋아요ㅠㅠㅠ혹시 이 비지엠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부탇 좀 드려요/1/!
10년 전
독자1
심키입니다 !!!!!!!!! 와아아아어으어....새 작품!!! 너무 어렵다 ............... 기대하고 있으께여 (찡긋) 아 그리고 반전이라........ㅎ...왕가네....ㅎ...ㅎㅎㅎ....ㅎㅎ...ㅎ..ㅎ....
10년 전
독자6
제가 가입을 해서 돌아왔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언제오세요 정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돌아오길 기다릴게요 ㅠㅠㅠㅠㅜㅡㅠ사랑합니다 ㅠㅠㅠ공지라도 하나만 띄워놓고 가주세요 ㅠㅠㅜ
10년 전
독자1
파...판다입니다... 왕가ㅏ네 식구들이라면 암가네 식구들이라고 그 유명한...결말은 못 봤지만...헐...대체 어떤 결말이 나려는짘ㅋㅋㅋㅋㅋㅇㄴㅋㅋㅋㅋ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이 나네요ㅋㅋㅋㅋ튼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재미 있었어요♥
10년 전
독자2
렌즈통이에요!!!왕가네식구들...ㅇ항박이만 잫됐던..니니가 잘되야할팈데유....사장님이 알고..하..실망..찬열이도 안쓰러워요ㅠㅠ..세니도 그렇긴하지마뉴ㅠㅠ아련터지네요ㅠㅠ근데 백도는 해피터져요 배경이 여름이라 그런가 시원하면서 달달터져요~잘보고가요!!!하뚜
10년 전
독자3
72%에요! 왕가네버금가는ㄷ결말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난반전이있는건가요..!기대할게요 ㅋㅋㅋ! 와 낮과밤도ㄷㄷㄷㄷㄷㄷ기대할게요 ㅠㅠㅠㅠ
10년 전
독자4
안녕이에요! 흑지님 너무 오랜만에 오신거 아닌가요ㅠㅠ 너무 너무 기다렸어요ㅠㅠ 그나저나... 왕가네 버금가는 결말이라니... 개인적으로 왕가네 결말도 나름 재밌게 봤던 기억이... 너무 기대되는거 있죠ㅋㅋ 오늘 내용ㅠㅠ 세훈이가 진짜 종인이를 많이 보고싶어하는게 글에서도 느껴지는거 있죠ㅠㅠ 얼른 얼른 만났으면 좋겠어요ㅠㅠ 그리고 흑지님도 얼른 얼른 만났으면ㅠㅠ 흑지님 오랜만에 뵙는데 좋은글 감사해요♥
10년 전
독자5
흑지님 오랜만이에요ㅠㅠㅠ많이 바쁘신가봐요 흑흑ㄱ 왕가네를 안봐서 모르겠지만..기대할게요..!허허 잘보고가욤! 항상 파이팅!!!!!! ♥닥흑찬♥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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